어린 날의 그 놈은... 아주 어렸을 적의 기억이다. 어린애답게 작고 약간 통통했던 나는 놀이터 안에서 누군가와 놀고 있었다. 상대편 아이는 약간 가물거리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상당히 귀엽고 예쁜 아이였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돈 없이 꿰재재하게 사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그땐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아버지야 어디로 날른건지는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어느새 조금씩 주위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어머니와 나 이렇게 둘이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아묻튼 나는 그 상대편 아이와 만난지 얼마 안되어 한 해가 다 가도록 함께 놀았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드디어 굳은 다짐을 가지고 예쁜 상대편 아이에게 말했다. 그 아이의 이름이 뭐였더라? 흠... 기억이 잘 안나니까 그냥 패스. "xx 야 너 나 좋아?" " 응" " 세상에서 제일 좋아?" "............. 응............" xx 가 잠시 머뭇거리는 듯 싶었으나 곧 대답하는걸 듣고 나는 드디어 때가 왔다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xx 야 그럼 너 내 색시하지 않을래? 원래 결혼은 서로 좋아하는 사람끼리 하는 거랬어."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알 건 다 안다고 자부하며 스스로도 무지 대견스러웠던 그 시절. 당연히 '응'이라고 대답할 줄 알고 다음에 나올말까지 준비하고 있었는데! 대답은 의외로 no였다. " 안돼." xx 의 말에 한순간 패닉을 먹은 내가 뒤늦게 당황해서 물었다. " 어...어째서? xx 너도 내가 좋다구 했잖어. 세상에서 제일 좋다며!?" 그러자 xx는 상당히 고민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동안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xx는 상당히 예쁘고 귀여운 아이였던걸로 기억하지만 어린아이답지 않게 영악했던 나와는 반대로 상당히 어른스러운 아이었던 것 같다. 좋고 싫음이 분명하고 생각을 깊이하며 뭐든 행동으로 나타냈던... 어라? 상당히 어른스럽잖아? 무엇보다 나를 잘 챙겨주었던 것 같다. 없는 집 아이인 나에 비해서 그 아이는 만날 때 마다 내가 좋아하던 쵸코케잌, 고구마빵, 크로와상 등의 갖은 빵과 과자를 가지고 왔다. 그 땐 내가 평소라면 이름도 모르고 지나쳤을(설사 알았다고 해도 엄두도 못내었을...) 것들을 그 아이를 통해 알게 되었으니까. 아묻튼 그 아이의 집에 가본 적은 없었지만 대충은 부잣집 아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아이가 나의 고백을 거절했을 때도 그런 이유로 추측하고 울먹이며 말했던 것 같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아무래도 나는 그때 역시 순수한 어린아이에 가깝지는 않았던 것 같다. 보통의 어린 아이들이면 경제적 사정이고 뭐고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을텐데. 영악해서 좋은건지 너무 세상의 쓴맛을 빨리 알게 된건지.. 조금은 한숨이 나오는 듯도 싶군. " 흐....흐앙..!! 내가 돈이 없어서 그런거야? 나중에 크면 돈 많이 벌테니까 그냥 내 섹시해줘!! 으허허...허엉...나 머리도 좋으니까 공부 열심히하면 돈 많이 벌 수 있을거라고 그랬단 말이야! 난 정말 xx 네가 좋은데....흐엉...." 오... 이 처절한 어린아이의 외침이여! 다시 생각해도 상당히 쪽팔린 일이었다. 어쨌건 그땐 나도 어린애였으니까. 어리다는 특권 하나만으로 그렇게 쪽팔리고 민망한 말들을 줄줄 내뱉으며 울었던 나. 그래... 솔직히 기특하게도 세상물정 잘 파악하고 경제적 사정까지 염두에 두어서 말했다고는 하지만 어린애가 어린애지.. 그게 어디로 가겠냐만은... 그 아이는 생각을 하다가 놀란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와서 껴안으며 말했다. " 돈 때문에 그러는게 아니야. 난 정말 승하 네가 좋아." 차분하고 담담히 말하는 그 아이의 말에 나는 희망이 생기는 걸 깨닫으며 아직은 울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물었다. " 그럼...왜 내 색시가 하기 싫다는거야?" xx 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난 너의 색시가 될 수 없어. 시집도 갈 수 없고..." 난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좋아한다면서 나한테 시집을 올 수 없다는거지? 돈 때문에 그러는 것도 아니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얼굴도 귀엽고 근사하게 생겼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인정(?)받고 자란 몸이었다. 공부도 또래에 비해서 특출나게 잘하는 편이였다. 또 그것만이 아니었다. 우리 또래중에서 제일 크고 싸움 잘 한다고 소문난 승진이도 내 주먹아래 쌍코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돈(재력)만 빼면 완벽한 아이였다.(그 당시엔 나름대로 자아도취증이 있었다...) 왜 xx가 이렇게 잘난 나의 색시가 되기를 거부(?)한 것일까..? 그러나 곧 의문을 지우고 다시금 단순하게 흘러넘겼다. ' 다음에 또 고백하면 되지. 그때는 받아줄지도 몰라. 어쩌면 너무 좋지만 속으로 당황해서 그런걸지도 몰라.' 오... 이 영악하고 능글맞은 빌어먹을 어린애여. 나는 드디어 평소 xx에게 건내주기 위해 문방구에서 파는 눈깔사탕도 사먹길 포기하고 꾹꾹 참아 눌러 모은 전재산 200원으로 산 '지구방위대 특공 땅의반지' 두 개를 주머니에서 꺼내들었다. 개당 100원씩 하던 정의의 수호반지! ' 색시만드는 건 실패했지만 사랑의 정표라도 있어야 다른 녀석들이 임자있는 걸 알아채고 안 건들게 아냐?' ....... 정말 영악한 녀석이었군. 나는...... 가운데에 박힌 싸구려 녹색 플라스틱 큐빅이 당시에는 상당히 아름다운 초록빛을 띄며 영롱하게 반짝였으니....... 그때는 반지의 개념 자체도 어물어물하고(내 꺼라는 찜표시라는 것 밖에는...) 우선 다른 녀석들에게 내 색시감을 넘겨주지 않기 위해서는 반지부터 껴주고 봐야한다는 그 무대포 정신으로 그 아이에게 선물했던 것이었다. " 그럼 xx야 내가 이걸 줄테니까 절대 잊어버리지 말고 손에 꼬옥 끼구다녀. 알았지? 이건 내가 널 무지 많이 좋아한다는 표시니까!! 잃어버리면 안돼! 알겠지?" ".. 응" tv 에서 보면 반지를 끼워주며 두 남,여가 뽀뽀를 해주지 않았던가. 나도 역시 잊지 않고 xx의 가냘펐던 손에 끼워주면서 마무리로 볼에다가 뽀뽀도 해줬다. tv 에 나온것처럼 입에다 해주고는 싶었지만 참 이상하게도 그 아이가 나보다 더 컸으므로 까치발을 들고 뽀뽀해주자니 어딘가 자존심이 상해서 그냥 볼에다 했던 것이었다. 그 때 그 아이의 표정이 어땠더라? 비유를 하자면 꿀과 떫은 감을 한꺼번에 씹은 듯한 표정이랄까? 웃지도 화내지도 못하는 기괴한 표정? 아묻튼 재밌는 반응이었던 것 같다. 그당시야 나는 뭣도 모르고 어리둥절 했지만. 이렇듯 xx와 다정다감 오붓한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때마침 훼방을 놓는 방해꾼이 존재했으니. 꼭 분위기 좋은 이런 때에만 나타나 xx와 나의 사이를 갈라놓던 눈 찢어지고 엄청 재수없어 보이던 녀석! 역시 녀석의 이름도 잘 기억이 안난다. 솔직히 물어본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도대체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겠으나 xx는 그 녀석만 나타나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끌려 가야했다. 그 눈찢어진 녀석은 가끔씩 나를 보고는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엄청 무서웠던 걸로 기억한다. 제길... 저 새끼 언젠가 한번 맞짱을 떠서 납작하게 눌러주던지 해야지;; 우선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외쳤으나 실은 입도 뻥긋 못하고 xx가 끌려가는 모습을 처량히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비참하게도... 그 녀석은 너무 무섭게 생겼었단 말이다!! 그렇게 xx와 헤어지고... 다음 날 우린 다시 놀이터에서 만났다. 그 날 따라 왠지 기분이 붕붕뜨고 가만히 있어도 웃음이 살살나오는 것이 xx에게 대답을 들을 시간이 된 것이다. 어제는 그 싸가지의 방해를 받았지만 오늘만큼은 기필코!! xx에게 대답을 듣고야 말겠어! 그 때 멀리서 xx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표정이......? xx 의 표정은 말 그대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같이 매우 죽상이었다. 어린 내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를 어떻게 봤겠냐만은 내가 읽었던 책에 그런 표현이 있었으므로 더 이상 따지지 말고 패스하자. 나는 오늘 따라 기분나빠 보이는 xx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xx 야 무슨 일이라두 있어?" 그러나 xx는 대답하지 않고 나만 물끄러미 쳐다봤다. 나는 한동안 xx의 시선에 혹시 아침에 먹었던 김치찌개의 고춧가루가 얼굴에 묻었나를 의심해야했다. 자주 얼굴에 묻히고 먹으니까...;; 그러나 xx몰래 더듬은 내 얼굴은 멀쩡했다. 당연도 할 것이 xx를 만난 뒤로부터는 신경쓰고 다니지 않았던 청결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좋아하는 아이앞에서 자신의 꼬질꼬질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게 xx는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깊게 한숨을 쉬었다. " 승하야... 나 없어도 잘 지내야해." "....?.." 난데없이 이게 무슨말이지? xx 의 말을 이해하기 까지는 짧다고 하면 짧고 길다고 하면 확실히 긴 시간이 흘렀다. " 이번에 부모님께서 서울로 올라가신다고 했어. 그래서 나도 따라가야해..." "!!!!!"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개뼉다귀 떨어지는 소리라냐! 서울로 간다니? 서...울로 올라간다고? ".... 가...가지마!! xx야 가지마. 그냥 여기에 있으면 안돼? 으헝....엉.....엉....가지마!" ".... 승하야......" " 나랑 노는게 싫은거야? 나보다 서울가는게 더 중요해? 그런거야? 응?" 내가 울먹임과 더불어 최대한으로 불쌍한 표정을 짓자 xx의 얼굴이 한동안 일그러지다가 굉장히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조금만 더 조르면 왠지 xx가 이곳에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박차를 가해서 마지막말을 하려는 찰나 그 무섭게 생긴녀석이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 야! 빨리와. 짐 다쌌다. 너만 오면 돼! 부모님이랑 형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저 얄미운놈... 나쁜놈... 쓰그지 없는녀석!! 마지막 절정에 이렇게 초를 치다니!! "... 어......조금만 더 기다려줘." 그 무서븐 녀석은 뭔가가 못마땅한 얼굴로 이쪽을 흘끗보더니 곧 잠잠해졌다. 그러면서 슬쩍 손목에 걸린 부메랑시계를 쳐다보는 것이 은근히 압력을 주는 것도 같았다. 이에 xx는 뭔가를 결심했는지 단호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암만 봐도 여기에 남을 것 같은 표정은 아니었다. " 승하야. 미리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실은 부모님이 어제 갑작스레 말씀하셨거든..." 쿠궁!!!! 어제는 내가 큰맘 먹고 xx에게 고백하던 날이 아닌가? 그런데 하필 어제......라니! 나는 눈물이 망울망울 고이는 걸 느꼈다. 내 색시가 이사를 가게 되다니. 그것도 서울이라는 곳으로...... 나만 두고 가게되다니...! " 나중에 내가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면 승하 너랑 결혼할게. 꼭 너랑 결혼할거니까 너도... 나 절대 잊어버리면 안돼. 알았지? 꼭이야......!!!" xx 가 그 예쁜 얼굴로 매우 단호한 표정을 짓기까지... 나는 결국 떠나간다는 생각에 상심했지만 그 뒤에 나온 '나중에 커서 나와 결혼하겠다는' xx를 보면서 기분이 서운함+슬픔에서 다시 기쁨+환희로 바뀔만큼 기뻐졌다. "... 진짜지? 진짜 나랑 결혼할꺼지? 절대로 안 잊을테니까 꼭 나랑 결혼해줘야해! 약속이다!" 급하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흘끔흘끔 쳐다보는 그 무서븐 녀석을 깡그리 무시하고 나는 xx와 손가락을 걸고 비장한 표정으로 싸인 복사 코팅까지 마쳤다. 백년 가약을 맺은 춘향의 마음이 이랬을까? 나는 이제 저 녀석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아.. 정정한다. 나는 이몽룡이니까 춘향이를 남겨놓고 떠나는 몽룡의 마음이 이랬을까? 로 고쳐야겠다. 그래!! 반드시 훌륭한 남자가 되서 xx와 결혼해야지! 나는 나의 검지손가락에 낀 초록 지구방위대 반지를 보면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 이 반지 잃어버리지마~!!!! 이거 우리 결혼반지인거다!!!!!!!!!!!!!!!" 나는 그 무서운 놈한테 급하게 끌려가서 꽤나 멀어진 xx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갑자기 잘달리던 xx가 한순간 삐끗했다. 응? 왜 저러는거지? 뭐.... 어쨌든 진짜로...또 만날 수 있겠지? 그때는 xx를 진짜 내 색시로 맞아서 행복하게 살아야지!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으니까. 하지만 그 뒤로 다시는 그 아이를 만나볼 수도 없었다. 한동안은 놀이터 주변을 서성이고 멍하니 앉아서 기다리기도 했었지만... 결국 볼 수 없었다. 그 아이가 떠나간 뒤로는 일체의 소식도 전해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내 인생에서 그 외에도 감당하기 벅찬 여러 가지 일들이(학교라던지 어머니의 상이라던지...) 연달아 일어났을 때 난 더 이상, 어린시절의 향수같은건 떠올릴 수 없었다. 아니, 나는 까맣게 잊어가고 있었다. 그건 매우 어릴 적의 이야기였고, 지금의 내 현실과는 동떨어진 아주 먼 나라의 이야기라는 것을. 그 아이를 다시 만난다고 해도 나는 그때처럼 자신있게 다가서지 못할 것이었다. 울고불고 떼를 쓰는 것도 단지 그 때 뿐이었을테니... 내 첫사랑은 그렇게 끝난 것이었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내가 왜 갑자기 다 잊어가던 어린시절의 추억을 다시 떠올리며 궁상을 떨고 있느냐고? 간단하다. 다쓰러져 가는 단칸방... 오랜만에 방정리를 하다가 발견한 100원짜리 싸구려 반지...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가 되었다고나 할까? 내가 그 아이에게 선물해준... 눈깔사탕이 먹고 파도 꾹 참고 없는 돈 털어 사버린(200원이 내 유일한 전 재산이었다. 어찌됬든 우리집은 용돈을 꼬박꼬박 타 쓸만큼 부잣집이 절~대 아니었으니까. 말그대로 x구멍이 찢어지도록 가난하면 가난했지.) 지구방위대 특공 땅의 반지. 아묻튼 그렇게 쌍쌍으로 나눠가진 반지가 실수로 어머니의 유품인 조그마한 보석함을 떨어뜨리면서 튀어나왔다. 모르겠다. 이제는 얼굴이 예쁘게 생기고 어른스러웠다는 막연한 추측을 빼놓고는 형상도 가물가물한 그 아이가 아직도 이 100원짜리 싸구려 반지를 가지고 있을지는. 아마.. 버렸겠지. 내가 생각해도 너무 엉성한 결혼반지. 뭐... 나도 그 아이를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 남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 반지는 다시 나의 손길에 의해 보석함 속으로 들어갔다. 조그만 보석함 속에는 어머니의 흑백 증명사진과 반지...이렇게 두가지가 담겨있었다. 뭐....현재의 상황이 뻑뻑하긴 하지만 가끔씩은 이렇게 옛시절의 추억에 잠겨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사실은 몸에 밴 거지근성 때문에 뭐 하나 버리는게 아깝다.. 쩝.... 거기다가 이 두가지는 내 어린 유년시절을 회상할 수 있는 얼마 없는 매개체니까... 나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하자면 이름은 유승하. 급성 심장발작으로 의지하던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뒤 3년 후 아는 아저씨의 추천으로 서울로 상경해서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진 서울 인 서울 베스트5!! 명문고인(주저리가 길지만 어쨌든 명문고라는 걸 강조시키기 위해) 계원고등학교에서 입학식을 치루고 난지 어언 1년이 지나 2학년으로 올라간다. 간단히 요약해서 말하자면 잘난 명문고에 다니는 2학년생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몇가지 더 추가하자면 현재 경제적으로 상당히 딸리고 이 곳 계원고등학교에 들어온 뒤로 그나마 친구하나 없는 왕따 생활 1년이라는 것... 왜 그런지는 나중에 차차 알겠지만 그다지 좋은 상황이 아니라 별로 권장하고 싶은 정보는 아니다. 솔직히 계원고등학교에 들어올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차라리 다른 평범한 친구들을 따라서 근처의 명문고라고 불리기는 뭣하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잘 알려진 평범한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평범한 친구들과 그럭저럭 평범하다고 할만한 일상을 지내는게 내 바램이었는데...그랬었는데...... 오 지저스! 나의 이 좋은 머리는 이런 나의 소망에도 불구하고 그만 전교 2등이라는 빌어드실 등수를 맞아버린 것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기필코 이 등수를 맞으면 행복해하겠지...그렇겠지... 기뻐하겠지! 하지만 난 아니란 말이다!!!!!!!!! 괜히 쓸데없이 성적만 높아진 덕분에...선생님들의 권유와 심지어 교장선생님의 압박으로! 나는 결국 계원고등학교로 떠밀려가게 되었다. 그 와중에 제시된 '교장에게 추천서를 받고 들어온 사람에게는 이유를 막론하고 무조건 3년치 전액지불'의 장학금 제도라는 것도 어느 정도 한 몫 했다고 할 수 있겠다만... ... 쩝...... 일단은 돈이 안들어 간다는게 중요하니까. 그나저나 왜 이렇게 파격적인 대우로 나 같은 능력좋고 가진거 없는 녀석을 모셔가느냐고...? 이거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법한 사람도 있을테니 간단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쓸데없이 피곤한 과시욕이랄까...쳇.. 그래도 명문고라고 소문난 계원고등학교가 아닌가? 그러나 문제는 이 학교의 실세라는 것에 있다. 본디. 계원고등학교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많이 모이기도 하고 또 실제로 많은 인재를 배출해내기도 하지만 부잣집 자제들이 대량으로 입학되는 곳으로 유명한 학교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명품고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부잣집 자제들이 나처럼 머리 좋고 외모 근사하고 능력 좋은 녀석들만 들어오느냐? 그건 또 아니올씨다라는 말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온갖 사교육으로 성적좋은 자제들이 대부분 들어오는 편이긴 하지만... 그만큼 속빈 강정같은 녀석들도 많이 들어오는게 허다해서... 나같이 유능한 인재들을 이렇듯 파격적인 대우로 모셔간다. 일단은... 성적이 나와야 명문고도 계속 유지될 수 있을테니. 그런면에서 나는 빈부격차의 쓰린맛을 보는 또 다른 서민피해자라고 할까... 능력좋고 가진게 없는 나의 비애라고나 할까...! 뭐... 원래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나의 중학교 2학년 네모네모 영어선생님께선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지. "Life is originally unpair!!(인생은 원래 불공평하다.)" 그리고 나도 심히 선생님의 그 말씀에 동감했다. 뇌리에 사무쳤던 명언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선생님의 말씀처럼 불공평하게도 그날 나 혼자서만 남아서 청소를 끝마치고 가야했지 ... 흠......그걸 예견하시고 하신 말씀이었을까? 나무함에 반지를 넣고 대충 정리를 끝마쳤다. 그래봤자 방안에 가구라고 부를만한 것은 밥상과 비닐옷장뿐이었고 나머지는 부업에 의해 생겨난 잡쓰레기들과 여러 가지 잡동사니였다. 평소에 나름대로 청결을 유지했다고 생각했었지만... 이불빨래를 하는 김에 그냥 방청소까지 더불어 해버렸다. 원래... 하던 것은 끝까지 하는 성미라... 한번 신경 쓰는 일들은 기필코 만족할 때까지 하는 편이다. 그것이 방정리라 해도 말이지. 온몸이 욱씬욱씬했다. 그 두꺼운 이불들을 주인아줌마의 허락을 받고 옥상에 널어 놓은것도.. 조그마한 내 단칸방의 잡쓰레기들을 정리하고 옛 물건들을 다시금 쓸어본 것 까지... 이몸으로 내일 학교갈 걸 생각하니 또 막막하군. 가뜩이나 미운털이 많이 박혀서 요새 내몸에도 심심찮게 멍들이 하나 둘 늘어가고 있는데... 난 살아가기도 바쁜 몸이라고..쳇..... 역시나랄까... 흠... 뭐 특별히 크게 감격(?)이라도 먹을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 나쁘긴 늘 매한가지이지만... 유치한 놈들. 학교와의 거리가 멀어서 늘 2~3분을 남겨놓고 아슬아슬하게 등교하는 나로써는 누가 범인인지도 알 수 없다. 의심가는 놈들이 너무 많아서... 고등학교에 들어오고 나서는 쭈욱 이모양이다. 하지만 이런일로 나의 시간을 잡아먹게 된다는 것도 그다지 유쾌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 책상위에 배가 갈려서 늘어진 쥐새끼 시체... 잔인한 새끼들. 정말이지.. 처리하기 곤란한 것들만 늘어놓는군. 이 머저리들은. 쯔쯔.. 쥐새끼 너도 참 불쌍하다. 어쩌다가 나란 놈이란 인연이 닿아서 그렇게 처참하게 죽었냐? 아니지... 아무렇지 않게 네녀석의 배를 가른 녀석들이 더 끔찍할지도... 잠깐동안 내장을 흩트리며 책상위에 올려져있던 쥐의 시체에 대해 애도를 표하고 한숨을 쉬었다. 아마 나의 표정은 끔찍할 정도로 무표정할꺼다. 원래 감정이 격해지면 그와 반대로 나타나는 몸의 반응이었다. 그러다가 폭발할 때도 있지만 이건 매우 드문 사례니 넘어가고.. 어쩌면 이 무표정 때문에 녀석들이 더 열받아서 이런 만행을 계속 저지르는 것일지도 모를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쳐도 내가 그 녀석들에게 찾아가 이런 사정을 굳이 설명해줄 필요도 없거니와 설명한다해도 들어먹을 놈들이 아닐테니... 이래저래 나만 손해인셈이다. 그리고 더 끔직한건 지금부터다... " 여어~ 얌생! 네 책상위에 너랑 딱 어울리는게 올려져 있는데?" " 휘유우우~! 진짜 딱이다. 저 새끼랑 궁합 존나 좋은데?" " 야야! 쟤 얼었잖냐. 누구야! 얌생이 책상위에 저런 깜직한 짓을 한놈이!! 큭큭..." 대놓고 말하는 새끼들도 있고... 이쪽으로 힐끔힐끔 눈치봐가면서 소근거리는 여자애들도 있고... 그러고 보면 우리반 여자애들도 보통이 아니군. 보통 이런 시체를 보면 소리부터 지르고 꺅꺅 거리는게 다반사아닌가? 물론 그걸 바라는건 절대 아니지만. " 야.. 재 불쌍하다... 어쩌다가 쟤네들한테 찍혀가지고..." " 어머! 무슨 소리야. 너 쓸데없는 말 하지말어. 그러다가 너까지 찍히면 어쩌려고 그래? 안그래도 저기 앞에 앉아있는 희정이까지 쟤 엄청 재수없어 하잖아. 남자애가 되가지고 저꼴이 뭐냐. 나같으면 쪽팔려서 학교 안다니겠다." " 그나마 공부라도 잘 한다고해서 옆에 있으면 건덕지라도 건질게 없나했더니만.. 진짜 신기하다. 어떻게 그 성적으로 입학식 때 전교 2등이나 해먹은건지...흥!" " 주아 너... 목소리가 너무 크잖아." " 뭐 어때? 지가 들으면 어쩔거야. 그래봤자 재수없는 얌생주제에... 쟤 우리반 왕따아냐?" 아... 다 들린다. 제일 짜증나고 귀찮은 것.. 그리고 정말로 듣기 지겨운 것... 멋대로 남에게 평가된다는 점. 그것도 나보다 훨씬 하찮은 것들에게서 받는 멸시까지... 나 역시 너희가 지겹다는 사실을 알까나 몰라? 그것도 부모 덕으로 학교 다니는 얼간이들이... 안타깝게도 기분나쁘긴 하지만 이럴땐 묵묵히 무시하는게 최선의 방법이다. 괜히 저런 녀석들과 마주치면 심력소모만 될 뿐... 가만있어도 건들이는 녀석들인데 더불어 함께 다툼을 할만큼 나는 여유롭지 못하다. 오늘도 할 일이 잔뜩 쌓인 관계로. 나는 그대로 청소함에 가서 빗자루와 쓰레받이를 가져왔다. 잘가거라. 쥐여... 그대로 쓸어버리자 쥐의 피가 책상밑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그때는 여자애들도 어머! 꺄아~! 라는 등의 단발마로 그나마 정떨어지지만 조금의 정상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도 눈으로 계속 흘끔거리는 걸 보면... 내숭도 수준급이다. 쩝. 이대로 확 던져서 좀더 잘 보이도록 만들어주고 싶지만... 그랬다간 아무리 나라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버릴지 모르니.. 쓰레기통에 고이 버려야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쥐의 시체를. 아아.. 이젠 어쩌나. 책상위와 그 주변에 어지러히 널려진 저 핏물과 시체의 잔해를... 젠장. 피비릿내가 시큼하다... 빌어드실...... 정말 두 번다시는 상대하기 싫은 악질적인 장난이다. 그때만큼은 이 머저리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인상을 찌뿌렸다. 자신들이 해놓고도 역시나 입맛 뚝 떨어지는 일이겠지. 나는 교실 뒤에 널려있던 걸레중 아무거나 하나를 집어와서 쓱쓱 닦았다. 걸레는 쥐의 피를 흠뻑 빨아들인채 요상한 냄새를 풍겼다. 나도 속이 미슥거리는걸 참으며 화장실로 가야했다. 교실을 나서고나자 안이 소란스러운 것이 또 나를 반찬삼아 뒷다마 들이나 까고있겠지. 원래 나약한 놈들은 자신들의 열등감을 해소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험담하는 법이니까. 이 짓도.. 그 일환의 하나일테고. 하여튼 나보다 열등한 것들의.. 발악이라고 해두자. 그러고 보면.. 저 아이들에게 나는 어쩌면 이상한 동물일지도 모르겠다. 하긴 나의 환경자체를 생각도 못해본 존재들일테니.. 아직 찝찝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깨끗해진 책상에 앉아 이제부터 내가 해야할 일들을 곱씹었다. 우선... 목걸이부터 만들어볼까... 변함없는 나의 일과. 책가방에 책대신 들어있는 구슬상자를 꺼내들었다. 안에는 지겹게 반짝거리는 조그마한 구슬들과 큐빅이 가득히 들어있었다. 우선 낚싯줄을 꺼내고 안에다가 구슬부터 끼어 넣어야지... 내가 지금 무얼하느냐고? 부업... 그것도 꽤 짭짤한 부업!! 일명 수제 큐빅목걸이 만들기... 서울로 올라온 뒤 3년전부터 소개받아 계속해오던 일거리중 하나였다. 아무래도 아르바이트 만으로는 모자란 생활비를 메꾸기위해 시작한 거였는데 이제는 이골이 나서 처음엔 하루종일해도 3~4개를 만들던 목걸이나 팔찌들을 이제는 9~11개도 문제없이 거뜬히 해낸다. 이걸보면 내가 참 대단한 존재라는걸 새삼 깨닫는다. 비록 남들이 비웃는 일이라고 해도말이다. " 얌생이 또 저거하네?" 그래. 오늘도 이거한다. 어쩔껴? " 냅둬라. 선생님들도 포기했잖냐. 계집애도 아니고 사내새끼가 저런짓이나 하고... 씨발...... 좆구리네." 요새 사내, 계집애가 어딨어? 성차별적인 발언만 골라하는군. 그리고 선생들도 포기한 일에 대해서 지가 뭔데 난리여? " 미친놈. 하루 이틀이냐? 저 새끼 고아래잖아. 저런 거라도 안하면 굶어 죽을 정도로 가난하다며?" 굶어죽을 정도는 아닌데. 뭐 가난한건 맞으니까. 그나저나 언제까지 내가 하는것만 볼꺼냐? 병신들. 그렇게 할 일도 없나? " 아우~ 볼때마다 재수없어. 솜씨도 그지같은게!" 지금 네년이 팔에 낀 큐빅팔찌 내가 6일전에 반납한거다...이년아. 속으로 일일이 대꾸해주며(그러나 절대 겉으로는 표내지 않는다. 이게 바로 프로!!) 부업에 몰두했다. 완성된 목걸이 하나당 3000원이다! 이런 짭짤한 부수입은 여간해서는 구하기 쉽지않다. 그만큼 장인정신이 요구되는 일이긴 하지만. 내 실력은 업계(?)에서도 이름날 만큼 꽤 괜찮은 솜씨이다. 나중에 이걸로 장사를 해서 밑천을 모아 사업을 벌여볼까하는 반은 농담...반은 진담인 생각도 했을정도이다. 그러나 나의 이 겁나게 찬란하신 다른 능력들을 썩힐수는 없기에 만일의 경우를 대비한 차후책으로 지정했다. 아~! 뭐든 잘하는 사람에게 한가지만 선택하라는건 곤란하지만 어쩔 수 없지. 다 내가 잘나게 태어난 덕분 아니겠는가? 안 그런가? 세상이여! .............. 대답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두자. 드르르륵.....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면서 어떤 놈이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솔직히 부업에 몰두하는 중이라서 내가 그놈이 누군지 알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들어왔다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뚜벅...뚜벅...... 발자국 소리까지 내면서 걸어들어오는 어떤 놈이 묘하게 신경에 거슬렸다. 그 발자국 소리가 나에게 향하는 것까지... 나는 그 즉시 손에 쥐고 있던 부업을 떼어 놓고 방어자세에 돌입했다. 퍼억!!!!!!!!!! " 컥!!....크..ㅅ..." 역시나 놈이다... 빌어드실. 나는 난데없이 그 놈이 내지른 주먹에 뒤로 나자빠져야 했다. 나를 친 이놈의 이름은 계세야. 참 특이한 이름이다. 성이 계씨인데다가... 이름은 세야. 발음 잘못하면 완전 개새야! 라는 욕으로 변형한다. 저 놈도 그게 거슬리는지 성까지 통째로 부르는 놈들이 있으면 보는 사람이 다 불쌍해질 정도로 패놓는다. 물론 나도 당해봤다. 물론 나는 놈에게 처음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별로 만날 일도 없었을 거라 믿었기 때문에 그저 그러려니 넘어가려 했지만 다른 녀석들에겐 이놈이 꽤나 무섭고 다가서기 힘든 존재였나 보다. 덕분에 우리반은 이새끼가 들어오면 매우 조용해진다. 그 시끄럽고 철판 깔아놓은 듯한 계집애들 까지도... 그나저나 내가 왜 이렇게 얻어터지냐고? 쓰벌...... 나도 그 이유나 좀 알고싶다. 왜 나를 볼때마다 이렇게 패는건지! 이런 이유도 알 수 없는 무의미한 폭행을 도대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얌전히... 그야말로 성실히 학교에 나와서 알아서 입닥치고 쭈그러진 나에게 행해지는 건지!! 이유라도 알고 얻어터지면 그나마 같쟎은 이유라도 납득하겠는데...... 이거는 처음 볼 때 빼고는 계속 이모양이니....... 아니 놈은 나를 처음 봤을때부터 이상한 말로 사람혼을 쏙 빼놓고 마구 구타했다. 제길...그뒤로 쭈욱 알 수 없는 화풀이에다가 이런식의 시비이다. 내가 저 새끼에게 반항을 안해본 것도 아니다. 처음엔 억울해서라도 기를 쓰고 덤볐었다. 잘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던 주먹질이었는데... 저놈은 무슨 터미네이터라도 찍는건지! 파워도 엄청나고 스피드까지 겸비한 타고난 투견이다. 여기서 투사가 아닌 투견이라고 부르는 것은 말그대로 저놈은 개.새.끼이기 때문이다! 이름도 지 성깔을 쏙 빼다박은 개! 세! 야! "..... 일어나........." 지가 자빠뜨려 놓고는 또 일어나라는건 뭐냐? 아니 일어나면 또 주먹을 날리겠지. 안봐도 비디오! 못봐도 오디오다.(오디오는 귀로 들으니까) "... 크흣.....윽..." 썩을놈의 새끼. 얼마나 쎄게 때리면 아직도 입안이 얼얼하냐! 맨날 때리면서 좀 사정좀 봐주면 안되나. 이 자식은 언제나 나를 때리는 것에 대해서 만큼은 눈물이 날 정도로 집중을한다. 온 성심성의껏 때려준다고 해야하나? 아무리 때려도 결코 대충 때리는 법이 없다. "... 네놈이 눈에 거슬려......그것도 아주 많이......" 퍼억!!!!!!!!! 그러면서 또 한 대... 아아.. 우리반 애들은 매우 흥미진진한 눈으로 이 난투극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다.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으니 결코 난투는 아닌가? 이 계세야라는 놈이 성질이 장난아니게 더럽고 게다가 매우 차가워보이는 외모이기 때문에 대놓고 구경하지는 못하고 저렇듯 힐끔거리는 것이리라. 인간은 이래서 몹쓸 존재라는거다. 뭐..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이 쌈구경이랑 불구경이라고 하는데... 나도 거기에는 어느정도 동의하고, 솔직히 당사자가 나만 아니어도 아마 저놈들이랑 똑같이 재미나게 구경...할 리가 없잖아! 제길. 그래도 기본적으로 도덕의식은 갖추고 있다고! 그러고 보니... 딱 하나 이 녀석에게 맞을만한 이유가 생각났다. 결정적으로 내가 이 학교에서 본의 아닌 왕따를 당하게되고 아침마다 이렇게 이 개새한테 잡혀서 쥐어터지게 된 사건...!! 이 새끼는 일부로 표안내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마 그일 때문에 보복으로 나에게 이러는 것임이 틀림없다. 첫 입학식날 서울에 올라와 어느정도 적응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고등학교 건물이 설마하니 상상을 뒤엎을 정도로 이렇게나 막대할 줄은 몰랐다. 상류층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라서 뭔가 달라도 엄청 달랐던 것이었다. 잔디가 깔린 넓은 운동장... 꽤나 공을 들여 만들었을법한 조각상들과 얼굴에 반짝반짝 빛을 내며 걸어 다니는 학생들까지! 만년 단칸방 신세에 짜장면 한그릇도 제대로 먹어본 적 없는 나에게는 그야말로 별세계였던 것이었다. 뭐... 별세계든 신세계든 앞으로 내가 다녀야할 학교였으니......입만 벌릴순 없는 일이지. 혹시라도 부자 친구놈 하나 잘 사귀어 놓으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나?... 라는 지극히 건설적이고 얍삽한 생각을 하면서 교단을 걸어가고 있을때였다. 늘 그렇지만... 흔히들 주변에서 많이 일어나는 일들이었지만!!! 설마하니 내가 직접 목격하게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직은 순박한 꿈을 안고 서울에 올라온지 1년 조금 넘겼을 뿐인 순수한(?) 소년이 이런 과격한 장면을 보기엔 주위 환경이 따라주지 않았다고나 할까? 어쨌건 중학교도 그럭저럭 평범한 곳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오오..... 이게 바로 그......소문으로만 들어봤던 폭력서클이라는 것이었던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니... 놀랍도다! 저기 껄렁껄렁하게 서있는 놈들은 전부 어느 한 녀석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요상한게;;; 왜 아무런 대화도 없이 가만히들 서있는거냐;; 그러나 나는 곧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아니... 깨닫을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그렇게 전개되어 버렸으므로.. 얼마안가 몸으로 깨닫을 수 있었다. 가운데에 둘러쌓인 녀석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시선을 따라 노란머리의 한 녀석이 덩달아 나를 쳐다보았다. " 씨발... 저 새낀 또 뭐야?" "......" 방금 나보고 한 소리 맞지? 그렇지? 노란머리의 말로 한순간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이거 상황이 상당히 난처하게 돌아가는 거 같은데...... 유승하 이 미친놈. 이럴땐 알아서 찌그러지고 꺼질 일이지 여기서 괜히 알짱거렸다가 이게 왠 날벼락이냐! 그러나 사나이 유승하. 결코 너희들의 그 허접스런 눈빛으로 쫄아들만큼 약골이 맞다 이거야!!! 제길... 한두명이라면 쥐어 박을 수 있겠는데 저 놈들의 쪽수가 너무 많다는게 문제라면 또 문제지......윽... 아무리 내가 힘이 쎄다고 하지만... 혼자서 7~8명을 어떻게 쓰러뜨리냐! 게다가 저 자식들 엄청 잘먹어서리 덩치도 커다래가지고.. 잘못 맞으면 뼈도 못추릴거야. " 야...!! 여기가 어디라고 알짱거려? 응? 키도 좆만한게 겁대가리도 없이말야.." 뭐야? 이 새꺄!! 이래뵈도 키 177cm다! 나보다 0.5cm더 커보이는 주제에 누구보고 키가 작다는거야! 그리고 이정도면 평균이상이라고! 썩을놈의 새끼... 으허... 입학식 첫날부터 좆됬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에게만 이런 개뼉다귀같은 일들만 생기는거냐!!! " 야야! 길성아! 냅둬. 꼬라지 보아하니 요번에 새로 들어온다는 신입생들중 한명인거 같은데. 거기다 오늘은 이 녀석과 볼일도 있으니까 괜히 힘빼지말고 돌려보내." ......... 오.............이런!! 하느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거기 눈썹에 피어싱한 형님 정말 감사합니다. 역시 뭔가를 아시는군요!! - 정말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저같은걸 족쳐봤자 솔직히 말하자면 백원도 안나옵니다!! 말그대로 빈털털이거든요. ".... 씨발...너 오늘 운 좋은줄 알어라? 응!? 그리고 앞으로 이 근처에서 한번만 더 알짱거렸다간 모가지 비틀어 버릴 줄 알어." " 저 새끼 오늘 운 정말 좋은데. 평소라면 반 죽여 버렸을텐데. 안그러냐? 성태야." " 킥킥.....킥킥킥........" 쓰벌.. 네 녀석들이 제발 와달라고 고사 지내도 이 근처에는 알아서 안 올꺼다. 이 병신들아. 내가 미쳤냐? 괜히 삥이나 뜯기고 얻어터지게? " 감사합니다! 이만 안녕히 계세요." 기분이 더러운걸 최대한 억누르며 바르게 90도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빠져나가려는 순간!! 하필 이때 빌어먹게도 이 패거리들에게 둘러 쌓인 녀석이 생각나버렸다. 이제까지 잠자코 있어서 나 하나밖에 생각못했는데......이런 젠장.... 그러고 보니 저자식이랑 볼일이 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저 녀석 혼자서 여기 있는 놈들이랑 맞붙는다는건가? 뭐야... 이거 상당히........불공평하잖아. 처음에 그 놈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봐서 일이 이렇게 된 거였지만... 음......제길...... 나란 놈은 도대체가...... " 야! 씹! 너 빨리 안꺼질래? 아갈창을 찢어버릴라! 생긴것도 얄상한게 기회를 주면 알아서 기어야지 굼뜨고 지랄이야." 미안하우... 나도 왠만하면 알아서 튈라고 했는데... 돌아가신 엄니가 불쌍한 사람은 도와줘야 한다고 했거든. 뭐... 나도 그다지 착한놈은 절대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불공평한거 같단 말씀이야. " 저기 형님들... 죄송한데 저기 있는 저 사람도 같이 가면 안될까요?" 8"........" 크헙... 말했다. 말했나? 음... 말했군.. 아하하하하하... 말했다....................어...........흐.... 내가 미쳤구나!! "......." ".... 아.......씨발... 이게 진짜 곱게 보내주려고 했더니만 안되겠네. 방금 뭐라고했냐? 저놈이랑 같이 보내달라고? 하! 주제를 알아야지...야! 성태야. 안되겠다. 우선 이놈부터 조져놓고 저새끼는 나중에 손봐야겠다." 아마 그 피어싱을 한 사람의 이름이 성태인 듯 노란머리가 소리치고는 나에게 다가왔다. " 미친놈... 주제를 알아야지. 우리가 누구라고...씹새끼야!!!!!!!!!!!!!" 노란머리가 뻗어오는 주먹을 보며 나는 얼른 몸을 뒤로 제꼈다. 그리고 아무래도 발을 들인이상 조용히 넘어갈 수는 없을 듯 싶군... 이 한몸 망쳤다 생각하고... 그럼......어디 한번 해볼까? 내가 노란녀석의 주먹을 피하자 약간 당황했는지 주춤거리는 사이에 녀석의 상단부를 향해 킥을 날렸다. 이봐... 물론 내가 몸이 좀 가늘고 얄상하게 생기긴했는데 말이야... 얕보면 곤란하다고. 이래뵈도 가벼운만큼 스피드가 있거든!!!! 녀석 역시 싸움을 많이 해본 듯 나의 킥을 피하면서 몸을 숙였지만 나도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발을 아래로 내려 가격했다. 퍽!!!!!!! " 크허헉!" 오오~ 타격소리와 함께 울리는 멋진 비명! 하긴... 어떤놈이 공중에 날린 발을 그대로 내려칠 수 있겠느냐만은... 나를 다른놈과 똑같이 생각하면 곤란하지. 이것도 나름대로의 노하우라고. 그러나 노란머리는 기어코 다시 일어났다. 헤에... 기술이 좋은 반면에 파워가 약하다는게 나의 가장 큰 약점이랄까. 내리치더라도 플라스틱과 쇳덩이의 강도는 확실히 다르니까 말야. 비유가 좀 이상했나? 어쨌든... 저놈 눈빛 보아하니 완전 맛이 갔군... " 이...개새끼가...............!!!!!!!!!!" 꿈....틀.... 그때였다. 가운데에 둘러쌓여 있던 놈이 순식간에 몸을 박차고 나와서 노란머리에게 주먹을 뻗친 것은. 퍼억!!!!!!!!!!!! 히끅! 엄청......아프겠다. " 너 무슨짓이냐!!!! 왜 갑자기!!!!!!!!!" 그때까지 나와 노란머리의 녀석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패거리들도 갑자기 튀어나온 녀석에게 놀란듯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나저나 뭐야... 왜 안 덤비는 거지? "... 꺼져. 볼일없으니까." 나직히 울리는 저음과 함께 차가운 눈빛으로 패거리들을 노려보는 녀석은 왠만큼 신경이 굵다고 자부하는 나도 흠칫할 정도였다. " 너 세현이 동생아니었나!!!!!!!!" 세현이 동생? 가만... 잠시 상황좀 정리해보자. 흠... 저 패거리들이 한말은... 그러니까 여기 갑자기 튀어나온 이녀석을 아는 듯한 말투... 그렇다면...... 에...........그러니까 그 볼일이라는 것도... 말그대로 볼.......일을 말하는건가? "......." 어쩐지...... 포위만 해놓고 손대지 않는다했더니...... 결국 이 패거리들이 아는 녀석이라는 뜻? 그말은... 내가 괜히 깝죽거리지 않아도 볼일을 끝내면 고이고이 돌려보냈을 법한.. 상황...... 거기다가 지금 저놈의 일격을 봐서는 결코... 만만히 당할놈이 아닌 듯 싶다. 이....이런 갓 뎀!!!!!!!!!!! 내가 지금 무슨일을 저지른거냐!! 말그대로 주제넘은 짓을 저지른거군!!! 괜히 깝죽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제길...제길;;; "... 그...그럼 저는 이만......아하하하하.....하하...." 그러나 안타깝게도 은근슬쩍 상황을 봐서 도망치려는 나를 세현의 동생인가 뭔가하는 그녀석이 붙잡았다. " 기다려. 넌......" 쓰불....쓰불... 도대체 전생에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 내 앞길만 이리도 꼬이냐구요! 거기다가 오늘 처음 보는 놈 때문에 이만큼 봉변당해주면 된거지;; 왜 붙잡기까지 하는거냐! 젠장~! 곧 입학식 시작한단 말이다! ".. 네에...? 저 말이야요?" 삐질거리며 뒤를 돌아서며 말하자 그 놈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말했다. 왠지 어딘가 낯설은 홍조를 띈... 약간은 쑥쓰러운 듯한 모습으로... " 오랜만이다...... 승하.....유승하 맞지?" "....... 아?..." 어...어? 이녀석....... 나를 알고 있어? 그런데 오랜만이라니.........? 누구지? 내가 아는 녀석들 중에는 이런놈이 없었는데? 거기다가... 이런 부르주아 학교에 다닐 정도라면... 알 리가 절대 만무하잖아!!!!! " 누구.......냐?" 내가 약간 당황해서 녀석을 쳐다보자 헙...;; 처음에 부드럽게 휘어진 눈꼬리가 험악하게 일그러지면서 나를 쏘아보았다. 뭐;;; 뭐냐 이놈. 자기가 먼저 아는척 해놓고 갑자기 인상쓸꺼는 또 뭐야;;; "....... 벌써 날 잊어버린거냐?..." 잊다니;; 뭘 잊어. 잊을게 있어야 잊든지 말든지 할꺼아냐;; 그럼 다짜고짜 지나가는 사람 잡아다가 날 아냐고 물으면 당연히 누구냐고 물을 수 밖에 없는거잖아;;; 거기다가 이 녀석처럼 인상 깊은 녀석은 한번만 보아도 다시 잊기는 만무한데.. 난 오늘 처음 만나는 거라고;; 앞으로 잘 기억해 두라고 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갑자기 이러면 아무리 머리좋은 나라도 곤란하다구;;; 그러나 녀석은 이런 나의 사정과는 관계없이 엄청나게 분노한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 때 그다지 존재감 없게 느껴졌던...(상황이 이렇다보니 본의 아니게 무시를 당하게 된..) 패거리들이 들고 일어섰다. " 뭐야? 아는 새끼냐? 씨발..그보다... 우리 이번 일에..." 퍼억!!!!!!!! 그러나 끼어들었던 녀석은 끝내 말을 잇지못하고 내 앞에 서있던 놈의 손에 의해 쓰러졌다. " 당장 꺼져라. 더 이상 경고하지 않겠다. 네놈들이 세현형을 알던말던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니까 귀찮게하지 말고 꺼져!!!!!!" 이놈.. 성질도 더러운데;; 이러다가 나도 얻어 터지는거 아니냐;;; 그렇다고 순순히 맞아줄 나도 아니지만 왠지 위험하다;;; " 뭐!!? 세현이 동생이라고해서 봐줬더니 이젠 아주 머리끝까지 기어오르네! 씨발! 넌 선배공경도 모르냐? 야! 볼거없어. 저 새끼 조져놔. 보아하니 세현이도 이번일에 대해서는 별말 없겠지! 간만에 좋게 말로하려고 했더니만 씹.." 맞은 녀석이 분노했는지 갑자기 놈에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뒤에 있던 패거리들도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비겁한 자슥들... 쪽수도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덤벼들건 또 뭐냐;; 어찌되었든 나 역시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단 이유하나 만으로 녀석과 더불어 함께 상대해야 했다. 나에게 제일 먼저 덤벼든 녀석은 아까 맞고 쓰러진 노란머리의 녀석이었다. 마지막에 머리통을 깐 녀석은 놈인데 왜 내가 분풀이 대상이 되야하는지;;; 한숨에 한탄이 더해져서 주먹을 날리는 녀석의 면상을 다리로 걷어차 버렸다. 퍽!!!! 헤에~ 상쾌한 타격소리!! 흠흠... 이래뵈도 난 다리도 긴편이거든. 훗.. 그러나 상대는 노랑머리녀석 뿐만이 아니었으므로 뒤이어 다른놈이 또 덤벼오고 있었다. 제길;; 산넘어 산이라더니만 그럭저럭 싸움실력을 발휘해서 2명을 상대하고 난후 다른 놈이 덤벼올걸 대비해서 자세를 낮춘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게 뭔일이라냐;;;; 주위에는 내가 쓰러뜨린 2명을 제외한 나머지 놈들이 깔끔하게 바닥에 뻗어있었다. 그것도... 기절씩이나 한듯이;;; 헛... 마지막에 그 놈과 대치한 듯한 사람은 나를 그냥 보내주라고 말했던 그 피어싱을 한 녀석이었다. 놈은 눈살을 찌뿌리더니 말했다. "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았나? 솔직히 우리도 꽤 정중하게 제의했다고 생각하는데?" 음... 저 피어싱이 이 패거리의 대가리인가 보군;; 떨떠름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데 놈의 입이 열리면서 낮은 저음의.. 그러나 왠지 살떨리게 시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거절한다고 말했을텐데? 네놈들이 말귀를 못알아 들어서 생긴일 아닌가? 세현형이 뭐를 했던지간에 나와는 관계없다고 다시 말해줘야 아나? 난 이딴 허접스러운 패거리에 낄 생각도 없거니와... 무엇보다도.. 귀찮은건 질색이다. 네 놈들이 무슨 짓을 하건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 이상 나를 귀찮게 만드는 경우에는... 다시는 걸을 수 조차 없도록 만들어주지.." 무시무시하다;;; 피어싱 역시 인상을 구겼지만 더 이상 아무말도 꺼내지 않았다. 헤에.. 저녀석들이 저렇게나 저자세라니;; 흠... 저 놈이 대단한 놈인가 보구나;; 괜한놈 건들였다가 물먹는거 아닌가;; 쳇;; "...... 젠장...가라. 이 새끼들 다 뻗게 만들어놓고 해도 너무 하는구만." 피어싱의 허탈한 목소리가 이어지면서 시선이 잠시 나에게 머물렀다. " 그런데 저 녀석은 어떻게 된거냐?" 저 녀석이라는 말은 아마도 나를 뜻하는 듯 싶었다. 그제야 놈도 뒤돌아 나를 보더니 다시금 인상을 찌뿌렸다. 왜 이자식아;;; 난데없이 얼굴 구기고 난리야;;; 가뜩이나 차갑고 잘나보이는 얼굴 그렇게 만들면 보는 사람의 심장도 오그라드는건 알고있냐? 그러나 입밖으로 꺼내지는 못하고 뻘쭘하게 쳐다봤다. "...... 예전에 알고 지냈던 사이..." 짤막하게 끊어지는 놈의 목소리를 들으면 난 황당해졌다. 나랑 알고 지내? 이건 또 무슨 날콩 튀겨먹는 소리냐;;; 내가 너같은 놈을 언제 알고 지냈다는거냐? 아무리 내 17년 인생의 기억들을 뒤집어봐도 저런 녀석은 없었다. 난 저렇게 냉기흐르는 놈은 몰라... 거기다가 이런 곳에 다닐 정도면 나같은 처지가 아닌 이상에야 부르주아일텐데... 어쩐지 저 뒤에 있는 피어싱도 웬만큼 잘먹고 잘사는지 부티가 흐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만 가난뱅이라니... 이 얼마나 세상은 불공평한가! " 난 기억이...안 나는데?" 겨우 목구멍에서 소리를 끌어올려 움찔움찔 내뱉었다. 그러나 나는 곧 후회했다. 가뜩이나 차가운 놈의 인상이 내가 말한 뒤로는 이젠 아예 야차같이 변해있었다. " 저... 어디서 만났는지 가르쳐주지 않을래? 아무리 생각해도 너랑 만난 기억...크흑!!!!!!!" 그러나 나는 놈의 주먹에 복부를 강타당하고 고개를 수그렸다. 이...이새끼 진짜 장난아니다. 아까 다른놈들을 쓱싹 해치울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거였는데;; 보는 거랑 맞는 거랑은 이렇게나 차이가 나는구나. ...... 쓰불... 그나저나 왜 때리고 지랄이야! "...... 크흑........무슨짓이냐 너..." 이 씨부럴놈아! 그래도 도와주기까지 했는데 저 하나를 기억 못한다고 이렇게 사람을 인정사정없이 패기냐! 그러나 나의 원망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녀석은 정신없이 나를 휘몰아치면서 패고있었다. 퍽퍽!! 퍽!!!!!!!!!!!......... 얼마나 처맞았는지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너무 생소한 경험이라 어느새 내 몸은 놈의 무기같은 주먹에 의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웅크리고 있었다. 내가 다른 놈을 패본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남에게 얻어터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비리비리해 보이는 몸뚱이라도 깡따구가 있어서인지 쉽게 제압당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를 패고 있는 놈은 힘과 기술 그 어느 면에서도 뒤떨어짐이 없는 군더더기 없이 깨끗한 동작으로 최대의 데미지를 끌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급소는 슬쩍슬쩍 피하는게... 이 쓰벌놈이 아주 때.려. 죽이기로 작정했나보다. 하다못해 기절이라도 하면 당장은 쪽팔릴지 몰라도 어떻게 될듯도 싶은데.. 나도 참.. 정신력이 강한새끼라서 쉽사리 기절도 못하고 요지부동으로 구타를 당해야했다. 씨벌... 이래선 입학식은 참석 못할 것 같다. 안 봐도 뻔한 처참한 내 몰골......씹새끼. 싸이코아냐 이거! 먼저 아는척 해놓고 모르는 사람한테 성질부리는건 또 뭐냐고! 어느정도 팼는지 놈이 더 이상의 가격을 멈추고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래... 당하는 나도 고통스럽기 그지없는데 패는 너야 어련하시겠냐. 보아하니 정말 있는 힘껏 후려팬거 같은데... "... 너........왜... 갑자기 크윽....지랄이야..............." 그렇게나 얻어터지고도 내 주둥이는 말을 내뱉을 힘이 남았는지 띄엄띄엄 내뱉었다. 몸을 가누지 못할정도로 패놓고서... 놈은 아직도 분이 안풀린듯한 얼굴로 싸늘히 나를 노려보았다. "..... 정말 잊어버렸구나......너는.." 조소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하는 놈의 입매가 씁쓸히 일그러진건 내 착각이 아니었다... 어쩐지 그 입매를 보니 뭔가가 수면위로 떠오를 듯 하지만... 결코 생각나지 않는다. 싸이코 새끼...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같은 놈은 기억에 없는데 어쩌라는거야!!!!!!!!!!! " 너!!.........젠장..." 놈은 뭔가를 말하려다가 이내 욕을 내뱉고 뒤돌아섰다. 솔직히 더 패려는가 싶어 긴장하고 있다가 놈이 돌아서자 의외였다. 쓰벌놈... 그래도 나를 그렇게 다짜고짜 때린건... 그때 뒤에서 그놈의 구타현장을 관망하고 있던 피어싱이 다가오며 말했다. " 너도 학교다니긴 다 글렀군. 어쩌다가 저놈한테 찍혔냐. 다른놈이면 말도 안하겠는데 어떤 의미에서 보면 저새끼가 제일 질이 나쁜놈이거든. 차라리 우리한테 깨지는게 더 나았을텐데...... 너도 정말 운이 없는새끼다. 뭐.. 잘해봐라." 쓰벌.. 그것도 격려라고! 그나마 저놈까지 나를 잡겠다고 날뛰지 않아서 다행이다. 쓰러진 패거리들의 뒷수습을 하느라 바빠서 그런가... 그나저나 그 놈 정말 괴물아냐! 이놈들을 쓰러뜨리고 난 뒤에도 무슨 힘이 남아돌아서 나까지 이지경으로 만들어놓냐고! 피어싱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뭔가 잘못 걸려도 한참은 잘못걸렸다는 느낌... 그리고 앞으로 닥쳐올 내 불운에 대한 묘한 예감....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 되었을때의 허망함과 분노 비참함... 등....... 정말...........일이 이렇게 꼬이고 또 꼬이게 될줄이야.. 씹새끼... 언젠간 반드시 복수한다. 내가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라구. 어릴적부터 깡다구 하나만큼은 꽤 자신있었으니까. 나는 그놈에게 복수를 하리라 다짐을 하며 엉망진창으로 뭉그러진 내 몸뚱이를 일으켜 세웠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게 정말 어지간히 때리지 않고는 내 멧집을 생각해서라도 이럴 리 없었다. 이미 입학식이 시작했는지 내가 들어왔을 때는 장학금 수여를 하고 있었다. 슬그머니 내가 지정된 반배치표를 보고 끼어들려는 찰나에 믿을수 없게도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 유승하 학생은 단상 앞으로 나와주십시오. 장학금 수여가 있겠습니다." 제길!! 나이스 타이밍이군. 하필 이런 꼴일때!! 나는 나를 구타한 그놈을 생각하며 이를 닥닥갈았다. " 유승하 학생? 어서 나와주십시오!" 남의 속도 모르고 재촉하는 사회자 덕분에 가뜩이나 아픈 몸을 질질끌고 앞으로 나갔다. 아이들은 왠 거지꼴의 녀석이 앞으로 나가는게 신기했는지 힐끔거렸다. 겨우 앞의 단상으로 나가 교장의 앞에 서자 전교생이 나의 거지꼴을 쳐다본다는 생각에 울분이 일었다. 쓰벌! 누구 좋으라고 여기까지 나와서 이러는건지! 차라리 아까 모른척 무시하고 나서지 말걸.. 그러나 후회를 해도 때는 늦었으니.. 사회자와 교장도 나의 꼴을 보고 잠시 흠칫하더니 유승하 학생이 맞느냐고 물었다. 머리에 열이 솟으려는걸 억누르면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사회자의 어딘가 떨떠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 흠..흠 본교 학생은 이번 반배치 학력고사에서 전체 2등의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므로 이에 깊은 찬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앞으로도 우수한 능력과 뛰어난 재능을 갈고 닦아 ....." 뭔 놈의 장학금 수여에 이다지도 잡소리가 길단말인가! 그냥 너 이번에 성적 잘나왔으니까 공짜로 학교다니게 해줄게. 라고 간단히 말하면 될것을! "... 그러므로 유승하 학생에게는 3년간 학비면제의 장학금이 전달되겠습니다. 앞으로도 다른 학생들의 귀감이 되어 더욱 더 훌륭하고 성실한 이 나라의 일꾼으로 거듭나기를 당부하겠습니다. 이상. 경례!" ... 훌륭한 일꾼은 개뿔이.. 드디어 끝난건가. 하아! 정말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이나 짜증날 정도로 길고긴 장학금 수여시간이었다. 나는 얼른 교장인가 나발인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뒤 단상에서 후다닥 내려왔다. 그때만큼은 맞아서 고물같이 삐그덕 거리던 내몸도 어느정도 민첩성이 발휘된 순간이었다. 떨떠름한 기분으로 내가 지정된 반의 뒷줄로 옮겨가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이어졌다. 몇몇 여자애들은 벌써 쑤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입학 첫날이라 외모에 어느 정도 신경쓰고 나왔는데... 지금 와서야 이딴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던가!! 거기다가 앞으로 미우나 고우나 서로 부대끼며 지내게 될 클래스 메이트들의 눈빛이 저다지도 싸늘하다니. 첫날부터 뭐든게 다 엉망이다. 그러고 보니 그놈도 같은 1학년 이었던 것 같은데.. 다시 한번 만나면 그때는 정말 조져버리겠다! 아까야 정신이 없어서 속수무책으로 당했다지만 이번엔 얄짤없어! 하아.. 그러나 이게 무슨 변고고 악운이란 말인가.. 대체 전생에 무슨 불구 대천지 원수를 지었길래 이다지도 하늘은 나에게 박복한 악연을 맺어주신거란 말이냐...!! 그놈을 찾아 조지기 전에 알아서 내 앞에 납시셨으니... 주위를 둘러보니 그놈을 알기라도 하는 듯 아이들은 이미 알아서 구석에 처박혀 이쪽을 간간히 흘끔거릴 뿐이었다. 쪽바리들이나 앞에서 굽신하고 뒤에서 호박씨를 까는줄 알았거늘.. 어찌 열혈 한국인들이 이다지도 몸을 사린단 말이던가.. 이미 나를 도와줄 인간은 한명도 없는 듯 싶었다. 하긴... 내가 봐도 저 차갑고 냉기 풀풀날리는 야차같은 놈에게 생판 모르고 지냈던 클래스 메이트를 위해 덤벼들긴 힘들겠군... 쩝;; 다시 만나면 조져 놓으리라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건마는! 어째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녀석 앞에서는 한없이 쫄아드는건지..;; 알 수 없었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나보다 덩치 좀 크고 인상 드럽고 싸움기술만 다 좋으면 다냐? 엉!? 솔직히 말하자면 다지... 암.. 그렇고 말고...;; 저 녀석에게 얻어 맞을때 전교 2등인지 나발인지 하는 내 성적이 도움이 된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나의 놀라울 정도로 뽀예지는 빨래 테크닉! 한치의 오차도 없는 신의 바느질! 싸구려 재료로 둘이 먹다 죽을정도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기막힌 요리솜씨!! .. 등등의 신변잡기가 도움이 된건 더더욱 아니지 않은가? 원래 살아가는데는 이런 구질구질 한것들을 익힌 나보다도 카리스마 있는 저 놈이 더 유리한 법이지. 암! 한번만 목소리깔고 인상을 찡그리기만 해도 돈이 알아서 제꺼덕 모일 놈이다 저 놈은.. 어쩌겄냐. 날 때부터 고상하게 생기신 이 잘난 외모를 탓하는 수밖에......하아.... 더군다나 이미 놈에게 제대로 반항조차 못하고 왕창 깨진 전적이 있는 나에게는 이 모든게 무심할 뿐이다. 그저 저 미친놈이 나를 몰라보고 알아서 꺼져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러나 그마저도 어림없는 소리였다. 척보고 내 이름까지 알아맞춘 놈인데! 어디서 저딴 스토커를 하나 달게되었는지. 내쪽에서 기억을 못한다 하더라도 저 놈은 똑똑히 기억하는게 문제지. 젠장... "... 유승하?" 씨벌!!!!! 이럴줄 알았어. 절대 못 알아볼 리가 없지. 놈은 오싹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반 아이들은 구석탱이에서 이쪽을 흘끔거리다가 놈의 목소리를 듣고는 지들 나름대로 놀란 모양이었다. 아까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좀전보다 술렁거리는 것이... 나중에 한번 뭔지 알아봐야겠다. 그전에 이 쓰벌놈에게서 얼른 떨어지는게 좋겠지? 나는 다가오는 놈을 향해 씩하니 웃었다. 놈은 나의 미소를 보더니 잠시 불안한 기색을 띄었다. 나는 놈을 향해 천천히 입을 떼었다. " 당장 내 앞에서 꺼.지.지. 않으면 그 잘난 얼굴을 뭉.개.주.지." 놈은 잠시 흠칫하더니 매우 열받은 표정으로 나에게 주먹을 날렸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훗. 어쩔수 없군. 왠간해서 고등학교에서는 조용히 지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되겠군. 너의 우둔한 머리를 원망해라." 순간 나의 주먹에는 믿을 수 없을만큼의 놀라운 파워가 실리면서 놈을 향해 날아갔다. 놈이 날린 주먹을 이미 멋지게 피한 나는 고대로 놈에게 손을 뻗혔으므로 놈은 피하지 못하고 놀란 듯이 쳐다보았다. 곧 나의 주먹은 놈의 냉엄한 면상에 꽂혔다. 그러자 놈의 몸이 붕 뜨면서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놈의 눈을 바라보며 훗 하니 비웃음을 날려줄 리가 없지 않은가... 이런 제길. 그렇게만 되면 좀이나 좋으련만... 크으... 안타깝게도 현실은 나를 무참히 짓밟고 있었다. 나의 상상과는 반대로 놈의 주먹에 꽂혀 바닥에 엎어진건 다름아닌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눈앞이 하예졌다. " 이런.. 너무 반가워서 내손이 멋대로 나갔군.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쓰러지면 내쪽이 곤란하잖아? 안 그래? 유.승.하?" 쓰벌! 어떤놈이 반가운 사람에게 주먹을 꽂는다냐! 놈의 명백한 조롱어린 말을 들으며 신음을 집어삼켰다. " 내가... 누군지 알고 반갑다고 하는거냐.. 이 개새꺄!!!!!!!!!!!!" 드디어 열이 오를대로 오른 나는 울컥 놈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갑자기 교실 분위기가 싸하게 얼어붙었다. 그것이 좀전만해도 쑤군거리던 아이들이 갑자기 일시에 조용해진 것이었다. 가뜩이나 놈과의 대면으로 긴장해서 펌프질해대고 있는 내 심장에는 더욱 더 부담이 되었다. 쓰벌... 왜 갑자기 이 모양이야? 놈은 그나마 빈정거리던 입도 꾹 다물고 야차같던 면상을 더더욱 굳히며 아예 에어리언으로 변태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노약자나 임산부들이 보면 심장마비로 얄짤없이 황천길 갈만한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어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말이 필요없다는 듯이 다가온 놈은 전에 맞아 삐거덕거리는 나의 몸에 여지없이 구타로 대응하고있었다. 눈물이 나올정도로 아팠다. 내 평생에 다 맞아볼만한 양의 엄청난 구타를 놈이 쏟아 붓고 있었다. 놈은 그렇게 한참동안 나를 패더니 종이 울리자 그제야 그만두었다. 그래...그래... 너같은 놈이라도 선생님들 눈치는 보고 사는구나. 씹... 종이 울리고 나서 들어온 담임은 바닥에 처참히 널부러져 있는 나의 꼴을 보다가 놀랐는지 다가왔다. " 어? 이 녀석 왜 이렇게 있는거냐? 야, 괜찮냐?" 그래도 모르는척 대충 넘어가는 썩어빠진 선생은 아니었는지 직접 다가와서 몸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첫날부터 이런 꼴의 모습인 내가 어의도 없게 느껴졌겠지만 나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 아...무것도 아닙니다. 선생님." 방금 놈에게 얻어맞은 상처가 욱씬거리긴 했지만 참을만 했다. 아니, 참아야 했다. 첫날부터 얻어터지고 비실거리는건 내 자존심이 용납못한다! 사내새끼로 태어나서 비록 얻어 터질지언정 결코 뜻을 굽히진 않으리!!! " 흐음.. 그러고 보니 넌 오늘 장학금 수여식때 올라왔던 녀석아니냐?" 담임의 질문에 내가 멋쩍게 웃으며 그렇노라고 대답했다. 그제야 아이들도 모르는척 하다가 이쪽으로 눈길을 보내왔다. 워낙 상황이 특별했던지라 기억하고 있었나보다. " 어떻게 된건진 모르겠지만 많이 힘들면 양호실에 가라." 그러면서 손을 내밀어 나를 일으켜 세웠다. 담임은 새로 들어온 교생과도 같이 풋풋한 20대 중반의 청년같았다. 평범하지만 어딘지 날카로운 구석이 숨어있는 외모에다가 나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장신이었다. 역시 부자학교라서 그런지 선생들도 잘먹어서 때깔나는 외모로구나. 속으로 감탄을 하며 내 자리로 향했다. 그래봤자 아이들이 다 차지하고 남은 자리는...빌어먹게도 놈의 옆자리였다. 놈이 풀풀 날려대는 위험한 냉기를 보통의 부잣집 도련님이나 아가씨들은 견뎌낼 수 없었나보다. 방금 처 맞았는데 또 다시 놈의 옆에 앉아야 하다니. 차라리 호랑이 아가리에 내 대가리를 자진반납하고야 말지. 나는 한없이 우울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야했다. 놈은 내가 앉았는데도 고개하나 까딱하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담임은 한순간 놈과 내쪽을 힐끔하더니 미소를 지었다. " 자자. 오늘부터 내가 너희들을 가르칠 담임이다. 담당은 사회고 나이는 27살 독신이다. 관심있으면 알아서 대쉬하도록." 마지막 말에 여자애들은 환호하고 사내놈들은 야유를 보냈다. 그러나 깔끔하게 미소로 마무리한 담임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 아.. 그리고 내 이름은..." 한순간 놈을 흘끗한 것 같았는데.... " 계정원이다. 기억해둘 사람은 기억해도 좋아. 이상으로 내 소개를 마치고 이것 말고 궁금한게 있는 사람은 물어봐도 좋다." 짧고 간결하게 끊어지는 말에 아이들은 뭔가 쭈뼛쭈뼛하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어째.. 분위기가 이상한데? 그러면서 한번씩 담임과 내 옆에 있는 놈의 얼굴을 두리번 거리는 것이었다. 음.. 계씨라... 좀 특이한 성이긴 하지. 가만.. 계씨라? 특이하긴 하지만 어딘지 익숙한데... " 이 이상 질문은 없나?" 아이들의 처음과는 달리 태도가 우물쭈물 이상하게 변해버린 시점에서 담임은 한번 더 물었다. 그러더니 피식 하고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하필이면 내쪽.. 정확히 말하자면 놈을 향하는 것이라서 놀랐다. " 한가지 더 말하자면 저기 앉아있는 계세야하고는 사촌지간이지. 미리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서 말해두마." 순간 아이들의 시선이 경악으로 물들면서 담임과 놈을 이제는 대놓고 동시에 쳐다봤다. 하지만 나는... " 푸후!!!!! 크읍....푸..하하하 푸하하하!!!!!!" 세상에... 이름이 계세야래! 우헤헤헤헤.... 계세야......계세야....개새야.....풉...푸...푸하하하하하!!!!!!!!!!!!! 그 때 나는 방금 까지만해도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특이한 녀석의 이름에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마음껏 박장대소했다. 방금 전에 나를 팬 녀석이 누구였는지는 머릿속에서 이미 훌훌 날아가버린 뒤였다. 담임도 약간 놀란 듯이 내쪽을 쳐다봤고 이제 아이들은 더 이상 놈과 담임과의 관계에 대해서 의문을 갖지는 않는 듯 했다. 다만 내쪽을 못볼 것 보는듯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뿐이지. 쾅!!!!!!!!!!!!!!! " 푸...푸..읍... 히끅.....!!" 나는 순간 웃다가 갑작스레 들려오는 굉음에 놀라서 옆을 쳐다보았다. 아차!!!!! 그제야 나는 나의 실수를 깨닫으며 두려운 눈길로 놈을 쳐다봤다. 놈은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살기를 내뿜으며 책상을 내리친 그 자세 그대로 고정하고 있었다. 아아.. 난 죽었다. 제길;; 이 놈이 어떤놈인데;;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 얻어맞은 놈들과 내가 얻어맞게된 배경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존재했다. 개새끼라는 욕이 섞여 있었다는 점. 그게 어떤 형태로 변이가 되었든... 입속에서 튀어나간 이상 저놈에게 얻어맞는 대참사가 일어났었지. 이건...... 거의 콤플렉스를 뛰어 넘어 노이로제 수준이다!!!!! 슬금슬금 신변의 위험을 감지하고 조금씩 옆으로 떨어지는데 놈이 죽일듯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공포영화의 잔인한 장면보다 지금 저 놈의 표정이 더 무서웠다고 기필코 단언할 수 있다. " 이런... 자! 모두 진정하고.. 세야 너도 바로 앉도록 해라." 결국 이대로는 절대 끝날 것 같지 않던 대치 상태가 담임의 한마디로 무마되었다. 놈은 마지막으로 한번 더 나를 노려보고는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향했다. 지금 이순간이야 저렇듯 순순히 나오지만 끝나고 난후에는......놈이 어떤 보복을 가해올지 알수가 없어 참담해졌다. " 방금 말했다시피 세야와 나는 사촌지간이다. 그렇다고 모두 오해는 말도록. 사촌이라고 해서 차별을 두지는 않을거니까. 더 이상 질문도 없으므로 모두 마친다. 세야 너는 잠깐 나 좀 보자." 담임이 나가자 놈이 일어나더니 뒤따라 나갔다. 나갈 때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나를 한번 노려본 후에 거칠게 문을 닫고 사라졌다. 아이들은 놈이 나가자마자 왁자지껄 소란스러워 졌다. 여자애들은 뭐라뭐라 빽빽거렸고 사내놈들은 나를 보며 두려움인지 동정인지 알 수 없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 얘. 네가 그 전교 2등했다던 그 애 맞지?" 어디서 머리를 살짝 파마한듯한 여자애가 다가와서 물었다. 의외로 쳐다보기만 하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직접적으로 나서서 말을 거는 대담성을 지닌 듯 했다. " 아니...나는 별로......" 그다지 예쁘게 생기진 않았지만 꾸미는 걸 좋아하는 건지 이곳저곳 화려하게 치장한 여자애를 보며 뭐라고 해야할지 난감해졌다. " 빼지마. 네가 그런 꼴로 단상위에 올라왔을 때부터 전교생이 다 기억했을 테니까." 묘하게 상대를 깎아내리는 듯한 어감의 말이었다. 하지만... 이 아이의 말이 옳았다. 이 거지꼴로 단상위에 올라갔을 때부터 내 얼굴은 일파만파 퍼져버린게 틀림없었다. 담임도 첫눈에 알아보지 않았던가. 놈에게 얻어터지고 비참한 몰골로 장학금을 타던 그때부터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다고 해야하나. " 그런데 정말 신기하다. 어떻게 너같은 애가 세야의 신경을 건드린거지? 주변에서 무슨일이 일어나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걸로 엄청 유명한 애를. 너 도대체 뭘 어떻게 한거니? 난 세야가 먼저 시비거는 모습은 본적도 없어. 뭐든지 다 무관심으로 일관했는데." 이제는 따지듯이 물어오는 여자애에게 나는 난감함을 넘어 짜증이 일었다. 제길...... 누가 할 소린데. 나도 궁금하다고! 그놈이 왜 나를 못잡아 먹어서 안달인지. 이 여자애의 말이 옳다면 나에게도 놈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어야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그놈을 도와준 일밖에 없었다. 도와주는 것도 죄냐!! ＂그만해. 주아야. 세야도 잠깐 저 우스운 꼬라지에 관심을 가졌던 거겠지. 말이야 바로하자면 저런 지저분한 옷차림에 누가 좋아하겠어? 시비 걸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거야." " 그치만 희정아..." " 내말이 말같지도 않은거니? 그쯤해둬. 저런 찌질이랑 어울리면 품위만 손상된다구." 어디서 냉랭하기 짝이 없는 앙칼진 여자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놓고 사람을 깎아내리는 말과 더불어 듣기 거북하게 찢어지듯 날카로운 음성의 소유자였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에는 검고 찰랑이는 긴머리를 빼고는 별로 볼 것도 없는 여자아이였다. 하지만 끝없이 오만해보이는 눈동자가 독특하다면 나름대로 독특하다고 할 수 있었다. 헤에.. 보통 악역은 미인들이 맡지 않나? 내심 실망하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젓자 그녀가 발끈했다. " 뭐야? 너. 그 표정은. 내말에 불만이라도 있는거야? 씨발.. 이젠 별게다 사람 우습게 여기네? 아우! 짜증나. 저런 애가 왜 세야 옆에 앉은거야." 크으... 입까지 험한 여자다. 거기다가 눈꼬리를 올리며 노려보는게 장난아니다. 놈에 이어서 이젠 이런 여우같은 년들까지 상대해야 한단말인가. 보아하니 그 세야라는 놈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좋아하면 댁이 옆에 앉지 그래? 자리가 비어 있었을때는 눈치만 슬금슬금 보면서 앉을 용기도 없었던 주제에... 한심해서 말이 다 안나오는군. 여자에 대한 환상이 조금씩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모든 여자애들이 저런건 아닐텐데.. 세상에는 정말 빌어먹게도 만화나 드라마에만 등장할 것 같은 나쁜 인간들이 꼭 하나씩은 있다. 정말 빌어먹게도 결코 tv나 책에서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이 여자든 남자든 '나쁜'이들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약해보이는 상대를 두고 자신들이 더 우월한 위치있다고 믿으며 상대방에게 발톱을 내세운다. 그리고 내 생각이 99% 맞겠지만 아무래도 그 대상은 나로 정해진 것 같다. 드르륵.... 교실문이 열리면서 놈이 들어왔다. 무표정의 대가로 유명했다던 여자아이의 말이 맞는 듯이 녀석은 무심한 표정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다만 그 녀석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을땐 놈에게서 즉각적으로 표정이 나타났다. 저 표정은.. 분명히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녀석들을 볼때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앞에 있던 여자애도 움찔해서 얼른 잽싸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 얄밉고 짜증나는 말만 골라서 내뱉던 긴머리의 여자애도 얼른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웠다. 저런 주제에...... 다른 사람이 다가갔다는 이유만으로 화풀이하는 나약한 심성이라니.. 쯧..... 여자애를 속으로 욕하긴 했지만 나도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니다. 아니 이 반에서 내가 제일 안 좋은 상황이다. 놈이 씹어버릴 듯 이글거리는 눈초리로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으니.... 그 뒤로는 거의 구타와 따돌림의 연속이었다. 놈은 가끔씩 빈정거리긴 했지만 주로 구타를 하는 편이었고 반 아이들은 뒷구멍에서 욕을하며 나를 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대놓고 경멸한다던지 욕을하는 등의 과격한 행태로 변해갔다. 고등학교로 들어온 내내 지옥같은 하루였다. 솔직히 무시해 버리려고 해도 신경쓰이는게 타인이 나에게 던지는 시선인지라...고통스럽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덕분에 1년 사이에 말을 걸 친구가 없었으므로 나의 말수는 눈에 띄게 팍 줄어들어 버렸고 처음에는 대항하며 맞서 싸운 놈의 구타도 끝으로 갈수록 체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놈이 내가 부업을 하는 도중에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것마저 못하게 나를 괴롭혔으면 나는 벌써 미치거나 아니면 무리해서라도 3 년 장학금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전학을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빌어먹을이지. 이 잘난 내가 왜 이런 시련 따위를 겪어야 하는거냐! 제길...... 이런 나의 소문은 전교에 쫘악 퍼졌고 2학년이 되면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어 행복한 스쿨라이프에 다시 도전한다는 생각은 놈이 나와 같은 반으로 배정되었을 때부터 이미 산산조각으로 판토나 버렸다. 그리고 그 시끄러운 여자애들도 고스란히 같은반으로 배정되어 나의 고충은 끝날 길이 없었다. 거기다가 무슨 인연인지 1학년 담임이 고대로 내 2학년 담임을 맡게 된건...... 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여기까지 누군가가 뒤에서 짜고 논다해도 이렇게 까지는 아닐터였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완벽한 우연이라는 걸 알았을 때의 내 심정은 어떠했나. 놈이 이과에 들어간다는 소문에 일부로 문과까지 택했거늘... 나의 예상을 가뱝~게 뒤엎어 버리고 놈은 문과를 택했다. 나를 뒤쫒아 일부러 끝까지 괴롭히기 위해 들어온 것이 아닐까 의심도 해봤지만 진로설정 프린트가 반을 한바퀴 돌면서 놈이 선택한 학과를 보고나니 또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놈이 선택한 학과는 경영학과였다. 사업을 한다고 했으니 가업을 물려받기 위해서는 당연한 거라고 해야하나... 비록 그쪽과는 인연이 없는 나였지만 그래도 다니는 곳이 빌어먹을 부르주아 학교라서 생각이 그런쪽으로 안 틜래야 틜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이 사실이기도 했고. 괜히 나만 헛소문에 피박을 쓴 거였다. 나야.. 뭐... 문과든 이과든 별 상관은 없었지만...제길...... 거기다가 요새는 대학등록금도 마련하고자 학교에서는 부업을 하고 저녁에는 아르바이트를 밤새 뛰었더니 몸이 견뎌나질 못하는건지 공부에도 소홀히 하게 되어 성적도 퍽퍽 깎여나갔다. 요새는 부업하며 수업을 듣는 노하우를 쌓았지만 집중해서 듣는 거와는 천지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거기다가 남들은 고명하신 선생들에게 개인지도를 받아 학업에 열중하는 부잣집 학생들이지만 내가 무슨 재주로 학원이나 과외같은 것을 받아보겠나. 다아.. 그림의 떡일뿐이니. 그나마 수업도 제대로 안 듣고 이 성적을 유지하는 내가 용하다. 용해. 훗! 워낙 머리가 뛰어나야 말이지. 빌어먹을.. 머리가 뛰어나면 뭐하나. 사람들은 나의 이 뛰어난 두뇌를 알아주지도 않거늘! 아아.. 정말 안타깝고 서글픈 일이로다. 놈은 나를 구타하는 것을 빼고는 모범생의 표본과도 같은 녀석이었다. 수업시간에는 몰래몰래 부업에 열올리는 나와는 달리 집중해서 선생들의 말을 들었고 예습 복습도 철저히 하는 녀석이었다. 한가지 이상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의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나보다 더 성적이 안좋은 것이었다. 47 명의 반아이들에 비해 놈의 성적은 41등... 정말 이해가 안가는 등수였다. 과외에 학원까지 겹쳐서 다니는 아이들은 보통 학교 수업시간에는 밤새워 공부한 대신 부족한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졸기 일쑤였다. 하지만 놈은 그것도 아니었다. 정말 보는 사람이 감탄할 정도로 꼼꼼히 성의있게 수업을 들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명문고라서 선생들의 수업도 수준급인 이 학교에서 저정도만 집중해도 왠만한 시험문제들은 다 맞을 수 있을텐데...... 정녕 저 놈은 머리가 따라주지 않는군... 신은 공평하게도 부르주아에다가 띠겁지만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상판떼기를 물려준 대신 뇌는 무쇠방망이로 만들으셨나 보다. 암! 그래야 하구 말구. 안그러면 배 아파서 어떻게 살아? 그나마 머리라도 안좋아야 나같은 녀석들도 위안을 얻고 사는거지. 헤헤헤.. 그런데 내가 녀석의 성적을 어떻게 아냐구? 모를래야 보이는데 어떻게 모를수 있나... 난 재수가 엿을 덕지덕지 쳐발라도 이정도는 아닐정도로 인생이 꼬이고 꼬여서 고등학교 근 1년하고도 4개월 내내.. 놈과 같은 반을 배정받은 데다가 계속 놈의 옆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고의든 타의든 결코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서 그런지 더욱 서글프고 열받는다. 돌려줘! 내 꿈같은 학창시절! 뉴프렌드! 장밋빛 스쿨라이프!!!!! 컴백!!!! ........................... 이렇게 외쳐봐야 돌아오는건 빈 메아리일뿐....그저 어여 졸업해서 이놈얼굴을 안보고 살 수는 없는건지......후우...... " 너희들 모두 잘들어. 이번 달에 일본의 훗카이도로 수학여행 가기로 한건 모두 잘 알고 있지?" 아침조례로 들른 담임이 주위를 훓어보며 말했다. 빌어먹을. 이놈의 학교는 엔간치도 부르주아라서 수학여행도 제주도나 설악산 또는 경주 같이 평범한 곳으로는 절대 안간다. 썪을 것들이 돈만 넘쳐 나는 건지 나같은 서민들은 전혀 배려하지도 않은 해외로 수학여행 일정을 잡은 것이다. 비용만 해도 얼만데. 거기다가 일본은 우리나라 물가의 10배라고! 똑같은 물건을 두고도 값은 배로 더 내야할 판에 뭐가 좋아서 그곳으로 일정을 잡은건지! 거기다가 더욱 가관인 것은 아이들 표정이 시큰둥 하다는 것이었다. 아아.. 이 학교의 학생들 90%가 부잣집 자제들이니 어련히들 알아서 다녀왔을라구. 결코 이번 수학여행에 참여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래도 입안이 썼다. 아니 오히려 빠지는게 나을지도 몰랐다. 괜히 나같은 서민이 끼어들면 물만 흐리는 결과가 될 수 있었으니. 자격지심이라고 해도 어쩔수 없다. 현실이 그런걸. 다만 맹목적인 자격지심은 아니었다. 단지 이건 경제사정에만 한하는 것이다.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관심 끄고 부업에 다시 열중했다. 오늘 아침에 맞은 부위가 욱씬욱씬 했지만 한두번도 아닌데 뭐... " 아! 그리고 이번에 승하 말고 일정에서 빠지는 사람이 한명 더 늘었다. 세야 역시 집안 사정상 못가게 되었다." 그 집안 사정이라는게 뭔지 모르지만 우리집과 동류의 사정은 아닐테고...... 어느새 교실 안은 술렁거렸다. 그도 그럴것이 겉으론 안 나타나도 자연스레 놈이 반의 실세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수학여행에서 빠진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거기다가 나를 구타하는 집요하고(말그대로 집요하다.. 1년동안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나를 구타하고 있으니) 잔인한 행동때문에 감히 놈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는 아이도 없었다. 덕분에 나는 놈과 짝이라는 명분으로 아이들의 놀라운 눈초리를 싸그리 들이받아야 했다. 쓰불..쓰불....이놈은 가만히만 있어도 존재감이 철철 흘러넘쳐서 주위까지 피해주는 녀석이지. 떠그럴... 이런 놈한테 찍힌 나도 별 볼일 없는 놈인가보다. 최대한 빨리 졸업하길 바라고 있다.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야한다. " 두 명 이외는 모두 일정대로 간다. 안내문은 수학여행 전날에 나눠줄거고 나머지는 사전에 지시한 대로만 따라주면 된다. 뭐.. 너희들이 알아서 하리라 믿는다. 이상으로 모두 마친다. 반장 인사해." 짧게 요건만 말하는 담임에게 반장인 아이가 일어나 인사하자 그는 몸을 돌려 나갔다. 나갈 때 잠시 이쪽으로 시선을 보내는걸 잊지 않고. 뭣 때문인지는 몰라도 담임은 늘 감시라도 하듯이 놈을 슬쩍슬쩍 쳐다봤다. 그러는 도중에 나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의미 불분명한 미소를 짓기도 했고... 처음에야 의아했지만 한두번이 아닌지라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넘어간다. 다음 시간은 고리타분한 시민윤리시간 이었다. 늙은 여자선생님 이었는데 격식을 엄청 따지는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웬만큼 선생들에게 반항한다고 소문난 아이들도 그녀의 시간에는 그나마 교과서라도 꺼내놓고 있었다. 처음에야 교과서는커녕 가방도 안가지고 다니던 그들이었지만 그녀의 훈계(훈계라고 하지만 지독한 잔소리)에 질려 다른 시간이면 몰라도 꼭 그 시간에는 책이라도 보는 시늉을 하게 된 것이었다. 딱히 성격이 까다롭거나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격식을 매우 중요시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학생과 제자사이의 예의를 엄격히 따지는 분이었다. 조회가 끝나고 종이 치기 까지만 해도 나는 부업에 열중하느라 그녀가 들어오는 줄도 몰랐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후에야 나는 시민윤리시간이라는 걸 깨닫고 가방에서 시민윤리교과서를 꺼내들었다. 실상은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무겁게 책들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다니는 것이 아닌 사물함이나 책상서랍에 넣어놓고 사뿐사뿐 학교에 다니기를 원했지만 그랬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 경험은 이미 1학년때 사무치도록 당했었기 때문에 더욱 더 조심성이 많아질 따름이었다. 책을 꺼내들다가 우연히 놈을 봤다. 사실 안보려고 해도 짝이라는 위치에 있는 이상 하루종일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지 않는 한 어쩔수 없이 보게 되어있었다. 놈은 왠일로 나를 팰 때의 표정을 제외하고는 늘 상 고집하는 무표정이 아니라 어딘지 약간 불쾌한 듯이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미미한 변화였지만 나는 가까이 있는 이상 알아챌 수 있었다. 이상하게 놈의 표정이 내눈에 읽히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가 더 궁금했다. " 교과서 36페이지를 펴세요." 시민윤리선생의 말에 아이들이 교과서 넘기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렸다. 나 역시 교과서를 피기 위해 손을 움직였는데 이상하게도 놈에게선 움직임이 없었다. 이 녀석 미리 알고 교과서를 펴둔건가? 의아한 눈초리로 흘끔 옆을 쳐다보고 나는 경악했다. 놈의 책상엔 필기도구와 노트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았다. 마땅히 있어야할 한 가지가 빠진 것이었다. 나는 고민했다. 어차피 시민윤리선생 몰래 부업을 실행할 작정이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선생들은 거의 나를 포기한 눈치였다. 그것은 아무리 악명이 높은 시민윤리선생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딱히 이 교과서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놈은 필요한 것 같다. 뭐니뭐니 해도 저놈은 교과서와 수업만큼은 칼같이 챙기는 놈이었으니. 하지만 매일 나를 구타하는 녀석에게 이제와서 같이보자~ 할만큼 곰살맞게 굴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녀석도 아니었다. 나는. 하지만 그냥 방치해 두자니 짝이라는 미묘한 위치가 마음에 걸리고.. 제길! 도대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하는 건지... 한참을 놈과 나의 미묘한 관계와 위치,상황 등에 대해서 신중히 생각해본 결과 대답은 알 수 없다였다. 다만 지금의 내위치는 평소야 어쨌건 놈의 클레스메이트 였다. 이를테면 책을 같이 볼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었다. 나는 보이지 않게 한숨을 쉬며 혹여라도 거부당하진 않을까 근근히 마음을 졸이며 놈의 책상쪽으로 책을 밀어넣었다. 놈은 놀란 듯 이쪽을 쳐다봤지만 나는 모른 척 부업거리를 꺼내들었다. 이새꺄.. 그만쳐다봐. 설마하니 맨날 쥐어 패는 놈이라고 해서 내가 그거가지고 쪼잔하게 책하나 같이 안보겠냐. 어차피 나에겐 필요 없는 것이라 넘겨준 것 뿐이야. 사람 무안하게 쓰리... 계속 쳐다볼건 또 뭐야;;;; 의외로 놈은 순순히 나의 교과서를 봤다. 처음에야 계속 놈이 신경이 쓰여 잘 안되던 목걸이 만들기도 어느새 주변환경을 잊을만큼 몰입하게 되어 놈에 대한 생각도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집중해서 부업을 하면서도 오늘의 반찬거리를 생각하니 눈물이 눈앞을 가렸다. 프롤레타리아의 위대한 선두주자!! 유.승.하. 집안사정 어려운건 두말할 것도 없고 부모님도 안계신 소년가장이다. 하지만 뛰어난 머리와 잠재된 여러가지 능력! 뛰어난 외모!(물론 이 학교 학생들은 잘 모르는 것 같지만...) 비단결 같은 마음씨!(나름대로..) 흐음.. 이정도면 내가 생각해도 꽤 괜찮은 녀석인데.. 쩝...... 큐빅들을 후딱후딱 꿰던 나는 종이 울리는 소리가 나고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툭! 옆쪽에서 들려오는 무언가를 던지는 소리에 흘끗 쳐다보다가 그제서야 놈이 있었다는걸 깨닫았다. 계세야... 녀석은 내 교과서를 책상위에 던져 놓은 뒤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 놈이 잠을 잘때는 반 분위기가 고요했으므로(전에 자고있던 놈의 주위에서 떠들던 아이들은 모두 녀석의 날이선 눈빛으로 단번에 제압당했다.) 나도 신경끄고 다시 다음에 만들 목걸이 목록을 생각하며 낚싯줄을 끊었다. 솔직히 녀석에게 책을 빌려줘서 고마웠다는 감사의 인사 따위를 기대한것도 아니었고 나름대로 내가 불편한 마음에 베풀은 호의였기 때문에 그런 것에 집착할 생각따윈 없었다. 터덜....터덜........ 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썰렁하다. 곁에 누군가가 있어 대화를 나누며 가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쓸쓸하기도 했다. 누가 뭐래도 나 역시 인간이니까 이런 감정을 느끼는게 당연한거겠지. 그래도 중학교 때에는 형식이랑 두원이 자식들과 함께 돌아오곤 했는데... 학교가 갈린 뒤로는 연락도 뜸해졌다. 녀석들 나름대로 명문고에(...부르주아들의 지랄스러운 학교) 들어간 나에 대해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는건지 전처럼 편한 관계는 지속될 수 없었다. " 씨발! 이 개새끼!!!! 네가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 좋은 말할 때 알아서 꺼져. 그쪽이랑은 볼일 없으니까." " 뭐? 이 개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누구를 호구로 아나!?" " 뭐 눈에는 뭐만 보이는 법이지. 다시 한번 말한다. 꺼져." 갑작스레 골목길을 지나려던 내 귀에 상당히 건전한 대화내용이 들려오면서 내 발걸음도 뚝하니 멈췄다. 둘 다 내 나이또래의 목소리인 것 같은데 이 동네에 저런 목소리는 처음 듣는다. 그래도 서울로 상경해서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곳이다. 외부인과 내부인의 목소리 정도는 우습지 않게 구별해낼 수 있다. 내가 이 동네 모든 땅의 주인이 아닌이상 외부인이니 내부인이니 하고 가릴 처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가 사는 곳에 대한 애착은 있었다. 고로 뭣해도 먼저 사는놈의 텃세가 있는거지.. 무슨 일인진 몰라도 얼른 내쫒는게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집과 얼마 떨어지지 이곳에서 저놈들이 소란을 피우면 그 소리가 다 들리므로 내 정신건강에도 별로 좋지 않다. 그대로 골목길 안으로 녀석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조심 들어가보니 역시나 묘한 대치상태의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녀석은 덩치도 크고 인상도 험악하게 생긴데 비해서 그 앞에 있는 녀석은 왠지 호리호리 하니 절대로 강해보일 것 같지는 않았다. 피부도 하얀게 몇 대 치면 그대로 뻗을 것 같은 이미지이다. 나는 그대로 비좁은 골목길 사이로 우뚝 솟아있는 전봇대 뒤에 몸을 숨기며 두 녀석을 지켜보았다. 이대로 나가자니 왠지 껄끄럽고... 무엇보다 나는 저 두 녀석과는 생판 모르는 남에다가 제 3자인 것이다. 대충 상황이나 봐두고 싸움이 격해지면 그때 나서서 뜯어말려도 될 듯 싶었다. 뭐니뭐니 해도 저 두놈이 조용히 싸워준다면 내가 애초에 이곳에 왔을일도 없었을테니 제3자의 관여가 그다지 불공평한 것도 아니겠지. 저 호리호리한 놈이 덩치에게 얻어터지면 잽싸게 끌고 나와야겠다. 그럭저럭 생각을 마친 나는 계속되는 두놈의 공방전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 네 새끼가 우리 애들 건드렸다며? 그런데 내가 지금 고이 너를 보내줄 것 같으냐? 너 성문의 이상열 몰라? 엉!? 어따대고 좆만한게 깝치고 지랄이야!" " 이상열인지 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왜 지나가려는 사람 붙잡고 행패지? 그냥 알아서 눈치껏 꺼지면 좀 덧나나? 꼴에 대가리라고 설치는구만. 쓰레기가..." " 뭐!? 이 씹새끼가!!!!!!" 하얀놈의 비웃음과 동시에 덩치의 주먹이 날아갔다.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하던 덩치가 드디어 이성을 잃고 주먹을 날린 것 같았다. 원래 짐작대로라면 저 덩치는 갖은 화려한 욕빨로 앞의 흰놈을 겁을 준뒤 천천히 뭉개려고 마음 먹었던 듯 싶었다. 일이야 어쨌건 이 나라에서는 목소리 큰놈이 장땡이요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나도 그말에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다. 여러모로 힘없는 놈들은 깨져야하는 슬픈 현실이지만....... 나는 덩치의 주먹에 나가떨어지는 흰놈의 모습을 그리며 잽싸게 튀어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전봇대 뒤에서 나가려고 대기하던 몸의 움직임을 멈춰야했다. 예상외로 흰놈이 덩치의 주먹을 피하고 킥을 날렸던 것이다. 그것도 빠르고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으로! 덩치는 당황한듯 싶더니 다시금 욕설을 퍼부으며 흰놈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흰놈은 덤벼드는 덩치를 가볍게 피하며 오히려 역으로 공격이 빗나가 아래로 무게가 쏠린 듯한 덩치의 복부에 매우 강력해 보이는 주먹을 날렸다. " 크헉!! 이...이런...........개........새끼가..........." 매우 괴로운 듯한 표정으로 침까지 줄줄 흘리는 덩치가 그래도 자존심이 남아있었는지 욕을 했다. 흰놈은 매우 기분이 상했다는 표정으로 그 덩치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원래대로라면 저 흰놈이 나가떨어지면 내가 얼른 끌고나올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상황이 바뀐 듯 싶었다. 지금은 저 덩치놈을 구해줘야 할지도... 그렇다고 튀어나가자니 저 흰놈의 표정이 무지 살벌하고.. 저대로 나두면 저 덩치는 어쩌면 병신이 될지도 모르겠다. 쯔쯔.. 그러게 졌으면 깨끗이 인정하고 물러날 것이지 뭣하러 끝까지 우스운 발악을 한거야. 저래서 저런 놈들은 폼만 그럴듯하게 잡아놓고 나중에는 복날 개패듯 맞는거야. 쯧.. 별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내 동네에서 살인이 나면 그건 또 나름대로 귀찮고 짜증나는 일이었기 때문에 저 덩치를 도와주기로 했다. " 그쯤 해두세요. 보아하니 저분 기절한거 같은데요..." 정의시민 유승하 등장이요! 그러나 흰놈은 아랑곳않고 나를 한번 흘끔하더니 다시 덩치를 구타했다. 에에에엑.......저런 계세야 같은 녀석을 봤나. 어쩌면 이번에도 잘못 건드리는건 아닌가...... 그러나 오지랖 넓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내가 이대로 저 덩치를 두고 나가자니 그것 또한 찜찜했다. 하하.. 설마하니 세야같은 괴물새끼가 또 있을라고... 제길..... 내가 요샌 그놈에게 처맞긴 해도 알고보면 나도 웬만큼 주먹쓰는 놈인데. " 그만 하라니까요. 그러다가 죽으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내 목소리에 흰놈은 그제서야 구타를 멈추고 나직하게 영어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내쪽에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 시비는 이 녀석이 먼저 걸었어. 너도 아까 전부터 계속 봤을테니 잘 알텐데? 나도 이런 녀석 따위 밟아봤자 별 이득도 없지만 그래도 신경건드린 값은 해줘야지 않겠어?" 나는 덩치에게와는 달리 초면인 상대에게 반말을 해대는 흰놈의 거슬리는 태도보다도 놈이 내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는 것에 대해 더 의문이 들었다. 저 녀석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았을텐데 저 덩치는 워낙 눈치가 둔해서 내가 왔었다는것도 몰랐을테고... " 충고 한가지만 하지. 오늘은 네가 끼어들어서 이정도로 끝내두지만 다음에는 남의 일에 쓸데없는 정의감으로 끼어들면 너만 곤란해질 거야. 지금 여기에 쓰러진 이놈은 인간 값어치도 못하고 오줌인지 똥인지도 가리지 못하는 쓰레기 같은 놈이니까. " " 에............에?" " 그럼 이만...." " 아! 잠깐!!! 이사람은 어떡하구요? 기절까지 시켜놓고.." 내가 어벙하게 굳어서 이상한 소리를 내자 흰놈이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 네가 도와줬다 해도 이놈 머리로는 그런 것 따윈 구분 못해. 오히려 너를 얕잡아보고 협박할지도 모른다. 내버려 두고 너는 네 갈길이나 가는게 이로울거다." 그러더니 유유히 골목길을 빠져 나가는게 아닌가. 나는 흰놈의 싸움실력이 놀랍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길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이 덩치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암만 생각해도 흰놈이 쓸데없는 얘기를 할 위인으로는 안보였기 때문에 나는 그냥 기절한 덩치를 놔두고 집으로 향했다. 어차피 싸움도 끝나서 시끄러울 일은 없을 테니까. 이상한 놈을 만났다. 다음 날 학교에 왔을 때 나는 뭔가가 달라진 걸 느낄수 있었다. 여전히 책상위에는 별별 잡쓰레기가 놓여있었고 책상서랍은.....손을 넣지 않는게 심신을 위해서도 유익한 결정이었다. 지난번엔 무심코 손을 넣다가 토막난 개구리의 시체를 생으로 만지게 되었다. 내가 그런걸 가지고 까무라칠 만큼 심약한 녀석은 아니었지만 그 비린내와 토막난 개구리의 처참한 시체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심히 역겨울 정도로 잔인한 것이었다. 도대체 누가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런짓을 하는 녀석이 결코 정상적일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크면 분명 뭔가 단단히 일을 저지를 놈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아니 그 이유가 너무 유치한 것이라서 더 이상 생각하는건 괜한 심력소모라는 걸 근 2년간의 경험으로 절절히 깨닫고 있던 나는 책상위를 치우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이런 나를 보며 질리지도 않는 듯이 야유를 보내며 욕을 해댔고 여느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이제 곧 있으면 녀석이 들어와서 나를 쥐어패겠지. 하도 맞아서 얼굴을 빼고는 온몸이 울긋불긋... 이제는 맷집도 수준급으로 성장해서 왠만한 녀석들에게 맞아서는 끄떡도 안한다. 아하하하 대단하군!!! 이 아니잖아..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구.. 젠장. 그런데.....여기까진 어느때와 마찬가지 패턴으로 흘러갔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의문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조례가 시작하기 까지 의레 있어야할 놈의 구타가 없었다. 처음에야 무심코 지나쳤지만 어느순간 놈의 구타가 각인된 내 몸은 움찔했던 것이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놈이 학교에 안나온 것도 아니고 놈은 분명히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따라서 놈이 학교를 결석해서 놈의 주먹질을 피할수 있었다라는건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어디가 불편한건가? 은근 슬쩍 놈의 얼굴을 쳐다봤지만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이었다. 아픈 것 같지는 않은데... 당황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반 아이들 역시 놀래서 알게 모르게 수군거리고 있었다. 아침마다 재미난 볼거리를 제공해주던 놈의 구타가 이유도 없이 멈췄기 때문에 그들 나름대로 놀라고 있었나보다. 아니면 아쉬워 한다던지...... 순간 내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하나가 스쳐지나갔다. 설마... 설마 이놈이......? 그런...........그럴 리가..............별로 착한 놈도 아닌데.......의외로 귀여운 구석도 있는건가? 내 머릿속을 스친 생각은 어제 빌려준 교과서에 대한 놈의 보답이 아닌가 싶었다. 단 한번 빌려줬는데....... 헤에...........만약 정말 그것 때문이라면 이녀석도 어쩌면 순박한 놈일지도....흐음............. 푸훗... 참으려고 해도 놈이 정말 그랬다고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순간 놈의 어깨가 움찔했던 것 같은데... 아니었나? 더욱이 놀라운 건 다음날 부터였다. 본래 남들보다 약간 더 일찍 들어오던 나였지만 설마하니 놈이 먼저 와 있을 줄은 몰랐다. 놈은 늘 10분에서 5분간의 여유를 남겨두고 칼같이 등교했다. 즉 약 15분에서 20분정도 더 빠른 이 시간대에는 절대! 네버! 오지 않았어야 하는데 놀랍게도 놈이 나보다 먼저 도착해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놈의 등교시간에 대해서까지 자세하게 알 수 있는거냐고? 말하기 민망하지만 녀석의 등교시간과 동시에 내가 구타를 당해왔기 때문에 알 수 있었노라고 대답하겠다. 일이야 어찌됬건 놈이 나보다 일찍 등교했다는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이내 내 자리로 가려고 하다가 나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청소도구에서 빗자루와 쓰레받이를 가지고 가려고 했다. 그러다 놈의 이른 등교에 놀라서 그냥 지나치던 내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에......? 어라라? 깨끗한데? 보통 이맘때면 쓰레기나 아니면 요상한 시체나 오물들이 내 책상위에 올려져 있어야 했다. 하지만 현재 내 책상위는 어제 내가 치워둔 그대로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들려오던 야유도 없었고. 교실안을 훓어보니 평소 나를 향해 욕이나 잡스러운 소리를 하던 놈들이 조용히 고개를 처박고 계세야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어쩌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놈은 화들짝 놀라며 얼른 공부하는 척 고개를 처박고 뭔가를 끄적거렸다. 이....이거는!!! 천국이다!!!!! 해방이다!!!!! 아니! 난 원래부터 자유인이었지만 정말 유쾌! 통쾌! 상쾌!!!!!!!!!!!!! 우오오오오!!!!!! 드디어 왕따의 길에서 벗어나 평범한 고등학생시절을 맛볼 수 있는 것인가아!!!!! 라고 즐거워 할 일은 둘째로 치고... 정말 이게 어떻게 된거냐;; 나는 갑작스레 달라진 대우에 오히려 놈들의 새로운 장난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인간들이 하루만에 싹 바뀌다니... 뭐 이런! 기적같은 일이. 놈들이 정말 마음먹고 바른 길을 살아가기로 작정한 것인가? 라기엔.. 저놈들은 너무 질이 나쁜 녀석들이었다. 한마디로 하루아침만에 개과천선 하긴 다 그른 녀석들이었단 소리었다. 결국.. 세야녀석 때문이로구나. 나는 그제야 어느 정도 눈을 굴리며 상황파악을 할 수 있었다. 평소 이른 시간에 계세야가 나보다 먼저 학교에 등교를 했다. 그게 언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놈들이 내 책상위에 쓰레기를 들이붓는 시간대랑 일치했을 거였다. (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계세야와 거의 비등하게 놈들도 질리지도 않고 이 짓거리를 1년 넘게 저질러 왔다. 물론 가끔씩 놈들도 지쳐서 뜸할때가 있긴 했지만..) 그렇다면 결과는 뻔했다. 저렇게 몰려다니면서 힘을 과시하지만 막상 따로 떨어뜨려 놓고 나면 개개인은 쓰잘데기 없는 놈들이 무슨 깡으로 놈이 앉아 있는 내 옆자리에 쓰레기니 오물이니 이상한걸 들이부을 수 있었겠는가. 그나마 이제까지 내가 더러운걸 싫어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놈이 오기 전에 제꺼덕 청소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또 다른 이유로 구타당하는 명목이 추가 되었겠지. 보아하니 놈도 꽤 깔끔한 걸 좋아하는 눈치였으니까. 헤에... 거기다가 오늘도 안 때리네? 교과서 한번 빌려준 거치고는 놈이 정말 거하게 은혜를 갚는구나. 그러고 보면 그렇게 나쁜녀석도 아닌 것 같은데 왜 나만 보면 그렇게 화를 내며 쥐어팼던 걸까? 뭐.. 아무렴 어떠냐? 내 일상이 평온해지면 그것 나름대로 멋진 일 아니겠는가. 나도 모르게 놈을 보면서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은혜 갚는 까치인가? 아니.. 은혜 갚는 강아지였나? 푸.....푸흡! 또 멋대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계세야....세야.. 놈의 이름. 그렇게 낯설지만도 않았는데...... 오히려 성만 빼면 세야라는 이름은 친근감 있는 것이었다. 많이 불러 본 듯한. 음? 많이 불러봐? 언제 내가 세야라는 이름을 불러봤었나? 기억을 더듬어도 떠오르지 않는다. 아! 설마........아니야.......가능성은 있어.....그럼....혹시?...이.......이게 바로 데자뷰라는 것이었던가? 낯설어야 할 상황에서 오히려 친숙감을 느끼며 한번 겪어본 듯한...아...아니지....이런.. 쓸데없는 잡생각을.... 각설하고.. 에라!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뭐.. 놈의 이름을 세야야~ 하고 곰살맞게 부를 일이 하늘이 두쪽이 나지 않음에야 그럴 수 있을까?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일주일이 거의 다 되어가도 놈은 언제나 나보다 먼저 등교를 했고 덕분에 나의 책상위는 늘 상 깨끗했으며 놈의 구타도 없었다. 처음에야 어리둥절 했지만 이게 반복되자 나는 점점 놈에 대한 호감도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놈이 있는 교실은 조용했고 안하무인의 여자애들도 입만 비죽거릴뿐 별 말하지 못했다. 나야 나날히 늘어가는 놀라운 테크닉과 마이크로칩도 울고갈 섬세한 작업으로 평화롭게 부업을 하였으니 아... 이 얼마나 평화로운 날들인가! 비록 친구 한명 없는 외로운 왕따 신세 면할 길은 없었지만 그거야 상관없었다. 많이 외롭긴해도 먹고사는 것도 뻑뻑한 나에게 있어서 친구란 맑은 감성의 풍요로움 이었지만 녀석들과 노닥거리는 시간동안 날아가는 내 부업잔당은 생활의 빈곤이었으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였다. 물론 있는게 훨씬 좋은 일이었지만 이 상황에서 이이상 바라면 나도 정말 욕심많은 녀석일테니 그럭저럭 적당한 선에서 만족하고 살란다라고 마무리 지어놨다. 달칵... 교실 앞문이 열리면서 담임이 들어왔다. 담임은 늘 그랬듯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좋은 아침을 외쳤다. 아이들도 이에 맞대응해서 인사를 했다. 담임은 잠시 교실을 훓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 좋아. 결석한 사람은 없군. 너희들에게 전달할 내용이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첫 번째는 수학여행의 모든 일정이 다 잡혔으며 나흘 뒤에 안내프린트가 나간다는 것과 두 번째는 우리반 전체가 다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다. 이제 얼마 안남았으니까 모두들 준비 철저히 하도록 해라." 나는 무심코 흘러 넘기려다가 깜짝 놀라서 담임을 쳐다봤다. 옆의 놈이야 원래 갈 수 있었지만 집안사정인지 뭔지 그것 때문에 못 간다고 했었고 나는 굳이 집안사정을 들먹이지 않아도 부업과 아르바이트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는 근로청소년 인데 이게 무슨 오리뼈다귀 갉아먹는 소리라냐! 난 거기에 갈 돈! 돈이 없는데? " 승하랑 세야는 이시간이 끝나면 같이 교무실로 내려와라." 반 아이들은 나도 함께 수학여행에 참여하게 된게 내심 기분나빴는지 투덜거리고 있었다.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느정도 익숙해지려 다가도 이럴때면 왠지 씁쓸했다. 누군 같이 가고 싶어서 가는건 줄 아나? 도대체 나까지 간다니... 무슨 소리람. 드륵!! 놈이 늘씬한 거구를 들어내면서 일어나자 나도 덩달아 헐레벌떡 일어났다. 담임은 이미 조례를 끝내고 나간 상태였고 세야놈은 끝나고 내려오라는 말대로 몸을틀어 교무실을 향해갔다. 놈의 다리가 얼마나 긴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갈 때 나는 177cm의 그닥 작지 않은 키에도 불구하고 쫄래쫄래 뒤따라 가야했다. 제길! 얼마나 잘먹어야 저렇게 키가 클 수 있는 거냐! 속으로 궁시렁 거리며 교무실 앞에 도착하자 놈은 잠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까맣고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눈동자가 나를 마주하자 나는 깜짝놀랬다. 이....이놈.........눈이 이렇게 예뻤었나? 까맣고 초롱초롱한게... 강....강아지같다! 정작 본인이 알면 경을 칠 엄한 생각을 하면서 내심 속으로 예쁘다고 생각했다. 늘 무표정하거나 화를내는 표정밖에 못봤기 때문에 나는 갑작스레 마주친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봤다. " 먼저 들어가." 일순간 요상한 대치상태를 깨면서 놈이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멍하던 나의 정신은 화들짝 돌아오면서 엄청 뻘쭘해졌다. 내가 방금 무슨짓을! 저 자식이랑 그대로 눈을 마주치다니;;; 우워어어!! 아주 무덤을 파는구나! 그것도 포크레인으로 퍽퍽! 나는 먼저 들어가라고 말하는 놈의 말에 따라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담임선생님은 주변의 여선생님들과 노닥거리고 있었다. 저인간.. 인기도 많으시군 그래... 이게 대체 무슨일인지 후딱 알아보고 나서 거절해야지. 가뜩이나 세야녀석도 뒤따라와서 부담스럽기가 이루말할데 없었다. " 어? 왔네." 미소지으며 말하는 담임에게 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어찌된 일인지 묻기위해 입을 열었다. " 저... 선생님 그 수학여행건 어떻게 된거예요? 저는 분명히 못간다고......했었는데요.." 약간 뜸을 들이고 말을 하자 담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아...알고 있어. 승하 너는 집안사정이 안 좋다고 분명히 못간다고 했었지." " 그런데...어떻게......" " 생각해보니 너에게 있어서 이번 수학여행은 일생에 단 한번뿐인 기회 아니냐? 나중에 커서라도 이런 경험은 두 번 다시 하기 힘들어. 집안사정이 어렵다고 이런 기횔 놓치면 그거야말로 억울하지 않냐? 승하 너는 경제사정만 아니면 굳이 마다할 이유도 없겠다 싶어서....너에게 후원을 넣었다라는건 둘째치고 어떤놈이 자꾸 협박을 가해서 말이다. 하하.." "... 에? 협박이요?"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얼결에 반문했다. 우리 담임이 협박을 당했다고? 이 사람이? 그도 그럴것이 담임은 사람좋은 인상을 하고 있지만 분명히 날카로운 면모가 있는 강단있는 사람이었다. 거기다가 협박을 당할 정도로 녹록한 사정도 아니고...... 그런데 이 사람을 협박할만큼 대단한 사람이 도대체 누굴까? 아니...이게 아니지.... " 설마 그 후원이라는게 선생님께서 하신거예요?" " 그래. 장학금이라는 제도가 있긴 하지만... 네 성적을 보니 그건 못하겠더구나. 흠... 지난 일년간 정말 놀라울 정도로 성적을 깎아 먹었더군." " 그야......그렇지만..." 그건 먹고 살기도 바쁜 경제사정 때문이고...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대학비까지 마련해야하는 부담 때문에 중학교때처럼 공부에 투자할 여유가 없었다.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대학교도 못나오면 사람취급을 하지 않는 곳이니까... " 저....선생님 마음은 고맙지만 전 역시 못 갈 것같습니다. 이렇게 신세지는 것도 죄송하고.. 무엇보다......협박을 당하....신건..." 나는 최대한 완곡하게 선생님의 호의를 거절하려고 했다. 이 학교 수학여행비는 장난이 아니다. 못해도 100만원도 더 넘게 들어가는 것이었다. 해외로 나간다고 하니 당연한 거겠지만 돈도 만만찮게 들어간다. 게다가......어차피 가봤자 혼자 다닐게 분명한데.. 정말 젠장스럽게도 나는 그곳까지 가서 아이들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을 느끼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거절을 하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잠자코 있던 놈이 나를 밀치며 담임앞에 섰다. " 선생님. 저는 왜 부르신 겁니까?" 거절하려던 순간 말을 잘라먹고 튀어나온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당황했다. 저 자식이! 예의라는 것도 모르나. 사람이 말할 때는 끼어들지 않는게 예의라구!! 담임은 빙글빙글 재밌다는 표정으로 어쩐지 한껏 굳어진 놈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 아아.. 널 내가 왜 불렀더라? 분명히 뭔가 할 말이 있었는데." 순간 놈의 굳은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맙소사! 저 녀석 분명히 속으로 앞의 담임에게 주먹을 날리지 않는게 이상할 정도로 눌러 참고 있잖아? 내가 보기에도 무시무시한데 어째 담임은 혼자서 봄날의 꽃밭이라더냐. 보는 사람이 다 불안하게 히죽이죽 웃는 담임의 모습이 신선하기도 했지만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을 마주친 담임은 씨익 웃었다. " 승하 넌 별로 사양할 것 없어. 나도 네가 이번 수학여행에 꼭 동참하길 바라거든. 네가 거절하면 정말 곤란해. 부담가질 필요는 없어. 영 뭣하면 성적을 올려서 반평균을 올려주는 것도 좋고 말야. 우리반에서 쓸데없이 반평균을 갉아먹는 괘씸한 녀석이랑 같이 성적을 올려주면 나야 뭐.. 정말 고맙겠지. 하하.. 별로 부담갖지마." 그게 부담 갖지 말라는 사람이 할 소리입니까! 빙빙돌려 말하긴 했지만 결국엔 신세를 갚고 싶으면 성적을 올리라는 소리잖아요;;; 끝에 반평균을 갉아먹는 어떤 괘씸한 녀석은 보나마나 내 옆의 놈일테고... 당연하게도 나는 성적을 올릴만한 여유가 없었고 무엇보다 빚지고 살면 뒤끝이 찜찜했기 때문에 거절하려고 했었다. " 죄송하지만.." " 선생님!" 하지만 이번에도 나의 말은 놈의 고함에 막혀 무참히 짓밟혔다. 나는 자꾸 나의 말을 가로막는 놈에게 항의하는 눈길로 쳐다보려다가 다시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새..새끼...... 엄청 무섭네;;; 놈은 그야말로 살벌한 오로라를 피워올리며 낮게 으르렁 거리고 있었다. 대상은 건너편 담임이었다. 그러고보니 세야놈이랑 담임은 사촌지간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왜 이렇게 으르렁거리지? 담임은 그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책상위에 놓여진 쿠키에 손을 가져갔다. 아마 아까 여선생님들과 노닥거릴때 받아둔 것이었나보다. 와삭...와삭..... "......" "......" 나도 그렇고 놈도 살벌한 시선으로 담임을 쳐다보자 담임은 잠시 손을 멈칫했다. 그러다간 다시 우리를 보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왜 안가냐는 듯이 쳐다봤다. 이사람이 진짜!!! 불러놓은게 누군데! 더군다나 난 수학여행 안간다니까! 난 빨리 거절하고 놈과 담임에게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옆의 놈이 살기를 무럭무럭 피워내고 있었기 때문에 빨리 두사람의 용건이 끝나길 기다리며 뻘쭘히 서있었고 담임은 그런 세야놈을 무시하며 쿠키를 씹고 있었다. ".. 아! 너희들도 먹고 싶어서 그런거냐? 그런거면 진작에 말하지 그랬냐. 옛다! 먹어라." "...... 빠직...." ";;;;;;;" 그게 아니잖아요오!!!!!! 선생님! 지금 이놈의 살벌한 표정 안보이십니까아~!! 그러나 속생각과는 별개로 나는 그 얼음장 같은 분위기를 깨고 담임이 내민 쿠키를 어느새 집어 올리고 있었다. 그래... 나..... 달콤한 거라면 사죽을 못쓰는 놈이다. 간없고 쓸개없다고 욕해도 별 수 없다. 집안 사정이 어려운 관계로 한동안 이런 군것질 거리엔 손도 못댔었다. 더군다나 이런 고급쿠키라니!! " 고....고맙게 잘먹겠습니다." 와삭...와삭........ 내가 정말 받아먹을 줄은 몰랐는지 담임은 약간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옆의 세야놈은 눈썹을 약간 치켜뜨긴 했지만 뭔가 아련한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 부....부담스럽구만. 이 쿠키 정말 달콤하고 맛있긴한데..;;; 계속 두사람이 뚫어져라 쳐다보니 민망했다. " 너...너도 먹을래?" 이런 망할!! 겨우 용기를 내서 나온말이 너도 먹을래?라니.. 우워어어어!! 나같은 바보가 또 어딨냐! 나름대로 순수한 호의였지만 이런 상황에서 저놈이 넙죽 받아 먹을 리가 없잖아! 저놈 지금 엄청 화났다고! 그러나 정말! 진짜! 뜻밖에도 놈은 내가 내민 쿠키를 받아먹었다. 와삭.......와삭..... 와삭...... ;;;;;;;; 어느새 교무실 안의 선생님들을 비롯한 다른 아이들은 이 신기한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더;;;; 더 이상 못있겠다. 처음엔 좋아라 받아먹었던 쿠키였지만 이렇게 많은 시선이 꽂히는데 아무렇지 않게 먹을수 있을만큼 나는 강심장이 아니다. 외려 처음과는 반대로 나는 멈칫해서 쿠키에 손을 못대고 있었고 놈은 꿋꿋이... 그야말로 꿋꿋이 쿠키를 씹어 먹고 있었다. 슬쩍 담임을 보니 큭큭거리며 웃고 있었고 놈의 표정을 보니 인상을 찌뿌리긴 했지만 그래도 무슨 영문인지 내가 내민 쿠키를 씹어먹고 있었다. 설마....내가 쿠키를 먹는게 아니꼬왔던 걸까? 나에게 쿠키를 주느니 차라리 자기가 다 먹겠다는;;; 그런;;;;건가? 그런게 아니라면 저렇게 맛없다는 듯이 인상을 찌뿌려 가면서까지 쿠키를 집어먹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고보니 단걸 싫어하는 것 같던데..... 발렌타인데이 때였다. 녀석의 책상에는 의레 여러 가지 선물초콜릿들이 쌓여있었다. 내 책상에야 초콜릿 껍질이나 사탕껍질이 쌓여있었지만 놈은 그야말로 초호화 초콜렛들을 받아왔던 것이었다. 부르주아 학교의 학생들답게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대단한 초콜렛이나 사탕을(놈은 여자에게 줘야할 날에도 오히려 반대로 여자애들에게 사탕을 받았다.) 선물했는데...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때 그 일을... " 호오.. 세야 너 인기좋은데? 이야~ 부럽다. 누군 이런 초호화판이고 나도 만만찮게 받긴했지만...넌 정말 대단하다. 도대체 너같이 무뚝뚝한 놈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여자애들이 달라붙는건지... 비결이라도 있는거냐?" 놈의 친구인 듯한 다른반 녀석이 한명와서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세야놈의 친구답게 녀석도 꽤나 깔끔한 면상을 지니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도 그 친구놈의 마음에 동조하며 내심 부럽게 놈의 책상위에 쌓인 초콜릿을 쳐다보고 있었다. 놈의 인기를 부러워하진 않았지만 단것이라면 환장할 정도로 좋아하는 나였기 때문에 그 위에 쌓여진 초콜릿들은 정말 탐나는 것들이었다. 나같은 서민이 먹어보려면 하루 아르바이트비를 쏟아부어도 모자를 고급 초콜릿들이 가득 쌓여있는 걸 보고는 난생 처음 놈이 부러워졌다. 하지만 놈은 한숨을 내쉬더니 기분 나쁘다는 듯 말했다. " 이딴 끈적리는거 안 먹어. 단건 딱 질색이다." 그러더니 그 포장초콜릿들을 모조리 쓰레기통에 처박는게 아니던가! 옆에서 지켜보던 나도 그렇고 반애들도 모두 놀라 녀석을 쳐다봤다. 그 와중에는 놈에게 초콜릿을 선물한 여자애들도 있었는지 곳곳에서 경악과 울먹임이 뒤섞여 들려왔다. 나는 놈이 태연하게 쓰레기통에 초콜릿들을 버리고 오는걸 넋놓고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놈에게 들어온 초콜릿이 얼마나 많았냐면... 그 큰 쓰레기통위로 넘쳐나서 바닥에 떨어질 만큼 많았다. 저...저런 쥑일놈!!! 저 사랑스런 초콜릿들을 저렇게 막무가내로 버리다니! 차라리 그럴거면 나나주지!! 진심으로 버려진 초콜릿들이 아깝고 통탄스러웠기 때문에 나는 눈물이 나올뻔한 것을 꾹 참고 놈을 노려봤다. " 하긴.. 예전부터 네놈은 단걸 끔직히도 싫어했지. 그래도 너무 매정한거 아냐? 저거 선물한답시고 여자애들도 마음 졸이고 준건데... 하여간 재미없는 놈이라니까." 놈은 친구녀석의 말을 무시하고 태연히 다시 내 옆자리로 돌아와 엎드려 잤다. 곁에 있던 친구놈도 어쩔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휘저으며 나갔다. 이.....씨!!!! 먹기 싫으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면 될거 가지고 왜 버려! 아깝게!!! 그야말로 서민정신으로 똘똘 뭉친 나는... 방과후 아이들이 교실에서 모두 빠져나간걸 확인하고 조심스레 쓰레기통에 버려진 초콜릿들을 수거했다... 다행히 포장지로 꽁꽁 둘러쌓여있던 초콜릿들은 비록 겉은 지저분했지만 내용물은 훌륭하게 보전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히죽거리며 그것들을 가방에 쑤셔넣었다. 한가득 빠방하게 채워넣고도 남은 초콜릿들을 담을 공간이 모잘랐다. 나는 대충 주위에 널려있던 초콜릿 포장상자중 쓸만한 것을 찾아내어 거기에다가도 쑤셔넣었다. 그래도 남는 초콜릿들은 아쉽지만 버렸다. 더불어 내가 포장지를 뜯어 버려진 초콜릿들을 가져갔다는 사실을 은폐시키기 위해 모처럼 반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기로 하고는 쓰레기통을 비웠다. 원래는 청소부 아줌마들이 해야 할 일이었지만... 어딘지 가슴이 쿡쿡찔려서... 쩝;; 그래;;; 땅그지도 나만한 땅그지는 없을거다! 라는 슬픈 현실이 주된 이유였지만...;; 아...떠오르니 또 비참하구나... 하하.....하....어이구;;... 아묻튼 그정도로 단걸 싫어하는 놈이... 제입으로 분명히 싫어한다고 말한놈이..... 이렇게 달디 단 쿠키를 먹는건...... 정말 유치한 심술아닌가? 그래그래. 안먹는다. 안먹어! 좋은 놈이라고 생각했거늘... 이런데서 이렇게 치사하게 나올줄이야! 쳇! 결국 쿠키를 다 집어먹은 놈은 정말 재수없게도 부스러기 하나 묻지 않고 깔끔했다. 나는 교복에 부스러기가 묻어서 털어내야 했는데.. 담임은 씨익 웃더니 말했다. " 세야 네가 쿠키를 좋아하는 줄은 미처 몰랐는데.. 이것도 줄까? 승하 너도 가져가라." 그러면서 책상아래 종이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척보기에도 맛깔스러워 보이는 종합쿠키상자를 두개 꺼내들었다. 우......우와...........우리 담임선생님 정말 좋으신 분이었구나!! 나는 사양하지 않고 덥썩 선생님이 내민 종합쿠키상자를 받아들였다. 그래! 까짓거 성적좀 올리지 뭐. 이렇게 까지 하시는데 거절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절대 쿠키를 줘서 마음을 돌린건 아니고... 그냥 성실한 학생으로써 담임선생님의 훌륭한 제자가 되는게 바른도리 아니겠어? 반대로 놈은 담임선생님이 내민 또다른 종합쿠키상자가 엄청 맘에 안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마지못해 건내받았다. 저놈 또.. 쓰레기통에 처박는거 아냐? 에잇! 알게 뭐냐. 어쨌든간에...횡재했다! 띵동..띵동........ " 이런.. 곧 있으면 수업 시작하겠는데? 너희 둘다 얼른 들어가봐." 담임이 웃음을 참는듯한 표정으로 손짓하자 나는 그제야 수업시작종이 울리는걸 깨닫고 인사했다. " 아... 감사합니다. 쿠키 잘먹을게요." 꾸벅 인사하고 몸을 돌려 빠져나가는데 어느새 놈은 나보다 앞서서 교실을 향해 걷고 있었다. 우리 교실은 2층에 있었기 때문에 같이 계단을 올라가다가 놈이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놈의 뒤를 졸졸 따라가던 나는 놈이 갑작스레 몸을 돌려 쳐다보자 의아해하기 보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저놈 혹시.. 지금 내 쿠키상자까지 맘에 안든다고 왕창 부셔먹는거 아냐? 아까만해도 담임이 건내는 쿠키상자를 엄청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보던 놈이었다. 화풀이로 자신의 것을 쓰레기통에 버리던 밟던 상관은 없었지만 내것까지 그러는건;; 나도 모르게 긴장하면서 쿠키상자를 꼬옥 움켜잡자 놈이 몸을 돌려 내려왔다. 녀석이 점점 가까워 질수록 내 심장박동수도 점차 증가했다. 두근.......두근...........두근............ 꿀꺽....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쿠키상자는 사수한다! 나름대로 비장한 결의를 다지며 놈이 다가오는걸 기다렸다. 놈은 가까이 다가와서는 쿠키상자를 든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설....설마 저걸로 내려치는건!!?? " 먹어라." " 에..?" 쿠키를 사수하기위해 품안으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놈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나는 얼떨떨해져서 놈이 내민 쿠키상자를 멀뚱히 쳐다봤다. " 가져가. 난 이런거 들고 다니기 귀찮으니까." 어딘지 고개를 돌리고 뚱하게 내미는 녀석의 쿠키상자를 나는 조심스레 받아들였다. 말을 마치고는 다시 몸을 돌려 계단위로 올라가는 놈의 등을 보면서 왠지 놈의 귓불이 빨개진 것도 같았다. 아니.. 분명히 빨갛다. 저놈이 무슨....영문으로 나에게 이걸 준거지? 일이야 어쨌건 놈이 순순히 넘겨준 쿠키상자는 여전히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내 손에 들려 있었다. 놈이 나에게 쿠키를 전해준 일이 있고나서 어느새 시간은 흘러 수학여행 당일날이 되었다. 못갈거라고 생각했던 수학여행에 예상밖의 일로 참가하게 된 덕분에 나는 아니라고 우기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학교를 향했다. 큰 맘먹고 장만한 배낭에는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신오형에게서 빌린 옷가지들과 세면도구, 속옷.. 만약을 대비한 비상용품등 여러 가지가 들어갔다. 내 평생에 비행기를 타보고 일본이라는 섬나라로 가볼줄은 꿈에도 생각못했다. 나는 전날에 나눠준 프린트를 몇 번이나 확인하면서 시계를 봤다. 분명히 10시까지 모이라고 했었지? 보통은 8시반이나 9시까지 모이는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긴 했지만 학교 사정이 좋으니 시간도 여유있게 주는건가 하고 납득하고 넘어갔다. 현재 시간은... 8시 35분이었다. 이미 모든걸 준비하고 나갈 차비까지 다 마쳤지만 아직 남은 1시간 25분을 기다리는건 흥분되는 가슴과는 반대로 지루한 것이었다. 그때였다. 밖에서 쾅쾅거리고 문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사는 단칸방은 이미 헐을 대로 헐어서 저렇게 막무가내로 문을 두드리면 문이 고장날 위험이 있었다. 나는 약간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걸 느끼며 또 주정뱅이 정씨아저씨가 문을 두드리나 싶어서 외쳤다. " 아저씨!!!!! 아저씨네 집은 옆집이에요! 여긴 아저씨네 집이 아니라구요!" " 빨리 나와 유승하!" 나는 주정뱅이 정씨아저씨의 혀꼬인 걸걸한 목소리가 아닌 단정하고 차분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깜짝 놀라 밖으로 나가보았다. 우리집에 찾아올 사람이 있었던가? 그것도 이 시간대에...... 헐레벌떡 문을 열자 눈앞에는 생각해 본적도 없는 인물이 서있었다. 세상에.....내가 지금 꿈이라도 꾸는건가? 계....세야잖아? 놈은 검은 폴라티 위에 진녹색의 가죽재킷을 걸치고 물빠진 진바지를 입고 서있었다. 평소 단정한 모습의 교복차림이 아닌 사복차림의 놈은 정말... 감탄이 나올정도로 괜찮게 생겼다. 그동안은 몰랐는데... 아마도 녀석을 제대로 훓어 볼만큼 정상적인 만남을 못가졌기 때문일지 몰랐다. 아묻튼 놈은 남자인 내가 봐도 억소리가 날정도로 멋졌다. 그다지 대단찮은 옷을 걸친건 아니었다. 내 또래 중산층 아이들이 걸치는 평범하다면 오히려 평범할지도 모르는 차림인데... 이경우엔 옷걸이가 좋다고 봐야하나? 내가 속으로 감탄사를 연발할때쯤 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 너......왜 안나온거냐? 차시간보다 15분이나 늦었다." 화가 난듯한 놈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둔기로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듯 했다. 무슨 소리야? 원래 차시간보다 15분이나 늦었다니? 분명히 어제.... 희정이라는 여자애가 차시간이 바뀌었다고......10시까지 오라고 했는데.... "!!!!!!!!" 나는 그제야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있었다. 어쩐지 평소 나를 매우 경멸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던 여자애가 왠일인지 살갑게 다가와서 바뀐 차시간까지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고 했었더라니만 ..... 이런...것일줄이야.....하...하하... 앞의 놈은 점차 굳어가는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말없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걸어서 어떻게 알았는지 내 배낭을 들고왔다. 나는 그때 정말 우습게도 놈이 아무말 없이 배낭을 들고 밖으로 걸어가는 모습에 안도했다. 서둘러 나도 신발을 신고 문을 잠갔다. 놈은 벌써 택시를 잡아놓고 있었다. 택시에 올라탄 놈과 나는 아무말 없이 침묵하고 있었다. " 어디로 갈까요?" " 계원고등학교로 가주세요. 빨리요!" 택시기사의 물음에 나는 후딱 대답하고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학교를 향하는 도중에 나는 계속 생각했다. 어째서....... 이 녀석이 나를 데릴러 온걸까...?...이 놈은 누구보다도 나를 싫어할텐데.... 안오면 그냥 두고 갈 수도 있었을텐데... 담임....선생님이 시킨건가? 그보다도 어떻게 우리집을 찾아온거지? 주소가 적혀있다고 해도 내가 사는 동네는 그렇게 쉽게 찾아올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하층민들이 생활하는 곳이다보니 골목길들이 얽히고 설킨데다가 비슷비슷한 집들이 한두군데가 아니었다. 담임선생님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고 하더라도 한번에 찾아올만한 곳이 아니었다. 가끔씩 나도 헷갈리는 곳을... 이녀석... 길을 엄청 잘 찾는건가? 차창에 비친 놈의 얼굴에선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기분 나쁘다는 표정도... 그렇다고 나처럼 약간 들뜬 표정도 아닌 무표정이었다. ..... 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냐? 나의 부탁대로 속력을 낸 택시기사아저씨 덕분에 약 10분후에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 때문에 놈이 온거였기 때문에 택시비를 내려는 순간 이미 놈이 먼저 돈을 내고 내려섰다. 나는 무안해져서 말했다. " 저기.. 택시비는...내가......" " 됐어. 그런 푼돈.." 딱잘라 말하는 놈이 왠지 너같은 가난뱅이랑은 차원이 다르다는 듯이 말하는 것 같아서 울컥했다. 하지만... 저 녀석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나에겐 의미있는 돈일지 몰라도 저 녀석 앞에선 푼돈으로 밖엔 안 비췰지도...... 방금 전만해도 수학여행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엄청 들떴었는데 왠지 기분이 가라앉았다. 놈을 뒤쫒아가 탄 버스에는 반아이들 모두 기분나쁘다는 듯이 인상을 쓰고 있었다. " 정말! 뭐야.. 쟤 때문에 25분이나 늦춰졌잖아. 짜증나네." " 하여간 찌질이 주제 가지가지 한다니까." " 뭐하나 제대로 할줄 아는게 없으면 적어도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할거 아냐." " 에이 썅.. 기분 잡쳤네." 수군수군.. 여기저기서 비난이 쏟아져 나온다. 나는 그 목소리들을 무시하며 빈자리를 찾아 둘러보았지만 이미 버스 안은 아이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기 때문에 내가 앉을 곳은 없었다. 아니 있다. 딱 한군데.... 세야놈의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놈은 나를 데리고 왔기 때문에 혼자 앉아있었다. 이번에도 저 녀석이랑 같이 앉아야 하나.... 딱히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 긴시간을 혼자서 서서 갈수도 없고.. 문제는 저놈이 나랑 같이 타고 가는걸 내켜하느냐 마느냐인데... 나는 눈 딱감고 놈의 옆자리에 앉았다. 반아이들은 흥미로운 눈길로 나를 주시했다. 아마 세야놈이 꺼지라고 하던지 옆에 앉지말라고 주먹질 하는 것을 내심 바라고 있는걸지도 몰랐다. 나역시도 별 기대없이 앉았지만 놈은 잠시 움찔할뿐 별말 없었다. 의외로 순순히 옆자리에 앉힌 세야를 놀라운 눈초리로 아이들이 쳐다봤다. " 어라? 승하녀석 왔구나. 세야녀석이 데리러 갔는데 다행히도 늦지않게 잘 데리고 왔네." 아마도 선생들과 수학여행 일정에 대해서 상의하고 나 때문에 시간을 미루기위해 돌아다녔을 담임이 차안으로 올라왔다. 나는 담임에게 엄청 미안해지는 걸 느끼며 고개를 푹숙였다. " 죄송합니다...시간대가 바뀐줄 알았어요..." 나는 말하고 나서 살짝 희정이라는 여자애를 노려봤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시치미를 뚝 떼며 오히려 한술 더 떠서 말했다. " 바보아냐?..시간대도 제대로 못맞추고, 저런애는 그냥 두고 가도 상관 없었을텐데!" 그녀의 말에 맞장구쳐서 아이들도 키득거렸다. 담임은 그녀를 지그시 쳐다볼 뿐 별말없었다. 그녀가 비웃은 대상이 나라는걸 이미 이 버스안의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 나는 따로 차를 타고 공항에 갈테니 너희들은 기사님의 지시에 잘 따라주기 바란다. 즐겁게 가는건 좋지만 너무 소란스러운 것도 안 좋아. 그럼 나중에 보자." 담임이 차내에서 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동이 걸리고 버스가 출발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즐겁게 재잘거리며 놀고 있었다. 3 박 4일의.. 일본으로 가는 수학여행.........어이구................볼건 많겠지만 즐거...울지는... 주변과는 달리 나와 세야놈이 앉은 자리는 시베리아 벌판.. 말한마디 없이 침묵.. 아아.. 즐거운 수학여행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미건조한 상황이다. 하긴. 저놈이나 나나 언제 알았다고 말트고 다른 아이들처럼 재잘거리며 대화한단 말이냐. 세야놈은 원래 무뚝뚝하고 지 할말만 하는 놈이고 나는 그렇지 않다해도 상대가 있어야 수다를 떨든 말든하지.. 그저 공짜 수학여행이라는 것 하나에만 위안을 얻어 가야하는 내 신세도 처량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일정이 적힌 프린트를 꺼내서 읽었다. 2 박3일동안 온천을 테마로 떠나는 일본여행... 우리가 갈곳은 훗카이도 였다. 아마 도착하고 나서 묵게될 호텔에서 한동안 머무르며 주변을 둘러보게 될 것 같았다. 수학여행은 보통 이것저것 일정을 많이 잡아놓는게 다반사였는데 우리 학교같은 곳에서는 이미 질릴만큼 여행을 많이 다닌 부르주아들이 대부분이라서 그런지 이경우엔 그냥 일정 같은걸 빼버리고 한곳에 머무르면서 학생들이 재주껏 알아서 구경하는 정도로 결정지어졌다. 한마디로 일정도 없고 어디를 가든지 자유라는 소리였다. 물론 통제가 이루어지긴 할테지만 이정도면 꽤 파격적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긴 이제와서 이미 다 돌아본 것들을 두 번세번 보는것도 지겨운 일일테지....나 하나만 빼고! 쳇... 가서 그 유명한 일본온천에서 본전 뽑고 오는게 내 유일한 사명이다! 거기다가 일식을 맛볼수 있는 일용할 기회가 아니던가? 집에서 처박혀 있는 것 보담야 백배 낳겠지. 프린트를 한번 훓어본 나는 어쩐지 머리가 무거웠다. 아마도 수학여행 때문에 새벽잠도 설친게 원인이었나보다. 꾸벅....꾸벅.......... 절로 고개가 내려간다. 졸면.....안되는데...............으으음................... 툭툭!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무언가가 나를 건드렸다. 나는 뭔지 알 수 없었지만 더 자고 싶은 나머지 평소 습관대로 고개를 부비적거렸다. 순간 옆에서 건드리던 무언가가 움찔했다. 그러더니 곧 아무것도 안 느껴졌다. 나는 덕분에 좀더 편안해진 기분으로 잘 수 있었다. ".. 일어나. 유...승하 일어나라." 아련히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의 몸이 흔들리는 것과 동시와 정신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이들이 경악에 찬 모습으로 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갑작스레 깨어난거라 영문을 알수 없어 눈만 꿈뻑 거리다가 곧 내가 머리를 기댄곳이 어딘지 깨닫고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 다왔어. 빨리 내려." 이........이건 설마!!!!!!!! 설마!!!!!!!! 내가;;;;;;; 이 놈의 어깨에 기대고 잤단 말인가!!!!! 허...허헛!! 설마가 사람잡는 다지만;;; 맙소사. 내가 지금;;;; 무슨짓을 저지른거야! 아침에 출발했을 때와는 달리 창밖은 이미 약간은 어둑해져 있었다. 겨울이라서 그런지 금새 어두워지긴 했지만... 세상에 내가 이렇게 될 때까지 녀석의 어깨를 베고 잔거였나! 거기다가...... " 유승하. 안내리나?" 나는 패닉에 빠져 허우적 거리다가 놈의 무뚝뚝한 목소리를 듣고 얼른 몸을 일으켜 빠져나왔다. 커다란 배낭을 힘겹게 등에 짊어지고 나가려는데 갑자기 등뒤가 가벼워졌다. 내가 놀래서 뒤를 봤더니 놈이 배낭을 들고 있었다. 놈 옆의 짐가방도 엄청 무거워 보이는데;;; 한손으로 내것까지 들다니;;;; " 아;;;;아니 내가 들을께. 하하하;;;; 나도 들 수 있어;" " 네 녀석이 이깟것 가지고 앞에서 꾸물거리니까 신경쓰여서 그러는 거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빨리 내리기나해. 뒤에 있는 사람도 신경써야지." 그래봤자 너 하나밖에 없구만... 그럼 그렇지. 저놈이 설마하니 순수한 호의로 내 배낭을 거들어줬겠냐. 말이나 이쁘게 하면 좀이나 좋게...쳇! 그래 너 힘쎄다! 너 잘생겼다! 너 잘났다!!!!! 니 팔뚝 굵~~다!!! 어이구!! 비행기를 타고 약 3시간 정도 거쳐서 훗카이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두운 밤이었다. 나와 아이들은 반장의 지시에 따라 모여서 인원체크를 하고 준비된 렌트카를 타고 이번에 묵게될 호텔로 향했다. 세상에...... 그저 옆에 붙어있는 섬나라였지만... 그래도 이국땅인지라 렌트카의 차창밖으로 보이는 거리는 눈이 돌아갈 만큼 화려했다. 여기저기서 번쩍거리는 전등... 낯설은 사람들;; 저;;;; 저게 바로 기모노라는 거구나!! 작게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자 옆의 이름도 모르는 놈이 비웃듯 말했다. " 촌놈이군. 이딴것들을 보고 놀라는거 보면..." 나는 귀에 거슬리긴 했지만 확실히 일본은 처음이었기에 그저 속으로만 삭였다. 내가 촌놈인거에 보태준적이라도 있나? 괜히 트집잡고 난리야! 쳇! 렌트카를 타고 한참 가다 멈춘곳은 일본 전통가옥을 모티브로 현대식 건물과 조합된 이국적이지만 깔끔한 인상을 심어주는 호텔 앞에서였다. 마지막으로 반끼리 모여 인원점검을 마친뒤 이미 도착해 있던 담임에게 간단한 주의사항과 내부구조에 대한 소개를 들었다. 온천을 사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와 식당은 어디에 붙어있고 더불어 이곳의 지리와 주변에 대한 여러 가지를 간단하고 빠르게 설명해준 담임은 마지막으로 방배정에 대해 말했다. 보통 4명씩 배정됬는데.......이미 수학여행 이틀 전에 다 짜놓았다. 방은 여자와 남자로 나눠져서 배정되었다. 배정방법은 공평하게 하자는 담임의 말에 따라 제비뽑기로 결정되었다. 각자 쥐어진 종이에 적힌 호실로 가면 된다는 말과 동시에 우리는 환호성을 지르며 흩어졌다. 그래그래.. 너그들은 좋겠다. 같이 놀 녀석들도 있고...쳇....... 나는 놈에게 돌려받은 배낭을 짊어지고 종이에 적힌 호수를 살펴보았다. 302 호네... 주변은 신기했다. 거리에 지나다니는 한눈에도 한국인과는 차이가 나는 일본인들도 신기했고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라던지 들고 있는 물건 하나하나가 신기했다. 호텔직원들은 연신 아리가또~를 외치며 친절하게 안내해주었고 덕분에 나는 왜놈 쪽바리들이지만 이 친절한 태도만큼은 정말 괜찮다고 느끼며 방을 찾아갔다. 이방이었지? 벌컥!!! 나는 문을 열자마자 굳어진 상태로 정면을 쳐다봤다. 이.....이무슨 악연이란 말이던가! 아니;;; 아니;;; 저놈과 나 사이에 무슨 인연이 있다고 계속 이렇게 엮이는 거냐! 제길;;; 이거 거짓말이지;;; 그렇지;;;;;;; " 뭐해. 들어와. 안 들어 올거면 문 닫던지." 놈도 놀란 눈치로 나를 보더니 말했다. 나는 떫떫한 마음으로 방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누군지 모를 다른 두놈은 짐만 놓고 어디론가 갔나보다. 보나마나 놈들도 세야 저놈이 같은 방이라는 걸 알았을 때 놀래서 짐도 제대로 정리못하고 헐레벌떡 뛰쳐나간 거겠지. 대충 상황이 눈앞에 그려지면서 알게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놈은 어느새 짐정리까지 마친뒤 침대에 걸터앉았다. 방안에는 다다미식 장판위에 침대 두 대가 놓여있었다. 또 다른곳에는 장롱이 놓여 있었는데 난감해졌다. 방안은 넓었다. 중학교 수학여행 때와는 비교 할 수 없을만큼. 4 명이 사용하기에는 매우 여유있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침대가 2대라.....음....... 나머지 사람은 요를 깔고 자면 되겠지만 나는 그렇다 쳐도 이방에는 3명이 더 있다. 거기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있는 녀석들 중 나를 제외한 사림이 요를 깔고 자려고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에이씨! 침대를 들여놓을거면 4개 다 해놓을 일이지 이렇게 2개만 덩그러니 늘어놓으면 어쩌자는 거야! 거기다가 지금은 밤이라서 곧이라도 잠자리에 들어야할 판인데;; 쳇;; 알게 뭐람. 나머지 세놈들이 알아서 하겠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신경접고 목욕이나 하고 오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호텔안에서 유카타니 뭐니가 다 알아서 준비되어 있었다고 했기에 나는 세면도구와 속옷만을 가지고 뒤쪽에 있다는 온천으로 갔다. 이곳은 우리나라처럼 탕이 아닌 그야말로 천연 온천을 겸비하고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제일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아이들을 피해서 찾아간 곳은 대나무로 발이 쳐져 있었고 대롱위에서 쏟아져 나오는 맑은 물이 아닌 뿌연물이 어딘지 신비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머뭇거려지는 곳이었다. 탕위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옆에는 뭐라고 한자로 적혀 있었지만 전혀 읽을 수 없었다. 다행히 예상대로 사람은 없었다. 탕이 여러곳 있었기 때문에 굳이 이런 구석지고 좁은 곳을 이용하려고 하지는 않았겠지. 천천히 발을 담그자 뜨뜻한 물이 닿았다. 음.. 이정도면 견딜만한데? 동네 목욕탕에서도 왠만하면 열탕을 애용했던 만큼 나는 꽤 열에 강한 편이었다. 천천히 몸을 내리고 피어오르는 수증기들과 함께 느긋이 탕의 벽에 머리를 기대었다. 이런 좋은 곳을 혼자 독차지 할 수 있다는 만족감과 함께 하루종일 차안에서 지냈기 때문에 피로해진 몸이 노곤하게 풀리는걸 느꼈다. " 하아.....좋다........." 나른하게 퍼지는 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대로 이 시간을 만끽했다. 뒤쪽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 놀래 쳐다봤더니 놀랍게도 그곳에는 원숭이 한 마리가 있었다. 우....우와.......세상에;; 일본의 온천에는 원숭이들도 들락거린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네? 원숭이는 나를 보더니 놀래지 않고 익숙한 듯이 다가왔다. 아마도 이곳에서 나 외의 사람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그런 모양이었다. " 아.....안녕?" 알아들을 수 있을랑가;;; 하하하;;;; 내가 머쓱하게 원숭이에게 말을 걸었지만 원숭이는 그냥 눈만 껌뻑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탕으로 들어오는게 아닌가. 음...원숭이들도 온천을 즐기는구나.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그래그래.. 혼자 있는것도 좋지만 원숭이 한 마리도 그다지 나쁘진 않지 뭐. 바스락.... 또 다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 이번엔 또 뭔가 봤더니 원숭이 한 마리가 더 있었다. 녀석은 이미 탕안에 들어와 있는 제 동지를 보고는 안심했는지 함께 들어왔다. 나는 원숭이들이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해서 즐겁게 쳐다봤다. 바스락....턱... 이번에도 의레 원숭이 한 마리가 더 들어왔거니 하고는 별 신경쓰지 않고 눈을 감은채로 있었다. 기척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 싶더니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번엔 좀 큰놈인가? 눈을 감고 잠시 머뭇거린 기척을 떠올리며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잠시 경계하긴 했지만 역시나 탕에 들어오는 듯 싶었다. 그런데......이.....건? 원숭이 치고는 꽤 거구인지 물이 많이 출렁거리나 싶었지만 궁금해서 눈을 뜬 순간 몸이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일부로 그러는 거라면 더할나위 없이 사람 피말리는 짓이었고;;;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자주 접촉하는 것 같아서 찝찝한;; 아니 두려운 상대였다. 계....세....야!! 타올 한 장으로 하체를 가린 놈은 내쪽은 신경쓰지 않는 다는 듯이 이미 탕에 들어와 몸을 담그고 있었다. 이...이런 오라질;;; 하고 많은 탕중에 왜 하필 여기에 온거냐! 아니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네 녀석이 여기로 온거냐;; 그러다 문득 시선이 간 놈의 몸은 정말 제기랄이었다. 윽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놈은 군살없이 매끈하게 잘빠진 몸매였다. 나처럼 못먹어서 어떻게 보면 가늘다고 할 수 있는 몸매가 아닌 밸런스있게 짜여진 근육과 날렵해 보이는 체격;; 한마디로 내 이상의 몸매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하얀 몸이었지만 결코 약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하느님을 원망했다. 집안도 잘 타고나고 얼굴도 잘생긴데다가 몸매까지 저렇게 만들으시다니! 정말 불공평 합니다요!! 에이씨! 나도 이참에 운동이나 해볼까? 그때 탕안에 있던 원숭이중 한마리가 놈에게 다가가더니 툭하고 건드렸다. 놈이나 나나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원숭이를 보고 있노라니 녀석은 한번 더 놈을 툭툭 건드렸다. 잠자코 무시하려던 세야놈은 원숭이가 계속 건드리자 무심한 얼굴로 손을 휘저었다. " 저리가라." 낮은 목소리와 함께 원숭이를 밀어냈지만 녀석은 아랑곳 않고 다시 세야놈을 툭하니 건드렸다. 세야놈은 이맛살을 찌뿌리며 원숭이를 손을 저어 쫒아냈다. 하지만 원숭이도 원숭이 나름대로 오기가 생겼는지 또다시 건드리는 것이었다. 나에겐 안그러더니 왜 세야놈한테 저러지;; 탁!! 세야놈은 조금 짜증이 났는지 이번에는 좀 세게 뿌리쳤다. " 끼이익!!!! 끼익!!!!!!!!" 그러자 세야를 건드리던 원숭이는 화가 났는지 소리를 내지르며 세야놈에게 덤벼들어 약간 긴 듯한 놈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 이 원숭이 놈이!!!" 놈은 자신에게 덤벼든 원숭이에게 드디어 화를 내며 휙 낚아채서는 주먹질을 하려다가 차마 맞으면 사람도 한방에 쓰러지는 무기를 날릴순 없었는지 방향을 바꾸어 꿀밤을 때렸다. 3 살짜리 어린애의 체구를 가진 원숭이는 세야의 손에서 발악을 하다가 꿀밤을 맞고는 끼익! 하고 소리 지르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 풉.....크...크흣....푸하하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 아...아흐...푸하하하하!!" "........" 결국 그걸 다 지켜보던 나는 또다시 터져버린 염병할 놈의 웃음보를 억누르지 못하고 그대로 쏟아부었다. 이;; 이러면 안되는데;;; 분명히 세야 저놈이 날 죽이려 들텐데;;;;; 푸..푸핫!! 그래도 웃기는걸;;;; 아무래도 안되겠다;;;;; 죽어도 좋으니 일단 웃고보자;;; 한바탕 웃고 난 나는 이제 슬금슬금 후환이 두려워졌다. 자신을 보고 웃은 나를 이놈이 가만 둘리가;;; 없는데;;;;;;;; 예상대로 놈은 매우 굳어진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내리꽂히는 놈의 시선을 피하고는 조용히 도망친 원숭이를 원망하며 다가올 주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놈의 주먹이 다가오지 않자 나는 의아해졌다. 헤에;; 안 때리나 보네;;;; 놈의 표정은 굳어있긴 했지만 그뿐 나에게 아무런 짓도 않했다. 요새 와서 놈이 꽤 착해졌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이젠 신경끄고 살기로 한건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후자라면 왠지 씁쓸하다. 맞으면서 정이 들었달까;; 아앗;;! 내가 매저키스트도 아님에야 녀석에게 맞는게 즐거울리는 없지만... 그간 봐온 녀석의 모습들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저 놈 언제까지 여기에 있으려는거야;;; 제길;; 덥지도 않나;;;;; 나는 곧 밖으로 나가기위해 일어서려다가 세야놈이 있다는걸 의식하고 머뭇거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세야놈보다 훨씬 먼저 탕에 들어와 있던 나는 점점 달아오르는 몸과 뜨끈한 수증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머리가 어지러워 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고 놈이 있는데 떡하니 내 알몸을 보여줄 정도로 철판을 깔은 것도 아니었고 힐끔하니 바라본 녀석은 절대 나갈 생각을 안하는 것 같다;;; 나는 꾹 참고 버텨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놈이 나가면 곧바로 나도 후딱 뛰쳐나가는 거다. 하하;; 까짓거; 약간 어지럽긴해도 버티면;; 그러나.. 5 분.........10분....... 13분...... 14분..25초........ 제...제기랄!!!! 저새끼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거야!!!! 쓰벌!! 이럴줄 알았으면 아래에 타올 한 장이라도 걸치는 건데!! 어이구!! 이러다간 버티기도 전에 쓰러지겠다!! 벌써 혈액순환이 잘되고 몸의 피로가 풀리는 권장량의 입욕시간은 까마득하게 지났다. 이쯤되면 혈액순환이고 뭐고 그대로 인간백숙 신세가 될지도 몰랐다. 아니;; 이 온도에서 이만큼 버틴거면 충분히 위험할 지경이다. 결국 참다 참다 못한 나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정말 어렵사리 마음먹고 놈앞에서 철판깔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탕의 물은 뿌연 우유빛이었기 때문에 하체를 가려주고 있었다. 그런데....막상 일어나는 순간 눈앞이 핑글 돌더니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제...기랄...... 역시 너무 오래 담그고 있었던 거야................ 풍덩!!!!!!!!!!!!! 희미해져가는 정신사이로 놈의 다급한 외침이 들린 것 같았다. 아아.......이런........바보같은.... 정신이 들어 눈을 떠보니 낯선 방안이었다. 늘 보던 벽지가 벗겨진 우리집 천장이 아니라 깔끔한 베이지색의 벽지가 아늑한 느낌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여기가...어디? 아.... 나 수학여행 왔었지 참....... 그러다가 문득 또다른 기억이 떠올라서 흠칫했다. 나.. 분명히 그때 녀석앞에서 쓰러지지 않았었나? " 정신이 들었냐?" 어쩐지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고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 아...여기가.." 그제야 나는 내가 배정된 방이 아닌 다른 방에 누워있다는 걸 인식했다. 옆에는 가볍게 캐주얼차림으로 차려입은 담임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 어떻게 된거냐? 세야 녀석이 정신을 잃은 네녀석을 안고 헐레벌떡 내방으로 오는데 깜짝 놀랬다. 급히 모셔오신 의사선생님 말을 들어보니까 탕에 너무 오래앉아 있으면 그렇게 된다고 하더군. 푹쉬면 괜찮아 질거라고 하긴했는데... 어쩌다가 이지경이 되도록 탕에 들어가 있었냐? 너 거의 하루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어." 질책하는 듯한 담임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차마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쪽팔리게 쓰리... 다른 사람한테 알몸을 보여주기 싫어서 오기로 눌러앉았다가 이렇게 된거라고 어떻게 떠벌리겠나. 그저 입 꼭 다물고 가만히 있는 수밖에;; 잠깐! 설마 그렇다는 것은? 놈은 이미 쓰러진 나를 안고왔을 때 내 볼거 못 볼거 다봤다는 거 아닌가? 이;;;;;이런 떠그럴;;; 내가 뭣 때문에 그 난리를 피운건데;; 어차피 이렇게 될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눈딱감고 나가면 좋았을 것을;; 뭐하러 버팅겨서리;;; 젠장!!! 젠자아아앙!!! " 흠...그래도 당해서 온게 아니니 다행이랄까..." ;;; 방금 이상한 소릴 들은 것 같은데......설마; 잘못들었겠지. 내참.. 한번 쓰러지고 나니 정신이 허한게..아이고;; 평소에 체력좀 키워 놓을걸. " 승하 너 몰랐는데 안경 벗으니까 사람이 몰라보게 달라 보이는데 그냥 안경 안 쓰고 다니는건 어떠냐?" " 예에?" 나는 뜻밖의 소리를 듣고 잠시 머뭇했다. 아.. 안경!! 어쩐지 깨어나도 시야가 약간 흐리하더라니;;; 안경을 놓고 왔구나. 잠깐;;; 나는 잠시 목위로 덮여져 있는 이불을 보며 무서운 생각을 했다. " 저... 선생님..........." 나는 제발 아니길 빌며;; 아니;; 절대 그래서는 안되었다. " 왜 그러냐? 뭐 필요한거라도 있어? 갔다줄까?" 꽤 자상하게 챙겨주는 담임에게 나는 어떻게 말해야할지 머뭇거리다가 결국 말해버렸다. " 지금도.............알몸인 채로 누워있는 겁니까?" 지금 얼굴은 민망해서 온통 붉어 졌을꺼다. 겨우겨우 용기를 짜내 물어보긴 했지만;; 이렇게 민망하고 쪽팔릴데가;;;;; 아무리 같은 남자라지만;;; 그렇다지만;;;;;; " 아...그렇구나. 네 옷이랑 속옷은 깜박하고 못 챙겼는데. 그땐 워낙 사정이 급해서말야.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진마라. 네 알몸은 나하고 세야 그리고 잠시 진찰하러 다녀가신 의사양반 밖에 못 봤으니까 별로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어. 세야놈이야 어차피 나중에 또 볼테고." 선생님까지 포함한 세명을 제외한 다른 사람은 못봤다는 말에 안도하긴 했지만;; 마지막의 그말은 뭡니까;;;;;;; 설마하니 내가 세야놈이랑 또 다시 같은 탕에서 알몸으로 마주 할꺼라는 그런 무시무시한 소리가 어디 있습니까아아!! 악담도 그정도면 수준급이라구요;; 누구 때문에 이꼴이 됬는데! 담임은 핸드폰을 들어올리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아 난데.. 승하녀석 속옷이랑 겉옷좀 챙겨와라. 여기 몇호인진 네놈이 더 잘 알지? 얼른와라. 이녀석 일어났다. 빨리 안오면 그냥 먹어버린다." 뭘 먹는 다는건진 모르겠지만 담임은 이상한 말을 하고는 플립을 닫았다. 두근.....두근......... 설마 방금 건 전화........그거...............;;;;;;;; 벌컥!!!!! 통화가 끝나고 얼마 안있어 방문이 난폭하게 열렸다. 거기에는 뛰어온 듯 씩씩거리는 세야놈이 내가 챙겨온 옷가지들을 들고 서있었다. 놈은 히죽 웃고 있는 담임을 노려보더니 이내 나를 보고는 인상을 굳혔다. 씨잉;;; 저놈은 맨날 나만보면 저렇게 인상을 구기냐;;; 그렇게 보는 것도 아니꼬운건가;; 아니지;; 아니꼽겠구나; 나 때문에 괜히 심부름까지 왔는데...쩝;;; " 호오.. 일찍 왔네? 조금만 더 늦게 와도 먹을 수 있었는데." 도대체 뭘 드신다는 겁니까! 주변에는 먹을게 아무것도 없었다. 설마 나몰래 따로 꿍쳐둔 쿠키라도? 에에;; 이놈의 정신은 또 엉뚱한 것에 쏠렸네;; " 그럼 난 나가볼테니 승하 넌 옷입고 세야 너도 너무 괴롭히진 말고." 담임은 살벌하게 노려보는 세야녀석을 뒤로한채 방문을 닫고 나갔다. 그대로 방안에는 녀석이랑 나만 남겨져서 엄청 뻘쭘한 상태가 되었다. 더군다나 나는 알몸이고 저놈이 챙겨온건 내 옷가지;;; 제길;;; 입으려면 저놈이 나가던지 해야하는데;;;;; 이게 뭔 일이라냐;;; 이놈의 수학여행;;; 첫 시작부터 안좋더니 정말 되는 일이 없군;; " 빨리 입어." 그나마 어색한 정적을 깨며 놈이 내 옷가지들을 던져 주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알몸인 나에게 옷도 직접 가져다주고 입으라고 던져준 것 까진 다 좋았는데... 왜 자꾸 뚫어져라 쳐다보는거냐! 고개 돌려 자식아! 사람 무안하게 쓰리 계속 쳐다보면 내가 철면피도 아니고 어떻게 맘놓고 옷을 입을 수 있겠냐고;;; " 저기. 미안한데 잠깐 밖으로 나가주면 안되냐;;; 하하...." 멋쩍게 웃으면서 말하자 놈은 한참동안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이렇게되면;; 괜히 힘내서 말을 건 것도 다 의미 없어지지 않는가;;;;; 사람 말을 뭘로 듣는거야; 저자식;; 나가래두! 에비!에비!! 나는 억지로 끌어올린 미소를 접을수도 없이 얼간이처럼 그 상태를 유지해야했다. " 식당에 가서 밥먹어야 하니까 빨리 입고 나와." 다행히도 억지로 끌어올린 입매가 경련을 일으킬 마지막쯤엔 놈이 알아서 나가주었다. "... 떠그럴.......옷 한번 제대로 못입게 후까시 잡고 있기는;;;" 나지막하게 읇조린 후 놈이 다시 들어올까봐 후딱후딱 속옷이고 뭐고 꿰어 입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와서 밥을 한번도 못먹었는데... 제길;;; 본전뽑고 가야하거늘 이렇게 쓰러져서 아까운 하루를 절로 홀라당 날려먹었구나.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있으려구;;; 으이구 아까워라;;;;;;; 쳇;; 옷을 다입고 문밖으로 나가자 세야놈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말은 나와 같이 식사하겠다는 뜻이었나? 그.....랬나? " 뭘 멍하니 있어. 빨리와." " 어....응? 나랑 같이 먹으려고?" 커헉! 이 무슨 바보같은 말이냐;; 설마하니 진짜 나랑 같이 먹으려고;;; 기다린건가? " 너 때문에 나도 아직 식사 못했어. 그러니까 빨리와." 세야놈이 식사 못한게 왜 내책임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묻튼 꿀리는 것도 있고해서 얌전히 뒤따라 갔다. 식당안은 사람도 별로 없고 꽤 한적했다. 시간을 잘 맞춰서 왔다고 해야하나? 나는 테이블에 앉아서 차려지는 음식들을 바라봤다. 우리 학교가 이 호텔과 통째로 계약을 했기 때문에 별말이 없어도 학생들이 보이면 그때그때마다 식탁을 차려주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곧 나는 맛탱이가 갈 뻔봤다. 내 앞에는 그 무시무시한 세야놈이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식탁위로 올라온 싱싱한 바닷게를 보고는 그만 감동먹어 버렸다. 이게 바로 그 바닷게!!!!!!!! 젠장... 너무 맛깔스럽게 생겼잖아. 아아.. 반질반질한 등껍데기하며.... 저렇게 멋진 붉은 빛깔의 게라니! 나는 그만 놈의 앞이라는 것도 잊을만큼 감격에 빠져 바닷게를 먹기 시작했다. 맛있어! 입안에서 살살 녹아!! 결론은 오길 잘했다!!!!!!! 훗카이도는 엄청 좋은 곳이구나!! 하루정도 굶고 나니 뱃속에는 뭐든지 쑥쑥 잘도 들어갔다. 아....좋다! 좋아!! 먹고 죽은 놈은 때깔도 곱더라고 이미 나는 황홀경에 빠져서 주변을 신경쓸 틈이 없었다. " 아... 잘먹었다." 어느새 빈 그릇들을 보니 뿌듯한 마음이 들어서 절로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피식... 난데없이 흘러나온 웃음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두리번 거렸더니 맙소사!! 놈이 웃고있었다. 비록 크게 박장대소를 하진 않고 그저 입꼬리를 올리기만 한건데... 눈을 뗄 수 없을만큼 멋있었다. 나는 어쩐지 저 천인공노할 녀석에게 마음을 주는 여자애들이 이해가 될듯도 싶었다. 아니...아니지;;; 같은 사내놈이 여자애들의 마음을 덩달아 이해하면 어쩌자는 거냐;;;;;;;; 두근.............두근............................ 이...이 미친;;;; 진정해. 진정하자구.. 유승하. 잘생각해봐. 저놈은 나와는 하늘과 땅 코끼리와 개미만큼이나 차이가 나는 사이라고;; 진정한 프롤레타리아인 내가 저런 부르주아 녀석의 미소를 보고 반응하면 어쩌냔 말이다;; 거기다가 나는 사내놈. 저놈도 사내놈;;; 같은거 달고 태어난 주제;;;;; 지금 이러면 안되는거지;;;;;;;;;;; 아하하하;;;;;;;; 나는 냉정히 놈과 나의 간격을 재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그래.. 저놈과 나는 결코 같은 생활권을 공유할 수 없다고... 괜히 밥좀 같이 먹고 다른애들과 마찬가지로 수학여행을 왔다고 해서 착각하지는 말자. 이건 단지 내게 주어진 2박3일의 환상일 뿐이야. 수학여행이 끝나는 마지막 날 나는 다시 단칸방에 들어가서 밀린 부업거리를 해내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아묻튼 고단하게 살아갈 몸이고 저놈은 삐가번쩍한 집에서 귀하게 모셔지는 도련님이고.... .. 그래...그런거야... 쳇! 무슨 생각을 한거냐? 유승하... 식사를 다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녀석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아무말도 없었다. 벌써 또 하루가 지나가는 건가... 이제 하루 남았구나. 아니... 실제로 치자면 하루도 못되는 거겠지? 마지막 날은 짐을 꾸리고 다시 고단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테니까. 한숨을 쉬며 세야놈보다 먼저 앞서 걸었던 내가 방문을 열었을 때였다. "!!!!!!!!!" 방안에는 5명의 사내놈들이 내 가방을 뒤지고 있었다. 저 얼굴들은 모두 잘 알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평소에 몰려다니면서 나를 열심히 갈구던 녀석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 뭐하는 짓이야!!!!!!! 그만둬!" 방안에는 놈들이 멋대로 뒤져서 늘여놓은 내 물건들이 흩어져 있었고 놈들은 빙글빙글 얄미운 시선으로 내가 달려드는 걸 쳐다봤다. 내 뒤를 따라 들어온 세야놈은 놈들을 보더니 인상을 굳힐뿐 아무말도 안하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놈들은 세야놈을 발견했지만 아무런 제지를 안하는 걸 보고 더욱 기고만장해서 떠들었다. " 이런 씹새! 누가 거지 아니랠까봐 어디서 이런 구린것들만 챙겨온거냐." 참자...... 저런 놈들은 굳이 상대할 가치도 없어. 결코 내가 약해서 그런게 아니라 어울리는 그 자체가 더러운거다. " 야야! 얌생이 울겠다. 그만해라. 뭐... 더럽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참아줘야지 어쩌겠냐? 빌어먹고 사는것도 서러울텐데 안그러냐? 거지에겐 동정을 내려야 하는법!" .... 참자............그래....참아...........참는거야. 별거 아니잖아? 한두번 이런것도 아니고 말야. 그래....참자........ 나는 조용히 방안에 흩어진 물건들을 배낭안에 쓸어담다가 멈칫했다. 없다...!!! 없.........어? 없어!!!!!!!??? 쓸어담던 물건속에는 내가 찾는 단 하나가 안보였다. 방안 어디에도 그건 없었다. 나는 미친 듯이 배낭속의 물건을 꺼집어냈다. 있어야 하는데... 있어야 하는데!!! 내가 갑자기 물건을 쓸어담다 말고 다시 격하게 배낭을 뒤집는걸 보며 방안의 놈들이 놀란 눈초리로 쳐다봤다. " 어디있어!!!!!!!!! 어디에 뒀냐구!!!!!!!!!!" 나는 결국 없어진 물건에 대한 분노로 뒤덮여 앞에 보이는 한놈의 멱살을 잡고 마구 소리쳤다. 멱살을 잡힌 놈은 안색이 파래지며 말했다. " 뭐...뭘...말야!! 난 아무것도 안했어. 그저 네 가방안을 훓어본 것 밖엔 없다고.." 놈이 겁을 먹었는지 더듬으며 말했지만 나는 그놈을 바닥에 내리치고 방안에 있는 다른 녀석을 훓어봤다. "... 내.............놔....빨리 내놔!!!!!!!" 그때 평소 나를 제일먼저 나서서 갈구던 놈이 입가를 미끄러뜨리며 뭔가를 눈앞에서 흔들었다. "!!!!!" " 이거 말하는 거냐?" 놈이 들고 있는건 조그만 보석함이었다. 내가 찾고있던 물건! 어머니가 남겨주신... " 사내새끼가 계집애마냥 이딴 거나 들고 다니다니. 씨발. 좆나 역겨운데?" ".. 돌.......려줘..........빨리.....빨리 돌려줘.....좋은말 할때 내놔............" " 이야~ 얌생이 무섭다? 응? 사람 한대 치겠는데? 여기 뭐 그리 대단한 물건이 들어있길래 뻗대는거야?"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참아.......참아야해............좋게 끝내자. 굳이 이런 허접한 도발에 넘어가서 일을 벌일 필요도 없어.. 좋게........그래... 좋게 끝낼 수 있다........ " 마지막으로 말한다. 빨리 내놔.." 내가 기분이 최저로 치달으며 씹어내듯 말하자 보석함을 들고 있던 놈은 한순간 움찔하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봤다. " 하....! 누..누가 그런다고 겁먹을 줄 아냐? 얌생이면 얌생이답게 구석에 처박혀서 구슬이나 꿰메고 있을것이지 어디서 눈을 치켜올려! 이게 그냥 콱! 아항~! 그러고 보니 더 궁금한데? 이 안에 무지 중요한게 있나보지?" 놈은 이미 겁먹었다는게 다 나타났지만 끝까지 아니라는 듯 오히려 소리쳤다. 그리고는 눈 깜짝할 새였다. 놈이 보석함을 바닥에 던진 것은.. 보석함은 충격을 견뎌내지 못하고 안의 내용물을 내뱉어 버렸다. 더불어 안에 들어있던 어머니의 흑백증명사진과 함께 조그만 플라스틱 큐빅반지가 데구르하고 바닥을 굴렀다. 놈은 바닥에 떨어진 사진을 주워 올리더니 비웃으며 말했다. " 뭐야? 이딴게. 마마보이였냐? 얼씨구? 이게 너네 엄마냐? 헤... 꽤 이쁜데? 한몸매 했겠어. 몸이라도 팔았나?" 그와 동시에 나는 이성을 잃고 놈에게 주먹을 날렸다. 지금 이순간 중요한 것은... 놈은 내가 제일 아끼는 물건을 함부로 굴렸다는 것과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를 모욕했다는 것. 그것 뿐이었다. 이후에 부잣집 아들놈에게 나같이 가난하고 적어도 그들 눈에 있어선 별볼일 없어 보이는 녀석이 주먹질을 해서 일어날 일들 따윈 별 상관없었다. 저놈은 나의 어머니를 모욕했다. 내가 아끼는 물건을 내던졌다. 그거면 충분해! " 죽여버릴거야!!!!!!!!!!!!!!! 더러운 쓰레기 자식!!!!!! 죽어! 이 씹새꺄!!!!!" 내 평생 이렇게 격분해서 온갖 욕을 쏟아 부으며 사람을 팬 날이 있었던가? 이렇게 이성을 잃어가면서까지 덤벼든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맹세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에게 맞고 있는 놈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나머지 4명에게 빨리 떼어놓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내가 평소 세야놈에게 얻어맞고 다녀서 그렇지 나는 결코 약한게 아니었다. 나는 나에게 덤벼드는 놈들을 모두 걷어차며 주먹질했다. " 쓰레기 새끼들!!!!!!!!!! 더러운 손으로 만지지마!! 구역질 나는 입으로 말하지 말란말야!!!!!" " 씨발! 이새끼 진짜 미쳤나본데? 어떡해!" 그때 한놈이 떨어진 증명사진과 플라스틱 큐빅반지를 집어 올렸다. " 미친새끼! 이딴거 가지고!!!!" 나는 주먹질을 멈추고 놈이 들고있는 사진과 반지를 멍하니 쳐다봤다. 놈은 그것들을....... 나의 소중한 것들을 구석에 있는 라이타를 집어 올리고 태우려했다. 퍽!!!!!!! 어느새 놈들이 내 뒷통수를 가격했지만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 안돼!!!!!!!! 건드리지마!!!!!!!!!!!!" 그거.....그 사진은 한 장밖에 안남은 건데.............그나마 단 한 장 남은건데........!!! 그러나 놈은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라이터를 켰다. " 어라!? 너 그 상태로 가만히 있어. 움직이면 이거 태워 버릴거니까." 펵퍽!!!!!!!!! 등뒤로 4명이 일어나서 기세 좋게 발길질을 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놈은 태워버릴 기세로 라이타의 불꽃을 움직였다. " 너 이새끼 아까 잘도 날 때렸겠다!!!!!!" 나에게 맞아 코피를 흘리던 놈이 내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고개가 위로 들려진 순간 세야놈과 눈이 마주쳤다. 놈은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 아...........그래.... 저놈은 날 싫어했지.................. 왠지 서운함이 일었지만.......처음부터 녀석과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밥한번 같이 먹고 쓰러진 나를 부축해서 데려다 놨다고 해서... 이런 상황에서 발벗고 나서서 도와줘야 한다는건.......말도 안되는 억지다. 아니 우스운 삼단논법이다. 내가 만들어낸 억지일 뿐이었다. 그래도.............그래도...........................녀석에게 왠지모를 기대감이 들었던건...............나도 드디어 맛이 간건가? 수학여행 마지막 날인데... 정말 최악이로군... 최악이야......아하하.......하............... " 어? 이새끼 자세히 보니까 꽤 예쁘장하게 생겼네?" " 진짜? 이놈 평소에 안경만 쓰고 다녀서 잘 몰랐는데....야! 준일아 이리 와봐." 놈들은 머리칼을 움켜잡고 내 얼굴을 훓어보더니 때리다 말고 다가와서 낄낄거렸다. 라이터를 들고 있던 놈도 궁금했는지 다가와서 나를 쳐다봤다. " 야! 그러지 말고 나 방금 재미난 생각이 났는데 한번 해볼래?" " 뭔데?" 떠그럴... 늬들 대가리에서 나온 생각이 얼마나 대단하시겠냐. 씹새끼들.. 사진이랑 반지만 아니었어도... " 실은 내가 인터넷에서 봤는데 남자랑 남자가 섹스하는거! 그거 끝내주더라. 이 새끼 얼굴도 예쁘니까 한번.." 콰앙!!!!!!!!!!!!!!! 듣기에도 굉장히 역겹고 오싹한 말을 하던 놈은 갑작스런 굉음에 깜짝놀라 소리의 진원지를 쳐다봤다. 놀랍게도 거기엔 세야놈이 엄청나게 인상을 구기며 앉아있었다. " 거기까지 해라." 놈들은 이제까지 관전하고 있던 세야놈이 갑작스레 살벌한 목소리로 으르렁 거리며 제지하자 버벅거리며 말했다. " 아니.. 세야야 내말은 그러니깐 말이지. 이새끼가 하도..." 퍼억!!!!!!!!!!!!! " 아악!!!" 어느새 말을 하던 놈은 세야놈의 주먹을 맞고 바닥에 처박혔다. 그 살벌한 모습에 내 머리칼을 쥐고 있던 놈도 깜짝 놀라서 힘이 풀렸는지 뒤로 물러섰다. 덕분에 나는 그 역겨운 상황에서 풀려나 뒤로 꺾여지느라 제대로 들이쉬지 못한 공기 때문에 기침을 했다. 쿨럭....쿨럭.......... " 누가 내말에 토를 달라고했어? 병...신......" 그러더니 곧 사진과 반지를 들고 있던 놈에게 다가가서 그것들을 빼앗았다. 놈은 그저 세야놈이 가져 가는데로 멍하니 내밀어야 했다. 퍽!!!!!!!! " 헉!!" 라이터를 든 놈은 세야놈의 주먹에 복부를 후려맞고 바닥을 굴러야했다. 내가 저 고통을 잘 알지;; 하도 얻어터져서;;;;;; 아직도 내 몸 안쪽에는 한구석에는 울긋불긋한 멍들이 피어있었다. 놈이 때리지 않은건 약 2주정도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선명하게 남아있는 멍들은 놈의 주먹이 얼마나 매운지 알려주었다. " 기분 잡쳤다. 꺼져라. 한번만 더 내앞에서 얼쩡거리면 다 죽여버린다." 그나마 안맞은 놈들은 세야놈의 말이 끝나자마자 헐레벌떡 밖으로 나갔다. 원래 같은 방을 배정받아 남아있어야 할 두놈들도 모두 나가고 방안에는 놈과 나만이 남았다. 나는 연신 기침을 해댔고 놈은 그런 나에게 다가왔다. " 가져가." 놈이 내밀은 어머니의 사진과 반지...... 나는 그것들을 받아들이면서 태어나서 세 번째로 눈물을 흘렸다. 첫 번째는 내 첫사랑이던 아이에게 고백했던 날이었고.. 두 번째는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그리고 세 번째는 바로 지금...... 이제까지 당해오면서 서럽지 않은 날은 한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눈물 따위를 흘리면 약해지는 것이라 생각하며 무슨 일에서든지 절대 울지 않았다. 가난하다고 무시당해도... 경멸받아도... 절대 나는 울지 않았다. 그런데........그런데.........지금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놈들에게 맞은거야 앞에 서있는 이놈한테도 평소에 많이 맞았으니까... 별 상관 없었는데... 떨어져서 어긋난 보석함도 다시 맞추면 되는 것이었고... 어디에도 내가 울만한 이유따윈 없는데... 그런데...단한가지 내 앞에 놈이 건내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나를 제일 싫어하는거 아니었나? 그래서 입학식 때부터 줄곧 나에게 주먹질을 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왜 하필 이런 상황에서 네 놈이 이렇게 다정한거냐! 빌어먹을......나는 쪽팔리게 왜 눈물이나 질질 짜고 난리냐고! 정말 미쳐버렸나? " 왜......왜..나를 도와준거야.....?" 꾸역꾸역 눈물이 흘러나오고 목소리가 떨리긴 했지만 나는 창피를 무릅쓰고 놈에게 물었다. 왜 나를 도와준건지... 왜 갑자기 이렇게 상냥한건지... "...... 잊지 않았으니까.." ".. 뭐?" 놈의 뜻밖의 대답에 나는 울음을 멈추고 녀석을 쳐다봤다. 마주본 녀석의 눈동자가 정말 따뜻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어서...... 순간 가슴이 쿵하니 울렸다. " 그 반지 소중한거냐?"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싸구려 플라스틱 큐빅반지를 쳐다봤다. 이미 빛바랜 초록색 큐빅이 박혀있는 때묻은 반지였다. " 지구 방위대 특공 땅의 반지....라고 하면 알 수 있겠어? 헤헷...이거 결혼반지야." 약간 놀란듯한 녀석의 얼굴을 보며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언제 또 돌아서서 내 뒷통수를 때릴지도 모르는 놈이었지만 그냥 말해주고 싶었다. 눈물 한바가지 흘려놓고 나니까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물러진 것 같았다. " 어렸을 때 아주 좋아하던 애가 한명 있었어. 지금 생각하면 어른스럽고 침착하고 무지 예뻤던 여자애였는데 이름은 잘 기억이 안나.. 왜 그런진 잘 모르겠어. 그 아이는 자주 내 이름을 불러줬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거든. 그 애는 평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가져다 줬어. 꼭 그게 아니더라도 난 분명히 그 애를 좋아했을거야. 왜냐면 정확히 기억할 순 없지만 이거 하나 만큼은 확실해. 엄청 다정하고 사랑스러웠어." 세야놈은 묵묵히 내말을 들어주었다. 나는 마음이 편해져서 계속 주절거렸다. 눈깔사탕도 안사먹고 돈을 모은 이야기.. 떨리는 마음으로 그 아이에게 고백했던 것, 의외로 그 아이가 나의 고백을 거절한 것... 엄청 밉쌀스러운 녀석이 한명 있었는데 그놈은 만나면 항상 그 아이를 끌고 어디론가 갔다라는 둥의 사소한 이야기까지 모두 털어놓았다. " 고백하고 난 바로 다음날에 이사가버리다니.. 나도 운이 없었지;; 헤헷..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물한 반지가 결혼반지가 되어버렸어. 나중에 다시 만나면 꼭 결혼하기로 약속했는데.. 음... 그애는 날 기억할지 모르겠다. 하아.. 어쩌다가 너에게 이런 얘기까지 하게 된건지...." 나는 이야기를 마치고 헤죽 웃어보였다. 녀석은 아무말 없이 창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녀석의 귓불이 빨개져 있었다. 나는 내 얘기가 그렇게 당황스러운 것이었나 하고 되짚어 보면서 영문도 모르고 고개를 갸웃했다. " 어라? 그러고 보면 나를 그렇게 좋아한다고 했는데 왜 시집오지 않는다고 한거지? 뭐.. 나중에 결혼약속까지 다 하기야 했지만......음.........이상한 점도 있구나. 아무렴 뭐 어때. 다 어릴적 이야기인걸. 그 애는 모두 다 잊어 버렸을걸?" 이 무렵 놈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괜시리 무안해졌다. 내가 뭐 잘못말했나; 아... 사내녀석이 어릴때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이렇게 떠드는것도 별로 보기 좋은건 아니려나? " 만약에...그 아이가 너를 잊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건데? 그...결혼 약속도......" 불쑥 물어오는 녀석의 질문에 나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 물론! 받아 들일거야. 왠지 그애는 지금의 내 모습을 알고도 나를 좋아해줄 것 같거든. 음...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거의 확신하고 있어. 아마도 나 역시 그 아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거야. 왜냐면 그만큼 많이 좋아하고 지금도 좋아해." 씨익~ 자신있는 어조로 말한 나는 한번 씩하니 웃었다. 터프하게 멋진 모습으로 웃고 싶긴했지만 나도 내 신체조건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무리없는 모습으로 웃었다. 반지와 사진은 보석함속에 다시 고스란히 들어갔다. 이야기를 다 마친 우리 둘은 더 이상 아무말 없이 각자 남겨진 두 대의 침대위로 올라갔다. 마침 두놈이 헐레벌떡 나갔기 때문에 인원수는 맞았다. 나는 처음으로 침대에 누워 자볼 수 있었다. 음.. 침대는 정말 푹신푹신 하구나. 헤에... 그날 꿈속에는 왜 그런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한숨소리와 함께 따스하고 다정한 손길이 머리맡에 느껴진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훗카이도에서의 지독했지만 어떤면에서는 나름대로 의미있는 마지막 밤을 보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번 훗카이도로 떠난 수학여행은 좋지 않은 기억들도 많이 남았지만 그래도 세야놈과 그렇게 얘기를 나눈건 처음 이었기에 나름대로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물론 녀석이야 어쩌다 하룻밤의 변덕으로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비밀을 공유했다는건 그닥 나쁘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수학여행 마지막날을 이후로 여전히 나와 놈의 사이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늘 그랬듯이 서로간에 말 한마디 없고 놈이 수업을 들을때 나는 부업에 열중한다. 아니.. 조금 달라진게 있다면 나를 쳐다보는 놈의 눈빛이 예전과는 사뭇 많이 다르다. 좀더 따뜻하고 부드러워졌다고 해야하나? " 자자! 모두 잘들어. 이제 곧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다. 수학여행도 다녀오고 몸이 많이 나른해진건 잘 알겠지만 이미 지난 일에 연연해서 성적이 내려가는건 너희들도 원치않겠지? 이제 대학입시가 1년하고도 몇 개월 안남았다. 생각이 있는 녀석들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공부하리라 믿는다. 뭐.. 잔소리는 이정도로 해두고 열심히들 하라구! 이상! 반장 인사해라." 깔끔하게 조례를 마무리한 담임은 씩하니 웃어보이고는 나갔다. 아... 시험이 있었지. 제기랄......그러고 보니 그때 담임이 신세를 갚으려거든 성적이나 올려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지금와서 사양한데 봤자 이미 수학여행은 다녀왔고... 그렇다고 빚지고 사는건 영 성미에 맞지 않는데... 으윽.....어쩔 수 없지...... 그날 부터 나는 죽자사자 공부에 매달렸다. 이왕 신세 갚는거 화끈하게 갚아보자는 나의 신조에 따라 그야말로 한동안 부업에서 손을 떼고 집중력을 되살려서 눈에서 불똥이 튀어오를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무슨 일인지 세야놈도 수업시간에 공부하는 것과 동시에 쉬는 시간까지 활용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반의 서로 다른 의미로 아웃사이더인 우리 두사람이 이렇듯 나란히 공부를 하자 반아이들은 의아해 하면서 나름대로 위기감을 느꼈는지 자신들도 열심히 공부했다. 물론 제깟 놈이 공부해봤자 얼마나 하겠냐고 비웃으며 뒷다마를 까기도 했지만 나는 무시하고 그저 꾸준히 책을 보면서 공부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대망의 시험이 다가왔다.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하루빨리 시험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시험을 얼른 마쳐야 나도 가볍게 머리를 털어내고 부업에 다시 매진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약 2주정도 부업을 못해서 오는 경제적 타격이 꽤 컸기 때문에 남들은 하루라도 더 늦춰졌으면 하는 시험기간을 나는 하루라도 더 빨리 다가오길 기다리며 이때껏 공부했다. 그리고 드디어 3일간의 시험으로 나의 노력이 빛을 발할 때가 온것이다!! 라는 것은 순전히 내 망상이었고 어차피 잘 봐도 그만 못 봐도 그만인 시험이었지만 담임의 말이 마음에 걸려 오기로라도 잘 봐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3일간 시험을 모두 끝마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함성을 질렀다. " 우와아아아아!!!!!!!!!!!!!!!!!!!! 드디어 부업개시다!!!!!!!!!!!!!!!!!!!!!" 기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한 부업에 열을 올리며 거진 일주일이 다 되가던 무렵이었다. " 시험결과가 나왔다." 담임의 말에 교실은 한바탕 술렁거렸다. 어떤 아이는 울상을 지었고 어떤 애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 성적표를 나눠주기에 앞서...한가지 알릴게 있다. 우리반에서 상상치도 못한 엉뚱한 두 사람이 매우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다." 담임의 말에 아이들은 어리둥절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대체 누가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다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없었다. " 먼저 1등을 발표하겠다. 1등은 오혜윤! 혜윤이는 전교에서도 1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박수!" 짝짝짝짝!! 담임의 말에 머리띠를 찬 귀여운 여자애가 일어나 당황해하며 성적표를 받아들고 자리에 앉았다. " 자...주목해라! 이번 2등은 정말 특별하니까." 담임이 빙긋웃으며 강조하자 아이들은 궁금하다는 듯이 담임의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 우리반 2등 역시 전교에서 2등이라는 멋진 성적을 거두어 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이 2등은 앞서 말한 두 사람이 나란히 공동 2위를 차지했다." 두근.....두근.............. " 계세야! 유승하! 두 사람 다 일어나." "!!!!!!!!!" 이런!!! 말도 안돼!!!!!!!!!!! 내가 2등을 했다고? 더군다나 옆의 이녀석과 같이? 반쯤 정신을 못차리고 엄청 놀란 표정으로 일어나자 담임이 씨익 웃었다. " 두 사람 다 신세보답은 칼같이 하는군. 전교 2등이다. 축하한다!" 엉거주춤 서있는 나와 무표정으로 일관한 세야놈.. 미소짓는 담임과 나만큼이나 충격을 먹었는지 얼이 빠져있는 아이들...... 세상은 요지경이었다;;;; 내가 멍하니 담임을 쳐다보자 그는 성적표를 내밀었다. 나는 설마 담임이 성적표를 잘못 본게 아닌가 싶어 다시금 확인했지만.... 정말 놀랍게도 전교 2등이라는 숫자가 잉크로 찍혀있었다. " 말도 안돼! 어떻게 쟤가..." ".......... 찍어서 맞춘거 아냐? 그렇지 않고서야.." 하긴.. 나도 안 믿어지는데 어떻게 저애들이 믿을 수 있겠는가. 나와는 달리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놈도 나름대로 성적표를 쓰윽하니 훓어보는 듯 싶었다. 피식...... 그러더니 어느 순간 만족스럽게 웃는게 아닌가!? 계세야를 몰래 흘끔흘끔 쳐다보던 아이들은 물론이고 나까지 얼이 빠져서 놈을 쳐다봤다. 왕....왕멋지다!!!!! 단지 그것밖엔 할말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계속 생각했다. 솔직히 내가 2등한 것은 어느정도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일이 우습게 되버렸지만 어쨌든 나도 입학할때는 전교 2등이라는 성적을 거두었으니까... 그건 그렇다쳐도... 반등수 43의 세야놈이 전교 2등을 한건 정말 하늘이 개벽할 노릇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세야놈의 본래 등수를 몰랐기 때문에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딱 한번 놈의 성적표를 볼 수 있었던 나는 놀랠 수밖에 없었다. 불공평하다... 불공평해... 그 자식은 얼굴도 몸매도 멋지고 집안도 좋은데다가 단하나 나보다 꿀리던 공부도 이번 시험을 통해 거뜬히 뛰어넘었다. 나와 공동으로 2등을 했다고 쳐도... 놈은 단 한번에 뛰어오른 것이었다. 평소에 놈이 공부하는걸 보면 어째서 하위등수를 얻는지가 더 이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한번에 오르다니! 그렇게 생각한 사람은 유독 나 하나뿐은 아니었나보다. 다만 그 화살이 엉뚱한 사람에게 꽂힌게 문제였지..;; " 야! 유승하. 잠깐 우리좀 보자." 막 골목길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뒤에서 앙칼진 여자애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 쳐다보니 전에 나를 골탕먹인 희정이라는 아이한명과 함께 어울려 다니며 뒷다마까던 여자아이들 몇 명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서있는 놈은........ 전에 한번 지나가다 골목길에서 얻어 터지는걸 내가 구해줬던 바로 그 덩치 큰 녀석이었다. 물론 놈은 기절해서 잘 몰랐겠지만...... 나는 얌전히 나좀 보자는 여자애 앞으로 걸어갔다. " 아무리 생각해도 안되겠어서 말야. 나보다 성적도 나쁜 찌질이가 갑자기 그렇게 성적이 오른게 말이 되니?" 떠그럴... 말이 되지 그럼 안되나?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점수 맞았다는데 왜 안 믿어주는 건지;;;; " 희정이 말이 맞아! 네 점수를 우리가 빤히 다 아는데 말이 안되잖아!" " 솔직히 말해봐. 너 컨닝했지?" 나는 기가막혀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여자들이 점점 더 너무하네. 나는 막무가내로 밀어 붙이는 여자애들에게 질려서 인상을 찌뿌렸다. " 이봐...이봐들.......그건 너무 심한 비약인거 같은데?" 내가 아연한 표정으로 말하자 여자애들은 더욱 독이 오른 목소리로 말했다. " 비약이라니? 우리말 어디가 비약이니!? 네가 우리반 1등인 오혜윤 걔 뒷자리에서 시험본건 지나가던 개들도 다 알아!! 그런데 우리가 눈치 못 채길 바라는 거야말로 비약아니야?" 그러니까 무슨 눈치냐고... 한마디로 내가 그 오혜윤이라는 아이를 컨닝했다...뭐 그런 뜻인가 본데.... 내 참....... 이제는 점수를 잘 맞아도 이 난리로구만.. 쩝... "....... 하아...맘대로들 생각하라구.....난 컨닝은 안했으니까 말야." " 뭐야!? 이 찌질이가 정말! 좋은말로 하면 말귀를 못 알아먹는가 본데..... 상열오빠! 지금 얘가 내가 전에 말했던 그놈이야. 오빠가 좀 손좀 봐줘. 도대체가 말로 해서는 안되겠어." " 아아~ 희정이 니가 말한 그 찌질이 놈이 이새끼냐? 씨발! 뭘 꼴아봐!? 썅! 희정이 니 말대로 한번 손좀 봐줘야 쓰겄네 이거.. 상판도 비리비리헌게 깝치긴 어따 대고 깝치고 난리야!" 어라.. 이 형씨... 그때 흰놈한테 얻어 맞은거 다 나았나보네? 이렇게 쌩쌩한걸 보니... 어쩐지 저 계집애들이 남자를 대동하고 온것도 그렇고 다 믿는 구석이 있었구만.. 쓰읍... 허이구....화내자니 여자애들은 함부로 때리지 않는게 내 신조이기도 하고.. 우선 앞에 보이는 이 덩치녀석부터 어떻게 해결을 해야할텐데... 그러고 보니 대뜸 욕하고 소리치는게 별로... 변한건 없는가보네 쩝;; "...... 저...........그냥 조용히 넘어가면 안 될까요? 저 여자애들도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고.. 전 형님께는 별 감정이 없는데....." 나는 최대한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거기다가 이왕이면 좋게좋게 해결하자는 취지 하에 최대한 완곡한 표현을 골라서 말했다. 이 바닥에서 살아가려면 우선 내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고 상대의 비유를 맞추는것도 꽤 중요했다. 화난다고 겉으로 드러내서 감정을 표출시키는건 그만큼 능력이 있는 놈이거나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그저 자기통제를 할줄 모르는 애송이일 뿐이다. 나야 애송이 단계는 애저녁에 지났고 그렇다고 내 능력에 자신이 있어서 나대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대처할 뿐이지... " 상열오빠! 설마 저 말을 듣고 우리 부탁을 거절하는건 아니겠죠? 우리가 그동안 상열오빠 패거리랑 함께 어울려다닌 것도 다 뭣때문인데!" 전에 주아인가? 했던 여자애가 소리쳤다. 그녀의 말투 속에는 상열패거리인가 뭐시깽이가 힘만 없었더라면 자신들이 상대해 줬을 것 같냐는 비꼼이 묘하게 들어가 있었다. 뭐... 저 덩치는 알아채지 못한 것 같지만...... " 알았어! 걱정마. 내가 이새끼 확실하게 조져놓는다. 그러니까 주아는 이 오빠만 믿고 계속 같이 다닐꺼지?" 켁..... 머리 나쁜건 그렇다쳐도.. 저건 기둥서방 꼬락서니 아닌가? 이보쇼 형씨... 제발 덩치에 걸맞게 놀란 말입니다아아~! 보는 사람 다 서럽게쓰리;;; 그리고.. 그 촌스러운 말투라니;;;;; 우웩..........!!! " 유승하. 한번 더 물어볼게. 여기 있는 사람이 누군지 네가 모르고 나대는 것 같은데 상열오빠는 성문고 일진짱이야. 너 따위는 쥐도 새도 모르게 밟아 놓을 수 있어. 우리가 좋게 말로 할때 빨리 실토해. 너 혜윤이 시험지 몰래 컨닝한거 맞지? 사실대로 인정하면 우리도 선생님께 말씀드리는 선에서 끝낼게." "......." 협박... 이라는 건가? 맞기 싫으면 사실이든 아니든 인정하라는 얘기? 하! 웃기는군. 나 유승하. 이제까지 못먹고 못입고 자라긴 했어도 이런 더럽고 치사한 방법에 굴해본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내가 이제까지 계세야 놈에게 맞으면서 한번도 놈에게 빌지 않았던 이유가 그것이었고 반 아이들의 유치한 짓거리에 앓는 소리 한번 내본적 없는게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뭘 모르는가 본데.......이젠 맞는거엔 이골이 나서 말이지... 겨우 이정도 협박이 통하리라 생각했던건 오산이라구. 나는 더 이상 말로 해서는 이 상황이 풀리지 않을걸 직감했다. 이럴땐 그저 무시하고 내 갈길 가는게 최고다. 컨닝? 하...... 이젠 별 시덥잖은 이유를 대서 사람을 몰아가는 건가? 웃기지마! 난 뛰어나. 원래부터 뛰어났다구! 누가 누구걸 봤다는거야! 난 원.래. 잘난 놈이야. 단지 가난할 뿐이라구. 하다못해 내가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났다면 네까짓 것들 상대나 될줄 알아!? 썩을......나보다 요리도 못하는 것들이... 나보다 빨래도 쥐뿔 할줄 모르는 것들이... 너희들이 나보다 더 목걸이를 잘 꿰어? 너희들이 나보다 더.... 더 잘하는게 대체 뭐가 있어!? 그저 난 가난할 뿐이야. 다 잘났는데 하늘이 시기해서 조금 안좋은 환경에서 자라났을 뿐이라구!! 에이~!!씨!! 생각하니까 더 열받잖아!! 너희들 오늘 다 죽었어!!!!!!!! 라고 외친뒤 모두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았다. " 이게!! 끝까지 사람말 무시하네!!" 말이 말같아야 상대를 하든지 말든지 할꺼아냐 이~씨!!! 조용히 무시로 상황을 정리하고 돌아서려 했건마는 덩치가 열받아서 주먹을 날리는 바람에 발걸음을 멈추고 날아오는 주먹을 피해야했다. 내가 덩치의 주먹을 아슬아슬하게 피하자 덩치가 더욱 열이 올라서 덤벼들었다. 썩을!! 왜 조용히 살려고 하는 나를 세상은 가만두지 않는단 말이냐!! 성문인가 뭐시깽인가의 일진이라는 녀석답게 그 육중한 몸과는 걸맞지 않는 꽤나 빠른 속도의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 때 흰놈의 손에서 우습지도 않게 깨졌던 모습과는 달리 엄청난 싸움실력을 가지고 있는 듯 싶었다. 그럼 그때 이런 덩치를 어린애 다루듯 가볍게 휘두른 그 흰놈은 도대체가!!? 내가 맞을 듯 말 듯 하면서 아슬아슬하게 피해다니자 덩치는 나를 한방에 때려눕히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던 생각이 어긋났는지 황소 콧김을 내뿜으며 발차기를 시도했다. 싸우다가 힐끗하고 바라본 여자애들도 학교에서 계세야놈에게 맞고만 다녀서 빌빌거리는 내가 의외로 한대도 맞지 않고 버티자 놀랬는지 지들끼리 술렁거렸다. " 뭐...뭐야 쟤. 쟤 정말 유승하 맞아?" " 어머..왠일이야... 저 얌생이가...... 쟤 의외로 날쎄다?" " 너희들 도대체 생각이 있는거야 없는거야? 지금 손봐줘야 할 놈한테 감탄할때야!? 우리가 온 목적도 잊어버린건 아닐테지?" " 아...아니 희정아. 우린 그저.. 물론이지! 저런 찌질이 따위....어우! 상열오빠는 뭐야. 정말 일진짱 맞아? 저런 찌질이 하나 쓰러뜨리지 못하고말야!" 갈수록 빗발치는 여자애들의 야유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덩치는 나에게 주먹을 날리다 말고는 여자애들에게 돌아섰다. 나는 그틈에 숨을 몰아쉬었다. 제길... 저 덩치 장난 아니잖아. 내가 조금만 더 실력이 약했더라면 진작에 뻗었을 것이었다. 어쩌니 저쩌니 해도 세야놈에게 줄곧 얻어 맞으면서 익힌 움직임 덕분이었다. 그 괴물딱지 같은 놈의 공격을 피할 도리가 없다는걸 깨닫게 되자 최대한 타격이나 줄여보자는 생각하에 방어하는 움직임을 터득한 것이었다. 속도와 타격 둘 중 어느것 하나 범인을 초월하는 엄청난 괴물딱지가 바로 계세야였기 때문에 지금의 덩치도 꽤 대단한 상대임에는 분명했지만 계세야와 비교하자면 턱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벅차긴 하지만 조금은 수월하게 방어할 수 있었다. 나의 공격면이야 어떨진 잘 모르겠지만...방어만은 왠만한 녀석들이 와도 끄덕 없을거라 장담할 정도였다. 맞으면서 터득한........방법이랄까? 뭐..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세야놈만 빼면 다른 놈에게 맞을 일은 거의 없을 것 같았다. 그 대표적인 일례가 바로 지금 덩치와의 싸움에서 나타났다. " 어머! 상열오빠 도대체 뭐하는거야!? 왜 얌생이랑 싸우다가 이리로 와? 오빠 정말 일진짱 맞아?" " 닥쳐 이년아!!" 갑작스레 터져나온 덩치의 반응에 되려 희정이라는 여자애가 말하다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떨었다.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내쪽에 좀더 유리한 상황으로 돌아가지 않나 싶어 은근스레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기도 했다. " 뭐...뭐야!! 상열오빠 왜이래? 지금 나보고 소리친거야?" " 이 씨발년이 보자보자 하니까 누구는 박터지게 싸우는데 뒤에서 응원은 못할망정 일진짱이 어째? 야 이년아. 얼굴도 못생긴게 돈좀 많아보여서 오냐오냐 했더니만 이젠 내가 우습게 보이냐!? 엉!? 썅! 존나 좆같은 년이네." " 뭐라고!? 상열오빠 미쳤어? 지금 누구보고 이러는 건지 알아!? 내가 누군지 모르고 이러는 거냐고! 나 우희정이야! 시한그룹의 외동딸 우희정!! 오빠가 나한테 지금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애? 오빠 머리만 나쁜줄 알았더니 이젠 눈까지 삐었어? 빨리 가서 저 찌질이나 해치워! 오빤 내가 시키는 데로만 하면 되! 그러면 오빠가 좋아하는 오토바이도 사주고 술값도 내주고 꺄아악!!!!" 희정이라는 아이는 그렇게 오만하게 성을 내며 말을 하다가 기어코 덩치에게 머리채를 쥐어잡혔다. 내가 생각해도 그녀가 내뱉은 말은 도가 지나친 내용이었으므로 내심 덩치의 행동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 이 쌍년아! 뭐? 니가 시키는 데로만 하면 되? 네년이 이제까지 시킨일들 중에 제대로 된게 한개라도 있었냐? 씨발 드러워서 그깟 오토바이랑 술값 필요없어. 네년은 얼마나 잘났길래 다른 년들이랑 달리 그 지랄인가 어디 한번 좀 보자. 똑같이 눈 코 입 다 있고 가슴달린게 누굴 호구로 알고!!" 덩치는 도중에 희정이라는 아이의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머리채를 잡혀 있었으므로 꽤 차려입고 나온 그녀의 꼴은 꽤나 볼썽사나웠다. " 꺄아아아!!!!!!!!!! 뭐하는 짓이야!!!!!!!! 이거 손 못치워!?" " 씨발! 니년꺼는 어디가 얼마나 다른지 좀 구경좀 하자는데 왜 자꾸 앙탈이야!! 이깟거 좀 만졌다고 닳아? 엉!?" " 너!! 너희들 뭐해! 빨리 이 미친새끼 떼어내!! 빨리!!!!!! 꺼져!!!! 손 치워!!!!! 꺄아아아!!!!!!" " 희...희정아!!!" " 어떡해!!!!! 누구 도와줘요!!!!!! 어떡해 어떡해!!" 희정이라는 아이의 째지는 비명소리에도 그녀의 친구들로 보이는 여자아이들은 직접 나서지는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나를 어찌해 보려다가 되려 당하게 된 그 희정이라는 아이는 덩치의 행동에 거의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쳤다. 쫘악!!!!!!!! " 이년이! 가만 안있어? 어디 그 시한그룹 외동딸인가 뭔가 네년은 얼마나 다른지 한번 해보자고!!" " 꺄아아아아아악!!!!!!!!!!!" 나는 그 희정이라는 몹시 괘씸해져서 그냥 지나칠까 했지만 덩치의 행동이 도를 넘어가는 듯 싶어 나를 해치려했던 상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약한자는 도와줘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떠올라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어머니를 정말 존경하지만 하고 많은 말씀중에 왜 하필 그런 말씀을 하신건지요.. ... 후우.........덕분에 제가 요모양 요꼴로 살고 있습니다아아아......으윽........... 퍼억!!!!!!!!! " 악!!!!! 뭐야 이 씹새끼가!!! 그냥 봐주려고 했더니만!!!!!!!" " 꺄아악!!! 어흑...흑... 엄마아아......엉엉......" 희정이라는 아이의 상의가 벗겨져서 브레지어가 언뜻 언뜻 보이는 찰나에 주먹을 날려서 덩치의 행동을 겨우 멈췄다. 여자애들은 그저 꺄악이나 어떡해!! 라는 둥의 별 쓸모없는 소리들만 지껄이면서 희정이라는 아이를 둘러쌌고 그녀는 큰소리로 울었다. 하늘 높은줄 모르고 나대다가 벌어진 일이었으므로 그다지 위로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행동을 방해받은 덩치의 보복을 막아내는게 현재로써는 더 시급한 일이었다. " 이 씹새끼가 그냥 고이 보내주려 했더니만.. 야! 저년이 너 해치우라고 한거 못들었어? 가만히 찌그러져 있으면 알아서 보내줬을텐데 왜 끼어들어! 이새끼야!" 나는 그런 덩치를 보며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 저 여자애들도 맘에 안들긴 하지만 형님이 방금 하신 행동은 좀 심하신 뎁쇼?.. ... 흠흠......무엇보다 우리는 아직 고등학교에 다니는 파릇파릇하고 순수한 청소년으로써 희망차고 건전한 길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하하.......하........" 나의 힘찬 연설에도 불구하고 덩치의 안면이 더할 나위없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무슨 호러영화 찍자는 것도 아닌데 왜 저런 표정을 짓는건지....... 이미 여자애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희정이라는 아이를 데리고 달아난 후였다. 그 아이들이 경찰형씨들에게 찾아가 이 곳의 위치를 알리는 둥의 기특한 행동을 할리는 절대 없을 것이므로 이제 나는 혼자서 저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돌진해오는 덩치와 장엄하게 맞서야 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평범한 스쿨라이프는 언제가 되야 가능하다는 거냐!!.... 가뜩이나 이것저것 신경쓸 일도 많은데! 에...이씨!! " 이 개새끼가 얌전히 보내줄려고 했는데 정신이 쳐돌았나!! 위 아래도 모르고 깝죽거리긴 왜 깝죽거려! 이 씨방새가!!" 아무래도 덩치는 내게 매우 열받은 것 같았다. 흠....나 때문에 일도 못보고 여자애들은 이미 도망가 버렸으니...화가 날만도 한거겠지만..... 크흠......;;; 하지만 지금의 내 실력으로 저 덩치놈과 맞붙을 수는 없었다. 죽자사자 덤벼들면 승률이 아예 없는것도 아니겠지만 그랬다간 내일 학교는 못간다. 적 어도 개근상은 타보자~! 라는 취지하에 나는 침을 꼴딱 삼켰다. " 이 새끼가 어디서!!" 덩치의 주먹이 날아들었지만 나는 특유의 민첩함으로 피해냈다. 그리고는 덩치의 공격이 실패하여 생겨난 허점을 놓치지 않고 그 사이로 달려들었다. 덩치는 당황하여 팔을 내리려고 했지만 나는 그 사이를 가뿐히 지나면서..... " 야! 이 빌어먹을 새꺄! 잘있어라! 나는 간다!" 36 계 줄행랑을 놓았다. 자신을 공격할 줄 알고 타격을 줄이기 위해 방어자세를 취하던 덩치는 내가 어이없게 달아나자 뒤늦게야 정신을 차리고 뭐라뭐라 욕설이 가득한 윽박을 질렀지만 나는 이미 두 번째 골목길로 접어든 상태였다. " 헉.....헉....헉....위험했다." 그 얄미운 계집애들 때문에 내가 이게 무슨꼴이라냐? 사랑하는 공주를 위해 희생하는 기사가 아니라 미워하는 마녀들을 위해서 희생된 꼴이라니... 나는 연신 투덜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덜그덕.....다 낡아빠진 문을 열고 들어온 나의 작은 단칸방. 반겨주는 사람도 없지만 '다녀왔습니다'라고 나지막하게 읇조려 보았다. 하루종일 돌아다녀서 그런지 배가 무지 고팠다. 그나마 작게 내어 있는 부엌으로 다가가 밥통을 열어보았지만 텅텅 비어있었다. 쌀독을 열어 쌀이 있나 확인해 보아도 이미 밑바닥을 보이는 상태였다. " 아아....새로 또 쌀을 사와야 하는건가?" 한동안 시험철이었기 때문에 부업에 손도 대지못한 나로써는 그만큼의 수익이 사라진 것이 었기 때문에 주머니 사정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배고픈건 어쩔수가 없는데............제길;; 어쩔 수 없지. 덕기네 슈퍼에 가서 외상이라도 받아 와야겠다. 한숨을 푸욱하고 내쉬며 나는 지친몸을 이끌고 밖을 나섰다. 구불텅....구불텅.... 여기저기로 이어진 골목길을 지나자 슈퍼라기는 약간 민망한 구멍가게가 하나 보였다. 뭐...구멍가게든 뭐든 일단은 간판에 '슈퍼'라고 달려있으니 덩달아 나도 슈퍼라고 지칭하고 있지만.... 비좁은 가게안으로 들어가보니 러닝구 차림에 파리채를 들고 가게안에서 휘휘 휘두르는 정구아저씨가 보였다. " 너 여기에는 왠일이고?" 정구 아저씨가 들고 있던 파리채를 내려놓고 허리를 북북 긁으며 말했다. " 왠일은 무슨 왠일이에요? 기껏 발들여 놓았더니." 부루퉁한 나의 말에 정구아저씨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휘휘 둘러보더니 한 마디 했다. " 네 녀석 비누 한 장 사는 돈도 아끼려고 매일 40분씩 걸어서 마트까지 댕긴 놈 아니가? 그런데 오늘은 어쩐일로 여기에 들린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하는 말이제." 나는 정구아저씨의 대꾸가 모두 사실이었으므로 멋쩍게 뒷통수만 긁적였다. " 오늘은 마트까지 걸어갈 힘도 없어요." " 아니 왜? 다른건 몰라도 니 깡따구 하나만은 여기 사람들 모두 인정한거 아이가? 그런 네놈이 도대체 얼마나 큰일을 당했길래 마트까지 걸어갈 힘도 없다고 허는기가?" 나는 정구아저씨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 뭐...별일은 아니었지만 꽤 힘들었거든요......저기....그보다 쌀 있어요?" 정구아저씨는 더 캐물으려다가 나의 물음에 입맛을 쩍 다시고 말했다. " 어이구. 네 녀석이 그러면 그렇제. 난 또 무슨 바람이 들어서 여기로 찾아왔나 했네. 에라! 이눔아!!" 순간 파리채가 날아오더니 내 머리통을 강타했다. 따악!! " 으윽!! 갑자기 왜 때려요!! 내가 뭘 어쨌다고!?" " 시끄러워 이자슥아! 마트에서 쌀 외상 해준다더냐!?" "........." 작고 비좁은 구멍가게와는 달리 눈치만큼은 칼같은 정구아저씨의 말 한마디에 나는 입만 비죽거릴뿐 더 이상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이왕 외상 해줄거면 곱게 해줄것이지 꼭 이럴 필요까진 없지않은가? 내가 파리야? 뭐야!? 하지만 아쉬운 쪽 또한 내쪽이었으므로 정구아저씨의 횡포에도 찍소리 못하고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정구아저씨는 어기적 거리며 바가지를 들고 쌀포대 앞으로 걸어나갔다. 아저씨는 까만 비닐봉지 한 장을 뜯으며 말했다. " 얼마나 퍼담아 줄까?" 나는 아직도 아린 머리통을 부여잡으며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 세 바가지 퍼주세요. 외상값은 다음주에 드릴게요." 정구아저씨는 혀를 끌끌 차더니 쌀 세바가지를 검은 비닐 안으로 퍼담으셨다. 그러더니 한바가지 조금 못 되게 더 퍼담으시는게 아닌가? " 에엑? 아저씨. 세바가지만 달라니까요." 따악!! 이번에는 바가지가 내 머리통에 날아오면서 다시 한번 내 머리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 또 왜 때려요! 내 좋은 머리 다 상하면 어쩌려구.." 그러자 정구아저씨의 표정이 요상하게 굳으면서 떨떠름한 목소리가 들렸다. " 이....이자식아. 마지막 한 바가지는 덤이다. 그 뭐다냐... 써....써비쑤? 인가 뭔가..... 아묻튼 우리 덕기슈퍼도 써비쑤한다 이거야!" 자랑스럽게 서비스를 된발음으로 말하는 정구아저씨의 폼이 우스웠지만 차마 면전 앞에서 대놓고 웃을순 없었다. 거참 이 양반도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란 말야. 내가 비실비실 웃자 정구아저씨는 더욱 크게 말했다. " 마! 우리 덕기슈퍼도 쌀이든 과일이든 파뿌리든 써비쑤 팍팍 하니께 많이 와라잉! 알겄나?" 나는 쌀이 담겨 두툼해진 비닐봉투를 들어올리고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 예....예.....자주 올테니 써비쑤나 팍팍 해주세요. 그럼 다음에 보자구요." 일부로 아저씨의 된발음에 맞춰 말하고는 가게를 나섰다. 덤으로 쌀 한바가지를 거저 얻게된 나의 기분은 그야말로 날아갈 듯이 기뻤다. 정구아저씨가 내 사정을 생각해 줬음이 여실히 들어나는 두툼한 검은 봉다리가 원래의 무게와는 달리 매우 가볍게 느껴졌다. 한참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골목길 안으로 막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붙들지만 않았더라면... " 잡았다!! 이 쥐새끼 같은놈!!" 전혀 낯설지 않고 되려 익숙하기 까지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역시나 덩치자식이었다. 퍼억!!!!!!!! " 아욱!" 나는 갑작스러운 덩치의 기습에 당해 배를 움켜잡고 쓰러졌다. 그 때문에 손에 들고 있던 비닐 봉지가 떨어지면서 길바닥에 쌀이 흩어졌다. 주르르 쏟아져 나온 쌀들이 보이자 나는 온몸에서 열이 뻗쳐올랐다. 이.....이 죽일놈이!! 내가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자 덩치는 자신의 주먹이 무서워서 그러는 줄 알고 더욱 큰소리로 윽박질렀다. " 이 새끼야!! 당장 고개 안처들어? 씨발. 사람 물먹이고 도망치면 내가 못찾아 낼 줄 알았냐!? 이 개새끼!!" 덩치는 그대로 나의 멱살을 들어올렸다. " 안경이나 낀 범생새끼가 감히 나한테 개겨!? 이 좆만한 새끼가!!" 이봐......이봐......아까부터 자꾸 무서운 소리만 하는 것 같은데......으득.... 개기긴 누가 개겼다고 그러는가? 일방적으로 시비를 걸어온 주제에!! 그리고 네놈은 177cm의 좆이 있다는 소리 들어봤어!!? 이 썩을놈이!! 퍼억!!!!!!!!! 그러나 내몸은 또 다시 덩치에 의해 땅에 내던져 나동그라진 상태였다. 주위에 흩어진 쌀들과 점차 뻗쳐오는 화가 내 안에서 혼합되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 그만 해....요.." 나는 최대한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이까짓 폭력쯤이야 얼마전까지 늘 당해오던 것이었고 흩어진 쌀들이야 도로 주워담아서 깨끗이 씻어내면 그럭저럭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씹을 때마다 모래가 씹힐지도 모르겠지만... 문제는 이 덩치가 나를 놔주지 않고 끝까지 붙들고 늘어질 경우였다. 한두대 얻어맞는거야 그간의 맷집으로 어느정도 참아 넘길 수 있겠지만 다시 한번 말하자면 나는 내일 학교에 가야한다. 내가 고등학생인 이상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변하지 않을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이다. 이것을 전제로 내가 가장 염려하는 점은 계속 이 상태를 유지할 경우 혹여라도 내가 이성을 상실하고 폭팔해서 지랄발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 뭐야!? 니가 뭔데 나한테 그만하라 마라야! 약골새끼가!!" "..........." 바닥에 내동그라진 몸뚱이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덩치가 잽싸게 다가와 그런 나를 세게 걷어찼다. 첫 번째 공격에 이어 두 번째 덩치의 주먹을 맞았을때 데미지가 매우 컸으므로 놈의 세 번째 발차기도 막아내지 못한채 고스란히 맞아야 했다. 투콱!!!!!! " 으욱!!!.....쿨럭...........쿨럭....." 사정없이 날아드는 덩치의 발차기에 나는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빠각!! 참다못해 내뻗친 나의 주먹이 덩치의 정강이에 직격으로 들어갔다. 덩치는 단발마를 지르며 잠시 움칫했지만 내 주먹은 역시나 역부족이었는지 곧 씩씩거리며 달려들었다. " 이 새끼가!!!" 차라리 여기서 그냥 콱 튀어버릴까? 이 덩치와 계속 이런식으로 나가면 당연 불리한건 내쪽이었다. 그러나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정구 아저씨가 특별 서비스로 한바가지 더 넣어준 쌀들이었다. 저것들이 없으면 한동안 나는 밥을 굶어야했다. 우리학교는 저녁이 되면 학원이니 과외니 해서 빠져나가는 아이들이 거의 대부분이었으므로 야간자율 학습이라는 개념자체가 아예 없었다. 그 덕에 나도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었지만 문제는 아침과 저녁이었다. 저녁이야 야간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때 그때 대충 떼울 수 있었지만 한동안 시험기간 이었으므로 사정을 말하고 나가지 않고 있던 나였다. 그러므로 결국 점심 빼고는 내손으로 자급자족을 해야할 상황이었던 것이었다. 학비마련을 위해 적금을 들고 있었으므로 수중에 남는 돈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해서 외상까지 해온 쌀이었는데!!! 퍽!! 퍽!!! " 헉.....헉.....이새끼!! 상대도 안되는게...." 최악.....정말 최악이다. 내 인생이 그닥 꽃들이 만발한 봄날은 절대 아니었지만 쥐구멍에도 볕들날이 있다는 말이 있거늘.... 이건 볕은커녕 연기를 지펴서 질식하기 일보직전이다. 도대체 내 인생의 태양은 언제 뜬다는 말인가!? 덩치는 한동안 그렇게 나를 패더니 힘에 부쳤는지 침을 탁 뱉고 말했다. " 아...씨발!! 한번만 더 내눈에 띄면 죽여버린다!! 별 그지같은게...." 촤아악!!!! 덩치의 발길질 한번에 쌀알들이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 덩치가 가고 난 후에도 나는 한동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손으로 입가를 훓어보니 피가 묻어나왔다. 빌어먹을.... 계세야 그 녀석은 적어도 얼굴은 안 건드렸는데. 입안이 터진 듯 싶었다. " 으...윽!!!"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비틀거리면서 신음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이정도로 무너지진 않는다. " 하악....하악........." 숨을 몰아쉬며 주위에 흩어진 쌀들을 다시 비닐봉지 안으로 그러모아 집어넣기 시작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날 듯이 좋았던 기분이 한순간에 추락했다. 내가 그놈과 싸울줄 몰라서 그런게 아니야...... 내가 그놈보다 약해서 그런게 절대 아니야....... 내가 그놈보다........제기랄!!!!! 정말 제기랄이라고...............!! 다음날 아침 학교에 가기위해 옷을 입던 도중 보게된 낡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란... 굳이 말로 설명해주지 않아도 '나 어디가서 한 대 쥐어터지고 왔소.'라는 걸 시위하기라도 하듯 볼이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고 교복도 너덜너덜해진채 그대로 다시 입혀져 있었다. 내가봐도 정말 한심하고 처참해 보이는 꼴인데 이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래도 세야놈은 엄청나게 쥐어팼지만 적어도 뼈마디 같은 곳은 되도록이면 피해서 때렸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 녀석도 꽤 나름대로 배려했던 건가? 평소의 몸상태보다 훨씬 악화되버린 나는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학교에 나갔다. 드르륵......... 교실문이 열리자 아이들의 시선이 한순간 나에게로 모아졌다. 원래의 등교시간 보다 훨씬 늦어버린 나는 마침 조례시간 이었는지 담임의 시선까지 마주쳐야 했다. " 너....승하 아니냐? 도대체 왜 이렇게 늦은.....이런..........." 담임은 지각해버린 나를 책망하려다가 나의 꼴을 보고는 말을 멈췄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용했던 장내가 술렁거리면서 점차 복잡한 소음들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 그만!! 모두 조용히 해라!! 승하 너는 여기보다 양호실이 더 급할 것 같군. 세야 네가 이리와서 이 녀석을 부축하고 양호실로 가봐!!" 윽..!! 왜 하필 계세야 녀석을...... 물론 저놈과 나 사이에 꽤나 많은 진전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불편한건 매한가지인데.........이런....젠장... 세야놈은 기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더욱 싸늘한 느낌의 무표정을 지어보였다. 놈은 아무말 없이 묵묵히 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를 부축하고 양호실까지 가라는 선생님의 지시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일까? 역시 녀석과 나의 거리감은 좁혀질 수 없는 평행관계였던 거였나.... " 아....아니요. 선생님 저 혼자서도 충분히 갈 수 있습니다. 그다지 부축받을 필요까진 없는데요......." 솔직히 이꼴로 집에서 50분거리인 학교까지 걸어온 나이기도 했으므로 그다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 세야놈의 냉기 풀풀날리는 어깨에 기대어 갔다간 못해도 스트레스성 위장염에 걸릴 듯 싶었다. 아니면........예전처럼 놈이 나에게 주먹을 날린다거나....... 전자는 그렇다 쳐도 후자는 정말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도 80% 그러느니 차라리 나 혼자 가고 말지. " 무슨 소리야! 승하 너! 지금 그 꼴을 하고 어떻게 혼자 가겠다는 말이냐!? 바보같은 소리 말고! 세야 너는 어서 저 녀석을 부축해!" 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담임의 강경한 어조에 나는 그만 얼떨결에 세야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나는 입술을 꽉 물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는 했지만 교실 밖으로만 나가면 세야놈과 떨어져서 가겠노라 다짐했다. " 반장은 애들을 조용히 자습시키고 있어라. 나는 잠시 어디 좀 들리마." 술렁거리던 반 분위기는 담임의 한마디로 잠잠해졌지만 나는 교실문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도 여전히 막막했다. 어떻게 세야놈과 떨어져서 걸을 수 있을까.... 아무래도 직접 말하는게 낫겠지? 하지만 말할 기회는 좀처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걸어서 계단 모퉁이로 다가섰을 때였다. 삐끗...!! " 아윽!!" 순간이었다. 복잡한 생각들 때문에 잠시 한눈을 팔다가 다리를 삔 것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았다. 가뜩이나 몸상태가 나빴으므로 이런 조그마한 충격에도 쉽게 무너지는 듯 싶었다. 발목을 살짝 건드려보니 시큰시큰한 통증이 엄습했다. 이....이런...........하필 이런 때에 발목을 삐다니. 슬쩍 고개를 들어올리니 세야놈이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여전히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므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 저...저기 너는 그냥 먼저 교실로 돌아가. 나는 괜찮으니까......."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를 만들어 내기는 했지만 실은 눈물이 찔끔할 정도로 아팠다. 입에서 나오는 말과는 달리 발목은 정말 빌어먹게도 아팠다. ".. 그래? 하나도 아프지 않은 모양이지?" 세야놈의 무뚝뚝한 물음에 나는 그렇노라 대답하려고 했다. 놈이 자신의 발로 내 발목을 밟지 않았다면...... " 아악!!" 단 한순간이었지만 매우 큰 통증이 밀려들었다. 더불어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지만 발목의 통증은 가실길이 없었다. " 이래도 아프지 않아?" 지끈..........지끈.................... 왜...? 도대체 왜!? 알아서 피해주려고 해도 너는 어째서 이렇게 나를 건드리는 것인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기애애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높이 올라갔었던 놈에 대한 호감이 한순간 깎여 내리는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놈을 노려보았지만 놈 역시 매우 가라앉은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 먼저...가..........나는 어떻게든 혼자 갈 수 있으니까." 결국 나는 억울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짧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네 놈이 나를 보기 싫어한다면 내가 알아서 피해준다는데 도대체 뭐가 불만인거냐! 제길... " 그 몸으로 어떻게 계단을 걸어서 양호실까지 갈 생각이지? 발목도 그 지경이 되어서 말야. 개처럼 기어서 가려고 그러나?" ".....!!!!!" " 네가 심하게 발목을 접질렀다는 것 정도는 알 고 있어. 일어서지도 못하는 주제 어떻게 양호실까지 찾아간다는 거냐........" 뭐라고 반박할 말을 생각하려 했지만 세야놈의 말은 구구절절 다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 그...러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네 말이 맞다해도...............너는........." 주위에는 눈씻고 다시 봐도 너와 나밖에 없는데 네 녀석은 나와 함께 있는 것조차 싫어하는 주제에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고!! " 도와달라고 빌어.." ".... 뭐...........?" " 나에게 도와달라고 빌라고..." 나는 순간 내 귀가 잘못들은게 아닌가 의심을 했지만 놈의 두 번째 말에 확실히 들었다는 걸 알았다. 도와달라고 자신에게 빌라는건가..........? "... 싫어......" 누가.....누가 네녀석 따위한테!!! 나는 뭐 자존심도 없고 뭣도 없는 줄 알아? 내가 개새끼냐!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게!! 죽어도 안빌어! 이대로 집까지 못간다고 해도 좋으니까!! 치사한자식!!! 이딴걸 빌미로 협박할 줄 밖에 모르는 형편없는 놈이었나!? 꾸욱....... " 아아악!!!!!" 그러나 세야놈은 나의 대답에 싸늘한 눈초리로 비웃음을 짓더니 곧바로 내 발목을 지긋이 내리 밟았다. 저.....정말 아팠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질 정도로..... " 어디 언제까지 버티나 두고 볼까?" 미.....미친!!! 이런 개 싸이코 자식!!! 같은반 급우끼리 친하게는 못지내도 적어도 서로에게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게다가 나는 몸상태도 안좋단 말이다!!! "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유치하다고 생각해?" 꾸욱......... " 아흐윽!!!!!!!아윽!!!!!" " 그런데..........내가 보기에는 네 녀석도 만만치 않게 유치하다고 생각되지 않나?" 이렇게 비명이 새어나가고 있는데도 어째서 아무도 나오지 않는거야!!! 그리고 미친놈! 내 어디가 유치하다는 거야! 나를 네 녀석 따위와 비교하지 말란 말이다!! "... 큭.....!! 네 표정을 보니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가 본데........." 세야놈은 방금 전의 무표정이 무색할 정도로 자신의 화난 감정을 마구마구 얼굴 위로 드러내며 하던 짓을 멈추고 내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냥 다가오는 정도가 아니라 점차 얼굴까지 가까워지는 것이 아닌가!? ".........!!!!!!!!" 놈과 나의 입술사이가 약 3cm가량을 남겨놓고 다가왔을 때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이....이자식이 돌았나? 왜 갑자기...!! 가까이에서 놈의 고른 숨결이 느껴졌다. 순간 나는 등뒤로 식은땀이 흐르면서 말도 안되게 빨라진 내 심장 박동수를 들어야 했다. 너무........너무 가깝잖아!! "... 네가 왜 유치한 건줄 알아?" 미.....미친놈! 왜 갑자기 다가와서 헛소리야!! 누가 더 유치한지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봐라! 백이면 백 몽땅 다 네놈이 더 유치하다고 할꺼다!! 하지만 한마디라도 하면 놈과 입술이 닿을 것만 같아서 아무소리도 못하고 이를 악물어야 했다. ".... 사람은 살다보면.........때로는 자신의 처지를 파악하고 상대방에게 고개 숙일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지....... 하지만 너는 그렇지 못하거든.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결코 상대방에게 먼저 고개 숙이는 법도 없지. 안 그래 유승하........? 현재 내가 지닌 유리한 상황을 이용하여 너를 괴롭힌 내가 더 유치한 걸까? 아니면 끝까지 네 잘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고집을 피우는 네가 더 유치한 걸까? 응?" "....!!!!!!" 그....그런........하지만...........너는...........네 녀석은................... " 선택해......나에게 빌어서라도 양호실로 갈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이곳에서 버틸 생각인지...." 세야놈은 어딘지 무게감이 느껴지는 어조로 내게 말을 했다. 나는 여러번 굴욕을 당해왔지만 이번 만큼은 아니었다고 할 정도로 온몸이 수치심으로 달아올랐다. 꽈악.........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두눈을 꼭 감고 내 앞의 놈에게 말했다. " 도.......도와 줘............." 아주 작게 목구멍에서 울려나온 말은 그렇게 세야놈에게 전달되었다. " 제.....제발.......도와......줘.............." 결국 죽어도 하기 싫었던 말을 꺼내며 나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계세야 네 녀석은 언제나 내가 긍지있게 지켜오던 자존심들을 하나하나 모두 산산조각 난도질 해버려.... 그런데도 나는 네놈에게 무릎을 끓을 수 밖에 없어...... 이렇게 눈물이 날 정도로 억울한데도............아무 말도 할 수 없어. ".........." 세야놈은 한참 후에 아무 말도 안하고 그대로 나를 안아서 들어올렸다. 나는 곁에서 부축해주는 정도로만 생각했지 이렇게까지 할줄은 몰랐으므로 매우 놀라 발버둥쳤지만 이내 발목의 통증 때문에 그대로 세야녀석의 품으로 늘어졌다. 사내자식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안겨가는 내 모습이 꼴불견스럽다고 생각했지만 경험상 이 녀석에게 이렇게 안겨가는 것이 꼭 이번 한번만이 아닌 듯도 싶고...... 양호실까지 가는 몇 분 안되는 그 시간이 내게는 매우 길게 느껴졌다. 놈은 내가 무겁지도 않은지 나를 안아들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평소 녀석의 힘이 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정도라니........ 왠지 이 녀석과의 간격이 더욱 벌어진 것만 같아 한숨이 새어나왔다. 달칵...... 양호실 문이 열리고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섰다. 양호실은 흰 벽지에 넓은 공간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아픈 녀석들은 없었는지 한 침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텅 비어있었다. 다른 한 침대에는 왠 사람이 누워있는 듯 싶었지만 나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닥 신경쓸만한 처지는 못되었다. 그보다도 우선 놈의 품에서 벗어나는게 최우선 과제였으니까... " 이제 그만 내려....줘도 되지 않을까?" 나는 정말 개미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녀석의 품에 안겨있는 동안 나는 세야놈의 체취 때문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난생 처음 맡아보는 시원한 느낌의 향이 녀석에게서 베어 나오고 있었다. 대부분의 부잣집 학생들처럼 이 녀석도 비싼 향수를 사용하는가 싶기도 했다. 이정도로 기분 좋은 향기를 가진 향수들은 별로 없을 테니까... 세야놈은 내말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어딘지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양호선생님이 안계셨으므로 나는 그렇게 침대위에 앉아 멀뚱멀뚱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달그락....달그락.......... 어느새 고개를 돌려보니 세야놈이 양호실의 이곳저곳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꽤나 빠른 손놀림을 보아 이곳에 자주 들른 모양이었다. 안 그러면 저렇게 반창고라던지 소독약이나 연고등을 척척 꺼낼 순 없지. ... 에.....? 반창고랑 연고라고? 저녀석이 어디 아픈 것 같지는 않고..........설마......? 그러나 설마할 새도 없이 세야놈은 손에 기타 등등의 것들을 들고 내게 다가오더니 바지를 걷어올렸다. "... 어...어?.." 나는 순간 당황하여 제대로 말도 못하고 놈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치이이이익............ 세야 놈이 들고 있던 스프레이를 내 발목에 뿌리자 약간 독한듯한 파스향이 나면서 점차로 시큰거리던 통증이 완화되는 것이 느껴졌다. " 내...내가 할 수 있는데........" 내가 조그맣게 말도 해봤지만 세야놈은 무시하고 묵묵히 소독약을 들고 내게 다가왔다. " 팔 내놔." "... 으응? ...아...아니 그냥 내가..." 그러나 거절의 말도 하기 전에 녀석은 내 팔목을 낚아채더니 소매를 걷어 올렸다. 나도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는데 팔목과 주변에는 각양 각색의 울긋불긋한 멍들이 나있었다. 썩을놈의 새끼..... 어지간히도 패셨구만. " 누가....이런거냐?" 착각인걸까? 녀석의 목소리가 왠지 떨리는 듯한 것은.... "..... 벼.....별로...........그냥 길가다가 넘어져서.....하하하...하........." 차마 희정이라는 여자애를 도와줬다가 봉변을 당한거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려던 상대방을 도와주고 되려 자기 자신이 당했다는 말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얼간이도 이런 삼류얼간이는 또 없을거다....... 속으로 작게 신세 한탄을 하면서 세야 녀석의 시선을 피했지만 놈은 내 팔목을 꽉 쥐었다. " 으윽....." " 똑바로 말해. 길가다가 넘어져서 이런 상처들이 생긴다는 말은 지나가던 개도 안 믿어. 헛소리 집어치우고 누구야? 네 녀석 이렇게 만든 놈이...." 이 자식 이거 갑자기 왜 이러는거야;;;; 당한 당사자는 난데 왜 네놈이 흥분하는 거냐고! " 그만해. 나 혼자의 문제야. 누구에게 떠들만한...아윽!!!" " 다시 말해봐. 뭐라고 한거지 지금? 내가 알고 싶다고 그랬다. 네가 거부할 이유같은 건 없어. 너는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면 되는거다. 알아들어? 유승하..!?" 순간 놈이 낮게 으르렁 거리면서 나를 직시하자 내 몸은 무언가로 꽁꽁 묶인 듯이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오로지 놈의 시선이 나의 눈에 와 닿으면서 다시 가슴 한켠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칠 뿐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마주치던 시선은 결국 내가 먼저 고개를 돌리므로써 어긋났다. 나는 끝내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올려 쥐어짜듯이 내뱉었다. "......... 왜 내가 너의 말에 순순히 따라야 한다는......거지?" 끝끝내 남아있는 오기로 절대 녀석의 말에 순응하지 않는 나 자신. 솔직히 녀석이 나를 이렇게 만든 녀석을 알았다한들 어찌할 것인가? 왜? 잘했다고 찾아가서 더 때려주라고 말할 참인가? 아니면 함께 손을 잡고 괴롭혀보자고? 놈은 나의 반항섞인 물음에 더욱 살벌한 기운으로 나를 노려봤지만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나에게 있어서는 너나 나를 이렇게 만든 그녀석이나 별반 다르지 않아........알겠어?" 나 자신도 스스로에게 놀랄 만큼 냉정한 어조... 순간 멈칫할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 나도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가? 그것도 바로 이 녀석에게..........? 놈 역시 나의 말에 당황했는지 아니면 화가났는지..... 그 이상 아무말도 안하고 나를 내려다 보았다. 무표정........방금 전 까지만 해도 화를 내고 있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나는 침을 꼴딱 삼켰다. 정작 그렇게 말한 건 나 자신인데........이 녀석의 개같은 성질을 근 1년 반 동안 수없이 봐왔으면서 배짱도 좋지. 유승하.... "....... 달라..." 한참동안 이어지던 어색한 침묵을 깨고 놈이 한마디 내뱉었다. 뭐? 뭐라고 한거야 지금? "... 널 이렇게 만든 그놈과 나는.........다르다...." 나는 당황해서 계속 말을 잇는 녀석을 놀란 눈으로 멀거니 올려다봐야 했다. " 분명히 말해두지만 나는 달라. 그걸 깨닫는건 너 자신이 될 테지만 아직은......기다려야 하는 거겠지......" 한숨 비슷한 어조로 마지막 말을 작게 읇조리던 녀석은 내 앞에 반창고와 그 외의 약품들을 놓아두고 양호실을 나갔다. 화내거나 성질 낼줄 알았는데.........알 수 없는 말만 하고 나간 세야놈의 모습이 자꾸 한쪽 가슴 한쪽을 쿡쿡 찔렀다. "..... 도대체 뭐가 어떻게 다르다는 거야............." 놈이 내게 남긴 수수께끼. 빌어먹을 자식! 이 좋은 머리로도 풀지 못할 요상한 말이나 지껄이고..... 가뜩이나 복잡한 일도 많은데 왜 저 자식까지 나에게 이런 심난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건지........ 아니, 원래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심난한 녀석이었지만..... " 이봐 거기. 방금 나간 녀석 계세야 맞나?" 갑작스레 어디선가 들려온 미성에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녀석과 나 혼자만이 존재하는 공간인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거기에는 다른 사람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침대에 누워있던 녀석인 듯 싶었다. "..... 누구?" 처음 보는 녀석은 꽤나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단정한 이목구비에 키는 나보다 약간 큰 정도였다. 내가 놀라 쳐다보자 녀석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 나? 그냥 지나가는 나그네인데...?" "............." ".... 어? 재미없어? 웃으라고 한번 해본 얘기인데." "....... 상당히..." 재미없다라는 말은 집어삼키고 그 어이없는 녀석을 쳐다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내 주위에는 이런 정상적이지 못한 놈들만 꼬이는건지. 게다가 저런 실없는 놈이라니.........암울하다........암울해... " 너무한 걸? 이래뵈도 한 학년 더 높은 선배인데 말야." 에......? 선배? 저놈이? 어쩐지 같은 학년에서 본 기억이 없는 것 같더라니........ 그런데 나보다 한학년 위라면 고3이 아니던가? 도대체가......고3 수험생녀석이 양호실에서 죽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건가? " 수업은.....안 들어가세요?" 겉은 저래도 일이야 어찌 됬건 한 살 더 나이가 많다고 하니 선배대접은 해줘야 할 것 같기도 한데...... .... 빌어먹을.... 지금 내몸 추스르기도 힘들구만 도대체가 정신적인 스트레스까지....가지가지 하는구만. 아아! 암울하다!! " 걱정해주는 거야? 괜찮아. 담임선생님께 허락맡고 내려온 거니까." 걱정해서 그런건 아니지만....쩝.........달리 할말도 없고. 녀석은 계속 싱글싱글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왠지 거참 부담스럽구만.......... " 어디가 아프...신데요?" 나는 눈물을 머금고 또 다시 한마디 던져야 했다. 암만 봐도 어디가 아파서 내려온 사람 같지는 않은 것 같은데 말이야...... " 흠....글세.............뭐 딱히 아픈곳은 없지만 말이야..........너무 몸을 굴려서 그런가? 허리도 아픈 것 같고 팔목도 뻐근한 것 같고...........수업시간마다 머리도 아픈 것 같고.... 그뿐만이 아니지. 요새는 욕구불만 때문에 하체도 말이 아니라고." ".......... 아.....예......." ..... 미.....미친놈이다!!! 게다가 변태이기 까지하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저런 민망한 말들을 줄줄 내뱉는 것이... .. 게다가 얼굴표정하나 안바뀌고.......... 허우대는 멀쩡하게 생긴 놈이 정신이상자였다니. 나는 그 녀석에게 말을 건 것을 속으로 땅을 치며 후회하고는 뻘쭘하게 미소를 지었다. 녀석 역시 나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 그런데 너 이름이 뭐지?" 빌어먹을....내 이름은 알아서 뭐하게? 그냥 한번 마주치고 말일이지. 설마하니 나중에 찾아와서 아는 척 하는 건 아니겠지? "... 하하...유승하라고 합니다. 선배님." "... 음? 유...승하?" 나는 갑작스레 눈을 가늘게 치켜뜨며 놀란 듯이 되묻는 녀석에게 뭐 잘못말했나 싶어 뻘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네.....유승하라고 하는데요?" " 흐음.......혹시 몇반이지?" " 에?.......2학년 3반입니다만......" 녀석은 한참동안 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주먹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탁 치며 말했다. " 호오......그럼 그렇게 된건가?" 뭐가 그렇게 됬다는거냐! 자기 혼자서 물어보고 자기 혼자서 납득하듯 고개를 끄덕거리던 녀석은 다시 나를 보더니 다시 생글 미소지으며 말했다. " 오래 간만인걸? 예상대로 .......귀엽게 컸네?" "!!?"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거지? 오랜만이라니.........이놈도 그때의 세야녀석과 똑같은 소리를? 단 한번도 본적이 없는 녀석인데........? "..... 무..슨? 죄송하지만 저는 선배님을 만난 기억이 없는데요.............." 왜지? 어째서........나는 녀석들을 모르고 있는데 놈들은 나를 알고 있는거지? 세야놈도 그리고 이 녀석도.... " 이런........그녀석이 아직 안 가르쳐 줬나보네." 뭘? 무엇을? 그녀석은 또 누구고? " 아아. 그런 복잡한 표정하지마. 곧 알게 될테니까. 어쨌거나 우리 세야녀석과 친하게 지내보라고. 꽤......귀여운 녀석이니까." 에에......엑? 우리 세야녀석!? 우리 세야라니...........우리 세야라니..............세상에 맙소사!!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있었던가? 게다가 그 덩치 큰 녀석이 귀엽다고? 무...물론 가끔씩 내눈에도 귀엽게 비춰진 일이 있긴 하지만.........전체적으로 그건 절대! 아니라고! 내가 맛이 간 표정으로 황망하게 그를 쳐다보자 웃는게 취미인지 그 특유의 웃음을 달고 내게 말했다. " 아하! 아직 내 소개를 안했구나. 내 이름은 계세현. 세야녀석의 셋째형이지. 우리집은 다 '세'자 돌림이야. 모처럼 학교에서 만난 아우녀석이 형님을 보고도 알아채지 못한건 서운한 일이었지........ 뭐...그 정도로 격분해 있었으니....그럴 만도 했겠지만....큭..." 패닉!! 왕패닉!! 말도안돼. 이 녀석이 그 세야녀석의 형이었다니. 게다가..........처음 세야녀석과 만났을 때 마주친 패거리들중 한명이 이 사람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던가? 도대체가............뭐가 어떻게 된거지? " 이런 꽤 심하게 다쳤네? 세야녀석 아무리 조급해도 그렇지 이렇게 사랑스러운 친구를 마저 치료해주지도 않고 그냥가다니....너무한걸? 그녀석. 음.... 아우님의 특별한 친구인 것 같으니 내가 마저 치료해주지." 내가 한순간 정신적 공황으로 넋이 나가있을 때 세야 녀석의 형이라던 세현선배가 다가와 반창고와 붕대를 마저 집어들었다. 세현선배의 손이 다친 팔목에 닿았을 때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손을 내저었다. " 아....아니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서둘러 세현선배의 손길을 피해 뒤로 물러서려고 했으나 오히려 손목을 콱 잡고는 놔주지 않으며 말했다. " 괜찮아. 괜찮아. 부담가질 필요는 없어. 아우녀석의 친구는 나에게도 매우 귀여운 동생과도 같은 존재니까 말이야. 특히 너는....... 큭큭..... 혹여라도 내 실력이 의심되는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거야. 이런 상처를 치료하는 것에 한해서는 왠만한 의사 못지않거든. 이래뵈도 그쪽으로는 도가 터서 의사를 지망으로 하는 이과계열 학생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러면서 한쪽 눈으로 찡긋 윙크를 하는 것이 왠지 맥이 탁 풀렸다. 세야녀석과는 조금도 닮지 않은 성격....... 조금 이상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다지 나쁜사람 같지는 않고........... 하지만 뭐랄까......약간 짖궂은 타입인거 같은데? " 고....고맙습니다. 하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세현선배의 호의에 답했다. 본인의 말처럼 정말 엉터리는 아니었는지 붕대를 감는 손놀림이 매우 익숙하고 노련해보였다. 게다가 처음 이미지와는 달리 꽤나 신중한 표정으로 붕대를 감고 있었다. " 많이 해보신 것 같네요?" 순간적으로 그렇게 말이 나가자 붕대를 다 감고 테이프로 마무리 짓던 세현선배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 익숙한 일이야. 예전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상처들이 생기기도 했거든. 지금이야 그럴 일은 없지만. 의사를 지망하게 된것도 그런 이유라고 할 수 있지."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상처들이 생겼다고? 이 사람에게? 그러고 보니.....그 패거리들.....분명 폭력서클같은거 아니었나? ....... 그 때 들었던 이 사람의 이름.......... 맙소사.......나 지금 설마 엄청난 사람한테 치료받고 있는거 아냐!? 내가 또다시 충격으로 놀래서 굳거나 말거나 세현선배는 꿋꿋히 치료를 다 마치고 일어섰다. " 아이구...허리야...........나이를 좀 먹었더니 조금만 무리해도 허리가 쑤시는군. 다 됐어. 그만하면 될거야." "... 감사합니다." 허리를 두드리며 하는 세현선배의 얼굴은 그다지 힘들어 보이진 않았지만 어쨌든 나를 정성껏 치료해준 은인이기도 했기에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 아...별거 아닌데 뭐. 내 아우의 친구는 나에게도 특별하다고. 크게 부담가질 필요는 없어. 물론 무척이나 고마울 테지만 말이야. 하긴 나에게 직접 치료를 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몇 안되니까. 그 점에서는 충분히 감격해도 좋아." 도대체가 부담 갖지 말라는 사람의 태도가 전혀 아니잖아! 무척이나 고마웠다가도 방금 한 말 때문에 그 고마웠던 마음이 쏙 들어가버리는 것 같다. 어이구 두야........ 같은 형제면서 어떻게 성격이 이렇게나 천차만별인거지? 혹시 이 사람이 이상한건가? 아니면 계세야 그 자식만 유독 특별난 건가? 아니다....내가 보기에는 두 사람 모두 정상으로 보이진 않는걸? " 난 이만 가봐야겠군. 아무리 나라도 수업을 연달아 3시간 이상 빠지는건 무리니까 말이야. 그럼 가보지. 사실은 더 있을 예정이었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어. 그럼 나중에 또 보자구." 세현선배는 내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자신의 할말만 하고 뒤돌아 서더니 양호실 문을 열었다. " 어...저기.....오늘은 정말.." " 아아....부담가질 필요 없다니까. 덕분에 나도 재미있는 구경을 했으니 말야. 참.... 진심으로 충고 하나만 하겠는데 말이지, 사람이 너무 둔해도 손해 본다는 사실 잊지 않는게 좋을거야. 이제 그 녀석은 폭발하기 일보직전 이니까....큭큭..." "!!?" 드르륵....... ".... 아......." .... 마이페이스에다가 사람 말 끊어 먹는거 하고는 계세야 그 녀석이랑 똑 닮았군...... 그나저나 충고라니........게다가 나의 어디를 보고 둔하다고 말한거지? 그리고 그녀석이라니.......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거지!? 누굴 말하는 거냐고!! 설마........ 계세야? 맙소사!!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여기서 왜 갑자기 그녀석이 튀어나와. 내가 그 녀석에게 뭔짓을 했다고 폭발직전까지 끌고 가겠느냐고. 빌어먹을.......얼마전 까지만 해도 잘돌아가던 내 머리가 요새 와서는 왜이리 엉키는 건지........... 나는 양호실 침대에 누워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은......누군가에게 치료를 받고 이렇게 누워있는 것도 그닥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음날 학교에 나왔을 때 나는 평소보다 분위기가 긴장되어 있다는 걸 깨닫았다. 아이들은 모두 쭈뼛거리며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고 교실에는 억눌린 침묵만이 맴돌았다. 평소 아침마다 시끄러울 정도로 수다를 떨어대던 모습과는 판이하게 차이가 났다. 나조차도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훓어 보았지만 다른 때와는 달리 그닥 특별날 것도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교실 가운데 매우 부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하고 있는 한 아이를 발견했다. 전에 구해줬던 그 희정이라는 애였다. 그녀는 사색이 되어 고개를 푹숙이고 몸을 부들부들 떠는 등의 평소에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저 도도하고 앙칼진 여자애가 저 정도로 떨 일이라면......... 설마 그 때 그놈이 또 찾아갔나? 헤에....알게 뭐냐. 친절은 딱 한번 뿐이라고. 내가 남의 사정에 일일이 신경쓸만한 처지도 못되는거고 게다가 저 아이와 나는 그닥 좋은 사이도 아니고 말야. 나는 솟아오르는 궁금증을 누르고 내 자리로 가 앉았다. 하지만......뭔가 허전하다. 뭐지? 그제야 나는 내 옆자리가 비어있다는 사실을 깨닫았다. 아침부터 분위기가 뒤숭숭해서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었는데....... 수학여행 이후로는 항상 나보다 더 이른 시각에 제꺽제꺽 등교하던 녀석이었는데.........? 게다가 책상 위에는 녀석의 가방도 올려져 있었다. 오늘은 왠지 평소보다 늦게 오는가 싶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어제 녀석이 내게 한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 달라... 다르다고............ 그래. 세야 네 녀석은 달라. 그 덩치 녀석과는 분명 다르지.......외모부터 시작해서 성격까지 모든 것이 달라.......하지만.............나에게 있어서는......? 나에게 있어서의 너의 의미는 뭐지.......? 네 녀석이 내게로 다가올 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어... 그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무엇 때문에? 네 녀석이 두려워서.....? 그래서 너를 보면 그렇게 내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리는 건지도 몰라. 하지만........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깨닫지 못하는.....것...? ...... 무.....무슨 바보같은 생각이야! 왜 갑자기 심각해지는 건데;;; 정신차리자. 계세야 녀석이 늦게 오든 말든 내 알바 아니야. 그녀석이 한 말 따위 잊어버리면 그만이야. 그놈도 별 뜻 없이 한 말일거야. 오히려 그런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내가 더 이상한거라고. 그래;;; 난 내 몸하나 부지하고 살기도 바쁜 인간이야. 쓸데없는 생각......지워버리자. 정말로 쓸데없는 생각인지는.....................잘 모르겠지만............말야 그러나 나의 예상과는 달리 녀석은 담임의 조회시간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평소 녀석의 모범생같은 일과를 생각해본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 계세야! 계세야없나?" 담임이 세야놈의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지만 주인이 없는 상황에서 대답이 들릴리는 없었다. "...... 결...석인건가?" 담임이 세야의 빈자리를 보고는 눈살을 찌뿌리며 말했다. 나 역시 계세야 녀석이 안왔다는 사실에 놀라며 다른 한편으로는 뭐라고 결론내리기 힘든 이질적인 감정을 느꼈다. 결코 좋지 않은..........찝찝한.....느낌과도 비슷한....... " 서....선생님." 그때 반장이 손을 들며 담임을 불렀다. 반장은 담임이 뭐냐는 듯이 고개를 돌리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세....세야 아까 여기에 왔다 갔는데요.........." ......!?..... 왔다 갔었다라고? 왔다.......갔어? 그래.... 가방이 올려져 있는 걸로 보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무슨 이유로? 반장은 순간 흠칫하면서 희정이라는 여자애를 쳐다보았다. 더불어 담임의 시선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아까보다 더 심각하게 사색인 그녀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다시 반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떨리는 몸으로 손톱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녀석? 우희정. 넌 또 왜 그러고 있고?" 담임의 물음에 교실은 한순간 침묵에 잠기더니 이내 몇몇 아이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모아졌다. 반장역시 영문을 알 수 없는 시선을 나에게 두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고 아무 말도 안했다. 나는 매우 엉겁결에 일어난 일이었으므로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봐야 했다. 왜 담임선생님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고 나를? 혹시 이번 일에 내가 무슨 연관이라도 된건가? ......하지만 딱히 그럴만한 이유가.... - 누가....이런거냐? - 그 때 그 녀석.....!?.... 설마.....말도 안돼. 너무 지나친 생각이야. 그럴 리가 없잖아. 주위의 억눌린 분위기는 무언가가 있었다고 얘기해주고 있는 듯 했다. " 너희들을 보아하니 뭔가 알고있는 눈치인데, 세야 그녀석이 아무 이유없이 수업을 제낄 리가 없다는 건 네녀석들이 더 잘알고 있을테지? 특히........ 뭔가 대단히 열받는 일이 있지 않고는 말이야." 담임의 말에 가뜩이나 긴장된 교실의 분위기는 더욱 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 유승하." 그 와중에 담임이 내 이름을 부르자 나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 예....?..예...." 담임은 미소를 비끄러 물었지만 눈만은 뭔가를 기대하는 듯한 사람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 너는 세야의 짝으로써 뭔가 짚이는건 없나?" 담임의 질문에 나는 난감해졌다. 딱히 짚히는 것도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나와 관련된 일은.... - 누구야? 네 녀석 이렇게 만든 놈이....- 제길!! 왜 자꾸 그 녀석의 말이 떠오르는 거야!! 그러나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아침부터 낯선 태도를 보이던 희정이라는 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 흑....흑흑....흑..........."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당황해하는 아이들과는 달리 담임만큼은 평소 실실거리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표정을 고수한채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 대충은 감이 잡히는군.....쯧...!" 담임은 혀를 차더니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담임의 눈빛은 내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처럼 집요했다. 희정이라는 아이의 울음은 더욱 구슬퍼졌지만 담임은 눈길한번 안준채 나를 계속 쳐다볼 뿐이었다. 그 상황에서 감히 입을 열거나 하는 아이들은 없었지만 몇몇 아이들의 알 수 없는 의문의 눈길이 나에게로 쏠리는 건 매우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리고.....정말 알 수 없게도 녀석의 빈자리로 인해 내 마음 어느 한 구석에는 '걱정'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도대체 왜 안나오는 거지? 아니...왔다가 갔다고. 그렇다면 아이들은 왜? 혹시....혹시라도........절대 그럴일은 없겠지만 어제의 그 질문들은 모두 무엇이었을까? " 반장!!" ".. 예?" " 세야녀석 오면 곧바로 교무실로 내려오라고 해라.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그다지 조례사항을 말해줘도 들을 것 같지는 않고.... 오면 말 전하도록. 이상." 담임은 교실 앞문을 닫고 나갔다. 그러나 세야녀석은 점심시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 유.....승하 잠시 나 좀 봐." 잠시 나 좀 보자는 버전으로 다시 나타난 내 앞의 여자아이는 입술을 얼마나 물어뜯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깊게 이빨자국이 박혀있었다. 그러나 지난번처럼 오만한 태도는 여전했지만 뭔가 쭈뼛거리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 다시 시작하기 시작한 부업을 멈추고 나는 별 수 없이 그녀를 따라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왠일인지 다른 때와는 달리 그녀 주변에는 늘 따라붙던 여자애들은 없었고 그녀와 나 단둘이서만 있었다. 학교 뒷 공터로 끌고 가던 그녀는 우뚝 멈춰서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왜 그러나 싶어서 순간적으로 의아하긴 했지만 그녀가 할말을 기다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길래 이렇게나 고상하신 여편내가 나를 다 보자고 한걸까? 그러나 그녀는 한참을 아무말도 안하고 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나는 너무 직설적인 그 눈빛이 마음에 안들기도 했지만 왠지 껄끄러운 면도 없잖아 있어서 은근슬쩍 뒷통수를 긁었다. "할말이 뭔데?" 결국 기다리다가 지루해진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곧 점심시간도 끝나가는 마당에 별로 좋아하지 않는....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기분나쁜 여자애랑 함께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건지............. "너........세야랑 무슨 사이야?" 매우 격앙되어 떨리는게 단박에 느껴지는 목소리로 희정이라는 아이가 말했다. "....뭐..라고?" 여기서 갑자기 왜 세야놈이 튀어나오는 건데!? "....네가........말했지!? 네가 말 한거지!!! 그 때 그일!!!!!" 나는 갑자기 따지듯 소리치는 그녀의 모습에 울컥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앞뒷말 다 잘라먹고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설마 오늘 아침 교실분위기가 침울했던 거와 관계있는 건가? 설마가 아니라 그게 정답인 것 같군. 제길.... "...너야말로 무슨 소리야.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는 건데? 제대로나 설명하고 말해." 나 지금 화났다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얕보면 큰 코 다칠거야..... 희정이라는 아이는 되려 내가 노려보자 흠칫했는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도 이내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틀 전에 너와 잠깐 마주쳤었잖아. 그때.........상열이 그새끼 일..." 평소 고상했던 폼은 다 어디로 날아가고 본성이 드러나는구만.......... 제길...이놈이나 저놈이나 물에 빠진놈 구해줬더니만 봇짐 내놓으라고 한다더니.......... 도대체가 도와주지 말았어야 했다는 거야 뭐야? 도와줘도 난리냐고!! 그리고 그 일을 자청한건 자기 자신이면서 누구에게 덤태기를 씌우려고! "너만 그렇게 얻어터진 티를 안내고 왔어도 몰랐을거 아냐!! 너만 아니었으면 모두 완벽했는데 네가 다 망쳤어!!! 세야가 그 일 다 알아버렸다고!!!! 아침부터 내가 무슨 소릴 들었는 줄 알아!? 꺼....지라고.....나보고 꺼지라고.......몸파는 창년같은 년이라고!!!! 다 네놈 때문이야!!!!!! 너 도대체 뭐야!!! 입학식 첫날부터 이상했어!!! 세야가 그렇게 관심두는거 이상했다고!!!!!!! 어째서 너같은 찌질이가............!!!" "............" 그녀는 여전히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나는 왠지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만 아니었다면 뭐든지 다 잘 풀렸을 것 같은 말을 내뱉는군........ 하지만....그거 알아? 나도 너희만 아니었다면 현재보다 훨씬 더 일이 잘 풀렸을 거라는거....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야. 네가 어떤 소리를 들었던지 간에 내 알바 아니지. 너를 도와준게 잘못된 거라면 그런 상황에서 너를 버려두고 왔어야 한다는 말 아닌가? 그렇다면 뭐...그닥 다르지는 않겠는걸. 몸이든 돈이든 팔아서 나를 처리하려고 덤벼든 그때의 그 모습이나 아니면 내가 그냥 지나쳐서 범해졌을지도 모를 네 모습이나....안그래?" "...뭐....뭐라고?...........지금.....나한테..." "그래. 너에게 한말이지. 엉뚱한 사람한테 화풀이 하지마. 네가 세야놈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든지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야." 아까운 점심시간만 날렸잖아. 빌어먹을.......... 저 아이에게 뭔가를 바라는건 없지만 적어도 구해준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해주지는 못할망정.......... 아아....정말 세상살기 각박하군. 기분이.........무지 더러워........ 내가 그대로 더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발걸음을 돌려 앞으로 나아갈 때였다. "그럼 네가 말하지 않았다면 세야가 어떻게 그일을 알고 있다는 거야! 성문의 일진새끼가 그랬다는 말만 듣고 바로 뛰쳐나갔는데 너 같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겠어!? 내쪽은 보지도 않았어! 처음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주나 해서 기뻤는데........ 그런데 고작 그 이유가 너같은 찌질이었다는 사실이 믿겨지겠냐고!!!! 덕분에 나는 완벽한 웃음거리가 되었어! 비웃음 받았다고!!!" 그녀가 뭐라고 소리치든 말든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때문이라고? 오늘 아침에 안보였던 이유가........... 나........때문이라고!? "너......지금 그게 무슨소리야? 다시 말해봐! 세야 그 녀석이 뭐라고!?" 도리어 내가 놀라서 그녀에게 소리치자 희정은 잠시간 움찔했다. "시....시치미 떼지마. 너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세야가.........뭐....뭐야 너 지금!!" 나는 희정이라는 아이의 말을 끝까지 다 들을 이유도 없었고 무엇보다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달렸다. 세야 그놈이 어째서 그렇게 뛰쳐나간 건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확실히 알아야 했다. 놈과 나 사이의 관계를! 어째서 네놈을 보면 내 심장이 그렇게 뛰는건지....... 어째서 너는 나에게 그런 말을 했었는지..... 그 모든 것들을!! "헉.......헉......" 제기랄........ 도대체가 나까지 따라서 학교를 뛰쳐나올 건 뭐야....... 같은 자리에 앉은 두놈이 갑자기 뛰쳐나갔다고 하면..... 또 이상한 헛소문이나 퍼지겠지. 아까 우희정이 한 말을 보아 반 아이들 전체가 엉뚱한 상상을 하나본데........ "......거기 너! .....여기.........여기 일진들이 모이는 곳이 어딘지 알아?" 나는 닥치는데로 앞에 보이는 녀석을 잡아놓고 물었다. 교복도 다른데다가 얄상하게 생긴 녀석이 갑자기 자신의 학교 일진이 모이는 곳을 묻는게 영 못 미더운건지 떫은 표정으로 녀석은 학교 구체육관 뒷 공터라고 대답해주었다. 나는 녀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체육관 뒷 공터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비록 처음 와보는 학교였지만 구체육관 뒷 공터를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우중충해 보이는 콘크리트 건물 한 채가 외떨어진 곳에 홀로 우뚝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장소 한번 기막히군........잡초도 무성하고..... 도무지 같은 학교 안의 건물이라고는 생각 할 수 없을 만치 이 건물은 주변과 조화를 이루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일진 녀석들 따위의 아지트나 될 수 있었겠지. 탁탁...탁탁!!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거야!?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맨 처음 보았던 것은 누군가가 피투성이가 된 채 체육관의 콘크리트벽에 처박히는 것이었다. 그 한순간이 너무나도 살벌해서 나는 그 상태로 멈칫 바라봐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상대를 본 순간 나는 또다시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했다. 녀석은 상대방에 비해 놀랄 정도로 깨끗했다. 주먹에 묻어있는 피를 제외하고는...........그리고 시릴 정도로 무표정....... 마치 전에 봤었던 놈의 모습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속을 전혀 알 수 없다. 과연 저 녀석이.........전에 내가 봤었던....때때로 가끔은 귀엽기도 했던.....그 녀석이라구? "자......잘못했어! 살려줘!!! 다시는 안그럴게!!!" 세야놈은 혼자가 아니었다. 녀석의 뒤에는 오래전 입학식때 봤었던 폭력서클쯤의 패거리들도 섞여 있었다. 세야녀석의 옆에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피어싱을 하고 있는 녀석이 킬킬거리고 웃으면서 무릎 꿇고 빌고 있는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얼씨구. 상열아.....상열아...........그러게 적당히 조절하고 다녀야지. 똥개 같이 여기저기 아무데나 영역표시 하고 다니지 말라고 했잖냐. 그러고 보면 성문도 갈 때까지 갔구나. 하긴 세야 이녀석이 좀 막강해야 말이지. 안 그래?" 아닌게 아니라 피투성이가 되어 땅에 쓰러진 놈은 전에 봤던 상열이란 놈이었다. 상열은 피어싱의 말에 자존심이 상해서 그를 핏발선 눈으로 노려보았지만 이내 세야놈의 무표정을 보고는 핏기가 싸악 가신 얼굴로 다시 싹싹 빌어야했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묻튼 고맙다. 네 덕분에 한동안 골치를 앓던 이놈들도 이젠 우리 수중에 들어온거나 마찬가지 아니냐! 이참에 써클에 들어올 생각은 없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건 어때?" "거절한다. 귀찮을 뿐이야." "여전히 냉정 하시구만." 피어싱이 입맛을 쩍쩍 다시며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는.....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 중 누군가가 나를 발견하거나 아니면 놈이 나를 발견할 때 까지는 그대로 움직이지 않을 심산이었다. 세야놈은 바닥에서 두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있는 상열에게 다가갔다. "나도 이런 귀찮은 짓 별로 좋아하진 않아." 세야놈이 자신의 머리 위에서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하자 상열은 거의 쓰러지기 일보직전으로 보였다. "하지만 못할 것도 없지. 더군다나 네놈은 정말 주제넘은 짓까지 했지않나?" 빠악!!!!!! "크...크헉!! 흐........으으으..........." 상열은 세야놈의 발길질에 고통스러운 신음을 터뜨리며 침을 줄줄 흘렸다. 계세야......저 잔인한 새끼. 비록 내가 저놈에게 알아낼 것이 있다고 우격다짐으로 달려오긴 했지만..... 나 지금 잘하는 것일까? 방금 전만 해도 피어올랐던 뜻 모를 용기가 슬슬 사그러드는 기미가 느껴졌다. 놈의 그 잔인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슬금슬금 온몸에 한기가 느껴지는 듯도 싶었다. 피어싱 패거리도 이제 슬슬 질리는지 옆에서 얼씬거리며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잘.....잘못했어요!!" 그 큰 덩치가 이제는 발음도 제대로 알아먹지 못할 말을 간간히 내뱉으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제 그만하지 그래? 좀......지나친거 아니야?" 피어싱이 패거리를 대표해서 제지하고 나서자 세야놈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상관하지마." 피어싱은 흐.....음하고 여운을 남기더니 쓰러진 상열을 발로 툭툭차며 말했다. "지금으로도 충분히 위험한 지경이야 이새끼는... 한번만 더 치면 아주 골로 가버릴걸?" 세야놈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피어싱을 노려보았다. 너도 이꼴 당하고 싶냐는 듯이. 그러자 피어싱은 움찔하면서도 꿋꿋이 말을 이어나갔다. "너야... 이놈이 어찌되든 별 상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쪽은 꽤 많이 복잡해 지거든. 조금만 더하면 정말 살인날지도 몰라." 그래...이제까지 내가 저런 녀석의 주먹을 맞고 살아왔다는 거다. "게다가...." 피어싱은 말을 하다말고 히죽 웃었다. "저기 서 있는 저 녀석도 네가 이러는걸 원치 않는 것 같은데?" 그와 동시에 나는 돌아간 계세야 녀석의 얼굴과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했다. 쿵.....쿵....!!!!!!.. 지금 내 표정이 어떨까? 굳어 있을까? 아니면 울상을 짓고 있을까? 단 한가지 분명한 것은 결코 좋은 표정은 아닐 것이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알고 찾아왔나 보네." 피어싱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세야놈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야." 음....뭐...냐고? 글세....뭐라고 해야하지? "언제부터 거기에 서있었지?" 이건 분명히 나에게 묻는 말이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전에 왔어." ".....왜?" 왜??? 왜냐구? 세야놈의 물음에 내가 적절한 말도 생각해내지 못한채로 벌렸던 입을 꾹 다물고 눈만 뒤룩뒤룩 굴려야했다. "그야.....너는 내 짝이고 학교에서 담임선생님도 많이 걱정하셔서....." 나는 말하다가도 멍청한 말만 줄줄 내뱉는 내 입을 당장에라도 꼬매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단지 그런 이유가 아니라는 건 지나가던 고양이도 알 일이었다. 어느 미친놈이 짝이라는 이유로 이곳에 뛰쳐왔겠는가? 그것도 상대는 다름아닌 계.세.야. 바로 이놈인 것이다. 한마디로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인 것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게 아닌데...!! 나는 어찌할까 계속 고민하다가 결국 스스로도 놀랄만큼 대범한 행동을...... 아니, 정신나가버린 미친짓을 저질렀다. 이도 저도 속시원히 제대로 말도 못한 채 그 상태에서 그대로 세야놈의 단단한 손을 붙들고 무작정 뛰쳐나간 것이었다. 녀석의 손은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고 그 차가운 무표정에도 불구하고 놀랄만치 뜨거웠다. 한참을 그렇게 놈의 손을 잡고 뛰다보니 점차로 숨이 가빠왔다. 결국 어느 한 지점에 이르러서는 어느새 힘이 들어가 꽉 붙들었던 놈의 손을 놓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그 반면 놈은 여전히 호흡하나 흩트러지지 않은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왠지 부러움과 동시에 시기가 일었다. 빌어먹을 녀석.... 쓸데없이 체력만 좋아서....쳇! 그러나 막상 호흡이 어느정도 진정이 되었을 때 나는 눈앞이 막막해짐을 느껴야했다. 도대체가 이 상황은 뭐란 말이냐! 지금 이놈과 둘이서 나란히! 그것도 내가 미친짓을 한 결과로......... 이런 어정쩡한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뭐라고 한마디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놈은 그저 조용히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놀랄만치 가라앉은 까만 녀석의 눈동자가........묘하게 가슴이 설레었다. "...나는........"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너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어." 진정......해야하는데..... "뭣 때문이냐.....?" 나의 말과 동시에 세야놈의 눈이 조금 커지는 듯도 싶었다. 나는 점차로 크게 울리는 가슴속 울림을 애써 억누르고 천천히 말했다. "오늘일.......그리고 어제 네가 한말........나는 바보가 아니야. 단지 네가 어째서 그런건지 그게 궁금할 뿐이야." 그리고.....이 떨림이 무엇인지도..... 마지막 말은 안으로 삼킨채 나는 용기를 쥐어짜내 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이건 내 일생일대의 용기다!! 절대....피하지 않겠어! "..왜 그런건지 알고 싶어?" 한참후에 세야놈이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낯선 부드러움을 담은 목소리로 나직이 물었다. 혹여라도 말을 하다가 그대로 목소리가 떨려 나와서 내가 긴장했다는 사실을 세야놈이 알게 될까 두려워 그것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꽉 쥐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그 이유가 무엇인지........알고 싶다는 거지.....?.." 왠지 자조적인 목소리로 끝말을 씁쓸히 중얼거리던 세야놈이 갑자기 내 앞으로 다가섰다. 왜......왜 그러지? "네가..알고 싶다니까 가르쳐주지." 내 코앞에 다가온 놈은 평소와는 달리 어딘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와 동시에 내 고개가 뒤로 꺾인건!? "......!!!!!!.." 믿을 수 없었다. 커질만큼 커져버린 내 눈은 세야놈의 깊게 가라앉은 까맣디 까만 눈동자와 맟닥뜨리고 있었다. 고개가 젖혀짐과 동시에 입술 사이로 갑작스레 얽혀 들어온 건...... 세야놈의 것이었다. 뭐랄까.......... 굉장히 부드럽고 뭉클하고........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많이 서툴은......이것은...... ......... 키스였다. "읍..!! 읍!!!!" 이 빌어먹을 놈이 갑자기 쳐돌았나!! 왜 갑자기 나에게 이런 짓을!! 한참을 그렇게 패닉상태에 놓여 있다가 정신이 들어온 것은 한순간. 녀석에게서 떨어지기 위해 몸부림 쳤지만 그야말로 괴력이라고 밖에는 불릴수 없는 세야놈의 힘 앞에서는 나의 이 몸부림도 결국 무릎꿇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저항하면 저항할 수록 자신의 팔 힘으로 더욱 강하게 밀착해 오는 것이었다. 부드러운 민트향이 입안에서 맴돌 무렵 세야놈은 이 괴상한 짓을 멈추었다. "....학...학....너....너 뭐야.." 이제는 존심이고 뭐고 없이 내 목소리는 완전 맛이 가 있었다. 자연스레 말도 더듬어지고 목소리는 아주 가관으로 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첫키스를!! 그것도 평소 나를 싫어하던 녀석과 나누다니!!!! 이런 괴변이 또 어디있단 말인가!? "네 질문에 대한 내 대답." ..... 이게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너무나도 뻔뻔스럽게 철판깔고 말하는 녀석의 모습이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냥 매우 당당해서 나조차도 입만 벌리고 멍하니 쳐다봐야 할 판이었다. 이녀석........이렇게 뻔뻔한 놈이었나? 놈은 내 기분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로 자신의 입술을 엄지 손가락으로 지긋이 눌렀다. 그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방금전의 격한 입맞춤에 여운을......남기는듯한!? "난 네가 묻기에 답해줬을 뿐....... 나머지는......네가 알아서 해." 뭐.....뭣을!? 무엇을 알아서 하라는 거냐!! 놈의 목소리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 괴상한 짓을 하기 이전의 목소리가 마치 중저음의 낮고 부드러운 울림이었다면 지금의 목소리는 상당히 허스키해진 상태........ 그런데 더욱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은 그것은 또 그것대로 매력있게 들린다는 것이었다. ".....개새끼!!!"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놈이 가장 싫어하는 욕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순간 흠칫 놀라 놈의 보복을 기다렸지만 놈은 몸을 돌려 그대로 아무 말 없이 걸어갈 뿐이었다. 왜...안 때리지? 개새끼는 놈이 가장 싫어하는 욕인데......? 입맞춤.........키스....................... 이것이 답......이라고? 도무지 이 상태에서 학교에 갈 마음이 안들었다. 키스.....키스.... 세야놈과의 키스.....!! 키........스...... 오늘 잠자기는 다 글렀군.......젠장! 사건의 발달은 세야놈과의 일이 있고 난 뒤 대략 한달 정도가 지난 후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 이제 그 일도 가물가물 해져갈 무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음날 학교에 나왔을 때 녀석의 태도가 너무도 태연했고 담임도 별말은 없었다. 그 모든 것들이 딱히 다른 일상과 별다를 바도 없었기 때문에 일생일대의 대사건을 심지어는 당사자인 나조차도 서서히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여가고 있었던 것인지 몰랐다. 물론 어쩌다가라도 녀석의 입술을 보게 될 때면 이야기는 달라졌지만... 간만에 늦잠을 잔 덕에 헐레벌떡 달려와 겨우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던 나는 숨을 헐떡 거리며 내 자리로 갔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멈춰서서 빈 내 옆자리를 보았다. 담임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세야놈도 들어오지 않았다....... 다르륵...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지만 왠지 횅한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좋든 싫든 인정해야겠다. 세야놈의 존재감은 나에게 있어서 꽤나 크다라는거..... 아이들은 여전히 아무말 하지 않는다. 간만에 희정이라는 아이를 힐긋 쳐다봤을 때 그녀는 전과는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좀 더.. 표독스럽고 앙칼져 보였는데 지금은 인상이 사뭇 달라져 있었다. 한 달 만에 사람이 저렇게 바뀔 수도 있는걸까? 나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꼭 저 아이가 변했다라고 할 수도 없는거지.. 몰랐는데..... 세야놈의 자리는 창가였다. 평소에 놈이 그 크고 늘씬한 덩치로 내 옆의 시야를 가렸기 때문에 모르고 지내 온 것일 수도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다지 눈길 돌려본 적도 없었지만... 가끔씩 흘끔거리는 걸 빼고는.. 이제 막 바람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데....... 그 바람이 너무 쌀쌀해서 몸에 소름이 돋는 듯 싶었다. 담임은 꽤 깔끔한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이렇게 교실환기를 자주 했었다. 이제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겠지만 오늘따라 이것이 신경에 거슬리는 이유는 아마도 갑작스런 체감온도의 변화에 그런 것 같다. ...... 아니다. 세야놈 때문이다. 놈이 언제나 내 옆에서 바람을 막아주었기 때문에 그동안 몰랐던 것 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렇게 놈이 없는 자리는 여러모로 더욱 썰렁한 것 같았다. 드르륵..... 앞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왠지 안 좋은 안색으로 걸어 들어오는 담임이 보였다. "자.. 조회시작하자." "차렷! 경례!" "안녕하세요!" 담임은 교실안에 있는 아이들을 훓어 보다가 세야의 빈자리에 눈이 고정되었다. "오늘 안 온 사람은 세야 빼고 없지?" 담임의 물음에 아이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예..!" "세야는 오늘 감기몸살이 심해서 학교에 못나온다고 아침에 전화를 받았다. 꽤 많이 아픈 모양이더구나." 감기...몸살이라구? 그 튼튼해 보이는 놈이 병도 앓는단 말야? 나만 아니라 아이들도 공통된 생각을 했는지 모두들 뻥찐 얼굴로 담임을 바라볼 뿐이었다. "반장!" "예..예!?" 반장도 한참을 넋놓고 있다가 담임의 부름에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너는 오늘 종례 끝나고 나서 세야놈이 받을 프린터도 따로 받아 두었다가 집에 갔다줘라. 학교에서 그리 먼곳에 살지도 않으니까 충분히 가져다 줄 수 있을꺼다. 주소는 종례시간때 적어서 주지. 마침 오늘이 주말이니 충분히 할 수 있을거다." 반장은 담임의 갑작스러운 심부름 부탁에 어벙한 표정에서 갑자기 보는 사람이 안쓰러워 질 정도로 안색이 새하얗게 굳었다. 그동안의 악명과 행위로 미루어 보아 그 표정이 전혀 이해안가는 것도 아니었지만... 역시 사람은 평소에 착하게 살아야 하는거야....라기 보다는 이상했다. 그 녀석 전에 나를 갈구던 것 빼고는 다른사람에게 피해준 적도 없는데 왜 저렇게 과민반응을 하는거지? "예.." 반장의 기어들어가는 대답을 들으며 담임도 그다지 탐탁하지 못했던 건지 얼굴을 살짝 굳히다가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승하야." "...예?" "너도 세야 녀석의 짝이니까 반장이랑 함께 들렸다 와라. 명색이 짝인데 이런 때 아니면 언제 또 친구간의 돈독한 우정을 쌓아보겠냐." 별로 그녀석이랑 돈독한 사이도 아닌데요......... 일방적으로 당한 사이면 또 몰라도... 그러나 나는 어김없이 대답했다. "예." 뭐.....녀석도 사람이니까 아픈데 아무도 찾아가주지 않는다면 조금은 슬프겠지? 물론 찾아가는 것은 고사하고 반겨줄지도 의문이지만.......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수업은 빠르게 끝났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교실에는 나와 반장만이 남아 있었다. 반장은 그간 수업시간마다 따로 받아 모아둔 세야놈의 프린트를 탁탁치며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안색이 흐린걸 보면 반장 역시 세야놈네 방문하는 것이 꽤나 큰 부담이 되는 듯 싶었다. 탁탁....탁탁........ 한참을 그러다가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반장은 언제까지 프린트지만 두들기고 있을거야? 아닌게 아니라 가지런히 잘 정리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4모서리를 한번씩 돌려가면서 툭툭 치는 것이었다. 완벽에 완벽을 가하려는 결벽증이 아니고는 일부로 저러는게 틀림없다. 계속 기다리도 지루하고 가만있자니 하루가 다가도록 그러고만 있을 것 같아서 슬쩍 입을 떼었다. "이제....그만 가봐야하지 않을까?" 나의 말에 반장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그래야지." 문단속을 하고 교문을 나오는 길에서도 반장과 나는 아무말도 없었다. 아닌게 아니라 나는 반장을 보기만 했지 한번도 제대로된 접촉이라던지 대화같은 것은 없었다. 그건 반장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나는 나름대로 반장에게 호감 비스무리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반장은 다른 아이들이 나를 욕할 때 함께 어울려 욕하는 걸 본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나를 변호해 준적도 없었지만. 숙제나 과제물 같은 것을 걷을 때도 반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공평하게 처리하는 것도 꽤나 마음에 들었었다. 가끔씩 말을 더듬거나 어눌한 면이 없잖아 있긴 했지만 그건 나에게 댈 것도 아니었다. 그때의 나는 훨씬 더 어둡고 음침한 녀석이었으니까. 나는 코끝으로 내려온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렸다. 거참 엄청 서먹하구만... 쩝...... 속으로 쓴 입맛만 다시고 있는데 교문을 나서면서 반장이 말을 걸었다. "혹시 세야네 집에 가본적 있어?" "..아니. 한번도.." "아...그래?" 한번도 가봤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내가 어딜 봐서 그녀석의 집에 가봤겠느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장의 목소리엔 의아함과 동시에 실망스러운 구석이 섞여있었다. "이 쪽 길에서 꺾어야해." 반장은 그나마 선생님이 적어준 약도와 주소를 보고 용케 찾아가고 있었다. 나? 나는 물론 내가 사는 동네에 대해서만큼은 어느 누구도 저리가라 할 만큼 빠삭한 녀석이었지만 이렇게 넓고 큰 동네의 지리는 개미눈꼽 만큼도 잘 모른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 처음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물론 반장은 잘만 앞서서 걸어 나가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이윽고 반장이 어느 집 앞 대문에서 멈추면서 동시에 나도 걸음을 멈추었다. "다 왔어. 여기야." 반장이 손에 쥐어진 종이쪼가리와 주변을 확인하더니 말했다. 눈앞의 집은 비록 주변에 있는 다른 집들에 비해선 작은 편이었지만 훨씬 아담하고 정돈되어 보이는 이층집이었다. 세야놈이 부자동네에 살고 있었다는건 알고 있었지만.. 역시나 집도 좋은 곳에서 사나보네.. 문틈 사이로 마당의 잔디밭도 보이긴 했지만 개는 없었다. 나는 순간 떠올렸던 부자들의 이미지가 생각났다. 드넓은 마당에 비싼 개시키 한 마리와 온갖 화초를 쑤셔다 박은 정원.. 그리고 의리의리한 집....이었는데 확실히 다른집들은 다 그랬다. 그런데 이집은 다르다. 마당이 있긴 하지만 언뜻보면 정원대신에 작은 텃밭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다지 의리의리해 보이지도 않는 집이다. 뭐 아무렴 어떠랴. 나만해도 이런 곳에서 살아봤음 원이 없을 지경이다. 가만히 한숨을 쉬며 들어가려고 벨에 손을 대려는데 뒤에서 잡아끄는 손이 느껴졌다. "...왜?" 내가 뒤돌아서서 나를 붙잡은 반장을 보자 반장이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한참을 머뭇거렸다. "저기.....미안한데..." 반장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하자 나는 내 나름대로 뭐가 미안한지 듣기 위해 계속 말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오늘 과외를 가야하거든... 그런데 지금 시간이 다 되가서...... 아무래도 나는 가야할 것 같아. 나 한사람이면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짝인 너도 있고해서......... 그냥 네가 전해다주면 안될까? 급해서 말이야." 결국 주저주저 하면서 말을 다 마친 반장을 나는 떨떠름하게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어...어...그래. 어쩔 수 없지 뭐. 과외도 중요하니까........." 제길.... 있는 놈들이란! 나도 집에가면 해야할 부업들이 태산같이 쌓였다구. 네 녀석은 하루정도 빠져도 상관없겠지만 나는 하루라도 빠지면 생활해 나가는데 타격이 크단 말이다!! 내가 너보다 바빠도 훨씬 바쁘다고!! 라는 말은 꼴딱 삼킨채 맥없이 하하...웃으며 반장이 내미는 프린터를 받아들였다. "정말 미안해. 그리고....승하야.........너 생각 외로 정말 괜찮은 아이같다. 그럼...나는 이만 갈게." 빠르게 말한 반장이 몸을 돌려 탁탁 뛰어가고 나서야 나는 멋쩍게 뒷통수를 긁었다. 생각외로 괜찮은 아이라........... 난 원래 괜찮은 놈이었는데? 방금전만 해도 두사람이라서 솔직히 부담이 들긴 했지만 그냥저냥 있을만 했는데 이젠 혼자 남아서 세야놈에게 프린트를 전달하고자 벨을 누르려니 엄청 떨렸다.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가버리자니 월요일날 담임이 물어보면 할말이 없어지잖아.... 반장놈도 나한테 떠넘기고 갔다고 한소리 들을테고.... 나는 눈을 꽉 감고 벨을 꾸욱 눌렀다. 조금 후에 덜컥 소리가 나면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누구야?- "........" 어이가 없도다... 대뜸 대고 반말이라니;;;; -... 음? 누구냐니까?- 나는 다시 한번 되묻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대답했다. "아.....세야네 반친구 유승하라고 하는데요...담임선생님 심부름으로 세야에게 병문안 겸 프린트를 가져다 주러 왔습니다." 더럽고 아니꼬워도 참아야지 별 수 있나..쩝........ -......... 유...승하!?...들어와..- 왠지 스피커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뭔지 모를 의아함이 담겨있었지만 곧이어 철컥 소리가 나더니 손으로 밀자 스르륵 열렸다. 마당에는 문밖에서 언뜻언뜻 보이던 대로 역시나 작은 텃밭이 있었다. 텃밭위로는 깻잎 상추 무 고추 가지 등등 여러 가지 채소가 심어져 있었다. 무공해로 직접 재배해 먹는건가? 잔디밭을 지나 문앞에 이르러서는 똑똑 두드리고는 천천히 손잡이를 당겼다. "실례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인사말을 하던 나는 앞을 보고는 순간 흠칫하며 열었던 문을 다시 천천히 닫으며 슬슬 뒷걸음질 쳤다. 바....방금 뭐였지? 그때였다. 현관문이 벌컥 열리면서 내가 보았던 그 형상들이 튀어나왔다. "야야! 어딜가려고 그래? 왜 갑자기 나가는건데?" "흠흠.....괜찮으니 들어오렴." "어머! 세진아.......!! 너 세야의 친구에게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하니! 당황해 하잖아." ".....안녕? 오랜만이지? 승하야." 여러 가지 목소리들이 난잡하게 터져나오면서 나는 방금 봤던 것이 환영이 아니었다는 걸 다시 한번 재확인할 수 있었다. "아.....안녕하세요들?" 방금 전 내가 들어간 문앞에는 5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현관 앞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네가 승하로구나. 그동안 이야기 많이 들었단다." 무슨 이야기....를요? 그동안 녀석에게 많이 얻어터져서 온몸이 울긋불긋 했다는 이야기? "아.......그러셨군요." 나는 어느새 이들 세야녀석의 가족으로 추정되는 이들에게 끌려 접대실에 앉아 아주머니가 내놓으신 케잌을 대접받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원래는 프린트만 전해주고 후딱 나올 생각이었는데...... 왠지 나도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음...... 세야 그 녀석이 고집하나는 무척이나 세지 않소." "그렇기야 하지만... 난 또 이렇게 실제로 만나볼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누군지 가르쳐 주지도 않고 무조건 떼쓰기만 했으니........." 세현형은 내 옆에서 아주머니가 부지런히 깎고 계시는 사과를 집어먹으며 말했다. "결국 두분께서도 허락하셨으면서 뭘 그래요? 이제 내 귀여운 아우녀석이 어떻게 하느냐만 남은 거지. 그렇지? 승하야?" "네?..아..예......" 뭔지도 모르면서 세현선배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떨떠름하게 대답을 하자 동시에 시선이 쏠리면서 괜히 무안해졌다. 차라리 대답하지 말걸.........뭘 안다고 설쳐대다가;;; "어흠....흠흠.........." "세야녀석.....고생 많겠는걸?......" 아저씨가 무슨 일인지 헛기침을 하자 그 곁에서 세야의 둘째형 세진이 한마디 덧붙였다. 한참동안 내가 모르는 대화가 그들 사이에서 왔다갔다하고 나는 뻘쭘히 앞에 놓인 케잌만 먹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눈앞이 살짝 희미해졌다. "...아?" "얘! 세진이 너 손님한테 그게 무슨 실례니?" 아주머니의 질책어린 목소리가 들렸지만 눈앞의 상대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안경을 빼니까 사람이 확 달라지는구나. 너.... 차라리 빼고 다니지 그래?" 지난번 수학여행 때 담임과 같은 소리를 늘어놓는군. "세진형. 빨리 돌려줘. 나중에 세야가 알면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그래? 큰형 아니면 그녀석 말릴 사람도 없어. 미운털 박히기 전에 빨리 돌려줘." 세현선배의 맑은 미성이 들리면서 세진이라고 불렸던... 아마도 둘째형인 듯 싶은 사람이 나에게 안경을 내밀었다. "별로 나쁜 뜻은 없었던 거니까 크게 신경쓰지마. 세진형은 기분 내키는대로 하는 편이거든. 저래뵈도 서울대 경제학과를 다니고 있지. 아마...우리 넷중에 머리는 가장 좋을거야." 에엑....? 정말..? 어벙하게 세현선배를 쳐다보자 선배는 재밌다는 듯이 실실 쪼갰다.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마. 신기해서 나도 모르게 그랬다." 세야녀석의 셋째형이 순수히 사과해오자 나도 고개를 저으며 슬쩍 미소를 띄고 대답했다. "아니요.. 별로 신경쓰지 않습니다. 괜찮아요." 실은 꽤나 놀래긴 했지만.... 그렇다고 표를 낼수도 없지 않은가. "케잌 더 갔다줄까? 단걸 많이 좋아하지?" 세야의 어머니가 앞에 놓인 빈 접시을 가져가시며 말하셨지만 나는 두손을 저으며 사양하려고 했다. "아...아니요. 그걸로도 충분합니다. 더 갔다 주시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실은 너무 부드럽고 달콤해서 더 먹고 싶었으나 이래뵈도 예의를 엄격히 따지는 어머니 아래서 자란 나였기에 사양했다. 그나저나 내가 단걸 좋아한다는 건 어떻게 눈치채셨지? 그저 케잌 한조각을 먹었을 뿐인데... 그러나 아주머니는 부드럽게 웃으시며 말하셨다. "아니야. 승하야. 우리집에는 세현이를 빼고는 아무도 단걸 좋아하지 않아서 선물받은 케잌들이 많이 남아있단다. 그러니까 사양하지 말고 맘껏 먹으렴. 따로 먹을 사람도 없으니까."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면서 자상한 미소를 짓는 아주머니를 보자 나는 세야녀석이 무척이나 부럽게 느껴졌다. 이렇게 따스한 가정에서 자란거구나...너는......... 나에게도 존경하는 어머니가 계셨지만.....벌써 예전에 돌아가셨다. "...네...감사합니다......" 아마도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많이 떨리지 않았을까 한다...... "저.....그런데 세야는 좀 괜찮은가요?" 내가 뜸을 들이며 천천히 묻자 세현선배가 일어섰다. 나머지 가족들은 뭔가 눈짓을 주고받을 뿐 별말이 없었다. "세야 그녀석이 어릴때부터 감기엔 좀 많이 약하긴 했지. 최근에는 운동도 하고 몸매도 기르면서 그다지 심하게 앓아본적이 없긴 한데........ 이번엔 꽤나 심한 것 같구나." 아저씨께서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하자 나는 그렇게 아픈건가 싶어 슬근슬근 녀석의 걱정이 깊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승하는 세야의 병문만을 온거였지? 한번 세야의 방에 들어가보지 않을래? 지금쯤 누워서 자고 있을거야. 어젯저녁부터 통 앓는 바람에 밥도 제대로 못먹었단다. 네가 좀 약과 죽을 가져다 주지 않으련?" 아주머니가 어느새 새 물통과 물컵, 죽이 담긴 쟁반을 가지고 오면서 물으셨다. 나는 아주머니의 손에서 쟁반을 받아들며 답했다. "저...세야의 방이 어디에요?" "2층 마지막 방이야. 한번 들어가봐." 세현형이 히쭉 웃으며 대답해줬다. 나는 뭔가 얼떨떨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을 거진 다 오를 무렵 아래층에서는 뭔가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세야네는 상당히 단란한...... 가족인 것 같았다. 똑똑..... 역시 노크해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속으로 양해를 구하며 문을 열었다. 방안은 왠지 머리가 맑아지는 듯한 초록빛 잎사귀가 그려진 벽지가 발라져 있었고 상당히 넓었다. 아래층 응접실도 매우 넓긴 했지만... 잘 조화 배치된 여러 가구들 때문에 그다지 휑하지는 않았는데... 깔끔하게 정리된 책상과 벽에 붙어있는 책장들과 장식장.... 하얀색과 검정색이 조화를 이룬 옷장과 창가에 붙어있는 침대....... 옆에는 작은 탁상도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 넓디넓은 방안에 비해선 상당히 삭막해 보인다.... 나는 침대 옆에 놓인 탁상위로 쟁반을 올려놓았다. 침대위를 보니 세야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정말로 많이 아파서 인지 얼굴이 빨갛게 열로 상기되어 있는 듯 싶었다. 나는 슬쩍 무릎을 끓고 내 손을 녀석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갑자기 차가운 물체가 닿아서 그랬는지 세야가 슬쩍 인상을 찌뿌렸다. 나는 놀래서 손을 거두려고 했지만 곧 이어 세야녀석이 슬쩍 떨어져 나간 내 손을 쫒아 무의식적으로 이마를 부벼오는 바람에 결국 가만히 내손을 녀석의 이마에 얹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 더워서...시원한 내손이 마음에 들었나보다. 눈을 감은 녀석은 정말 평소의 냉기는 다 어디로 날려버렸는지 매우 순진하고 무방비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원래 자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무방비해지는 걸까... 아니면 지금 이녀석이 아파서 정신이 없기 때문인걸까.... 나는 피식 웃으면서 세야 녀석의 머리카락을 슬쩍 쓸어내렸다. 음......의외로 부드럽구나......헤에... 그러고 보니까 죽도 먹여야 하는데..어떻게 하지? 탁상위에 놓인 죽그릇을 걱정스런 마음으로 바라보다가 방안에 있던 어느 한 물건에 우연히 눈길이 쏠렸다. 내......시선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작은 액자와 그 앞에 놓인 반지함이었다. 반지함은 그렇다 치더라도... 저 액자는.....? 왠지 가슴이 쿵덕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슬그머니 세야의 이마에서 손을 거두었다. 어느새 나는 책상위에 올려진 액자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액자속에서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아이는.... 지난 날 내 기억속에서 희미하게 가물거렸던 바로 그 아이였다. 짧은 단발머리에 뽀얀피부와 큰 눈동자. 꼬마치고는 오똑하게 자리매김한 코와 앙증맞은 입술...... 분명 내 어릴적의 첫사랑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아이의 사진이 세야녀석의 방에 있는 걸까? 나는 슬쩍 뒤를 돌아 잠들어 있는 세야녀석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심장박동수가 무척이나 빨라졌다. 나는 액자를 집어들어 뒤에 있는 칸막이를 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꺼내기 위해 액자를 뒤집는 순간 안에 들어있던 사진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팔랑하고 떨어졌다. 뭐....지? 떨어진 종이 쪼가리를 주워드니 크기가 좀 더 작은 다른 한 장의 사진이었다. 살짝 흔들린 것으로 보아 꽤나 급하게 찍었었나 보다. 형태가 흐리긴 했지만 자세히 보면 어느정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진속에는 두명의 아이가 다정하게 마주앉아 있었다. .....!!?...... 다른 한명은 액자에서 본 나의 첫사랑이었고... 다른 한명은.....누구지? 어디서 많이 본듯한 얼굴이긴 한데...... 손에 크림빵을 가득 쥐어들고 칠칠치 못하게 입가에 크림을 듬뿍 묻히고 씨익 웃음을 짓고 있는 아이는 ........ 나!? 경악에 찬 표정으로 다시 한번 사진을 확인했지만 틀림없는 어릴적의 내 모습이었다. 다른 사진 뒷면에 숨겨져 있던 사진..... 스윽...... 그 때 머리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리고는 내손에 들린 사진을 어느틈에 빼어갔다. 아니.....누군가가 아니다. 딱히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은데다가 별다른 기척없이 다가온........ 이 방안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밖에 없다. 계.....세야............... 내가 순간적으로 당황해 고개를 돌렸을 때는 역시나 세야녀석이 등 뒤에 서 있었다. 아직 제대로 열이 내린건 아니었는지 여전히 상기된 볼에 슬쩍 가라앉은 속눈썹이었지만 녀석은 분명 내가 보고 있던 사진을 손에 쥐고 아무말 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저기......그러니까 이거는........" 내가 더듬더듬 뭐라고 해명하려 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남의 방에 들어와 그것도 몰래 사진을 꺼내서 보려고 했던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나는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미.....미안. 나쁜 뜻으로 보려고 한건 아니었어. 잠깐 보고 다시 집어 넣으려고 했어. 멋대로 만져서 미안..." 벌을 받는 아이마냥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천천히 말해.... 머리 울려." 아파서 그런지 훨씬 가라앉은 저음이 방안에 울리면서 머리에 손을 짚고 말하는 녀석의 폼이 꽤나 멋있어서 한동안 넋을 잃고 쳐다봤다. "그....런데... 이 사진들...... 누가 준거야?" 뜸을 들이다가 한참 만에 말한 내 물음을 들은 세야녀석의 표정이 그와중에도 무척이나 험악하게 구겨졌다. 내가 묻고 싶었던 것은 저 사진속의 나아닌 다른 주인공을 알고 싶었던 것일 뿐이었다. "유......승하...........!!!!" 녀석의 목소리가 매우 낮게 으르렁거렸다. 나는 또 다시 내가 무슨 말실수를 했는가 싶어 방금했던 말들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하지만 암만 생각해도 저 녀석이 화낼만한 말을 한건 아닌 것 같은데;;; "지금.......장난해!?" 그러나 녀석의 표정은 너무도 명백히 자신이 화가 나 있다고 말해주고 있어서 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칠 뿐이었다. "지금 이 사진들이 누가 준거냐고!? 너..... 일부러 그러는 거냐.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척 하려는 거냐!" 두......둘다 아닌데. 나는 그냥 순수하게 물었을 뿐이라고...!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쪽은 이쪽이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화가 나는건지...!? 놈은 분명 아픈몸이 틀림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힘 하나는 넘쳐나는 것인지 뒷걸음질 치는 내 손목을 잡아챈 후 침대로 질질 끌고갔다. 이......이자식 왜이래!? 설마 침대에 울려놓고 죽도록 패려고!? "네가.........자청한거야. 유승하......." 이를 악물고 말하는 세야녀석을 보며 지금 녀석이 상당히... 그것도 감당할 수 없을만치 화가 나 있다는 걸 깨닫았다. 사.......살려달라고 소리칠까? 맙소사... 난 그저 프린트를 전해주러 왔을 뿐이라고!! ".....지...진정하는게 어때? 우리 대화로..." 퍽!!!!! 세야의 주먹이 내가 내팽겨진 침대 위에서 정확히 내 얼굴 옆 배게를 강타했다. 상당히 푹신한 배게임에도 불구하고 퍽소리를 내며 내리쳐지는 걸 보고나니 나는 심장이 오그라 드는 것을 느끼며 벌렸던 입을 다시 꾹 다물었다. 녀석이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너 아프다며.....!!! 그런데 갑자기 왜 이렇게 쌩쌩해지는 건데!!? 투두둑........툭........!! 순간 나는 내가 입고 있던 마이의 단추들이 뜯겨나가는 걸 넋놓고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즘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튿어버리는 세야놈의 괴력엔 두손 두발 다 들었다지만..... "야.......너.........너 지금 뭐하려는 거야!?" "입.닥.쳐." 평소엔 잘 쓰지도 않던 거친말을 내뱉으며 세야놈은 어젯밤 내가 밖에서 추위에 와들와들 떨며 무궁화표 빨래비누로 힘겹게 빨은 내 와이셔츠에까지 손을대고 있었다. 부욱....!!!!! 이.......이젠 아주 찢는구나. 이자식이!! 가뜩이나 가난해서 와이셔츠도 한 벌밖에 없는데 이게 무슨 짓이야!!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서 녀석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세야놈이 먼저 눈치를 채고는 재빨리 내 두손을 자신의 왼손으로 얽매는 바람에 꼼짝없이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이 손 놔!!" 이젠 앞뒤 잴 것도 없었다 어서 빨리 이 녀석에게서 벗어나는 것만이 유일하게 내 목숨을 부지할 길이었다. "입 닥치라고...했지....!!" 놈이 으르렁 거리며 남은 한손으로 내 마지막 남은 와이셔츠의 단추를 튿어 내리고 바지버클에 손을 가져갈 때였다. 끼이익........쾅!!! 우르르륵........... "......너희들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아씨! 형 뭐야!! 왜 갑자기 올라왔어!? 한참 잘나가고 있는데 막판에 초치면 어쩌자는 거야!! 지금이 막 하이라이트 부분이었는데!!" "...어......큰형..... 언제 왔어?" "............" "............" 침대 위에서 저항하던 나도..... 그 위에서 옷을 찢고 있던 세야녀석도 모두 할말을 잊었다. "..제길...!!!" 세야녀석이 낮게 욕설을 읇조렸다. 털썩.... 그러더니 내 몸위로 맥없이 쓰러지는 것이었다. 내 목덜미에 닿은 녀석의 숨결이 꽤나 거칠은 것으로 나는 뜨끔 놀랬다. 역시......많이 아픈 상태에서 힘을 쓰기는 힘들었던 것이었나 보다. 그나저나.........저 사람들은............ "그래..꽤 많이 놀랬나 보구나." "아....예. 조금 많이 놀랬습니다." 현재 내 앞에서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세야의 큰 형님이었다. 세야보다 약간 더 크고 머리를 깔끔하게 컷트 친.. 상당히 단정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세야녀석과 엄청 닮아 있었다. "편히 앉아." 슬쩍 미소를 띄고 권유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상당히 신사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동생들이 여러모로 너에게 폐를 많이 끼친 것 같구나. 특히 세야의 일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네....덕분에 내 한 벌 밖에 없는 마이와 와이셔츠의 앞부분이 왕창 뜯겨져 나갔습죠. 게다가....... 나는 생각을 멈추고 흘끝 옆을 쳐다보았다. 내가 앉은 옆에는 침대가 놓여있었고 그 위에는 쓰러진 세야녀석이 가지런히 눕혀져 있었다. "형.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거야? 쪽팔리게 쓰리 이런건 왜 시키는데...." "세진형 그냥 조용히 해. 그게 현재로썬 그나마 가장 나은 방법이니까." 차남인 세진형이 투덜거리자 그 옆에서 세현형이 조용히 대꾸했다. 현재 두 사람은 무릎을 꿇고 손을 위로 들어올리는 벌을 받고 있었다..... "너희들은 후에 세야가 깨어나면 어떻게 뒷감당을 할건지나 생각해둬라. 특히 세진이 넌.... 각별히 조심해야 할꺼다. 그리고 세현이... 세진이가 철딱서니 없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너마저 그러다니 조금 실망이구나." "하하......세이형......... 하나뿐인 내 아우가 어떻게 하나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흠.... 아묻튼 승하 너에겐 많이 미안하다." 시끄러워! 이 배신자들! 자기 동생이 뭔짓을 하는지 몰래 엿보면서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뜯어 말리지도 않았다니!! 당신들이 그러고도 형이야!? 엉!!? 물론 속으로는 엄청 씹어댔지만 별 수 있나........ 속으로는 사시미를 17번도 더 갈았지만 겉으로는 차분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무사하니까 된거죠." 그래......무사하면 된거지. 만일 그 상태에서 옷이 다 벗겨지고 이곳저곳 구타 당했다고 생각해봐. 그 얼마나 끔찍한가.... 그나저나 꼭 옷을 벗기고 때리려고 한 이유가 있었을까? 세야녀석.. "저.....그런데 혹시 이집에는 여동생이 없나요? 아니면 세야보다 한살 정도 더 많은 누나라도.." 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세이형님이 의아한 낯빛으로 대답했다. "아니.... 우리집에는 모두 남자형제들 밖에 없는데.... 이 집안에서는 세야가 가장 막내이고.." 으음.....이상하네.... 그럴 리가 없는데..... "저 그럼 친척분들 중에는......." 내가 다시 묻자 이번에는 벌을 서고 있던 세진형이 대답했다. "우리 친척들 중에서도 여동생은 한명도 없어. 위로는 누님 몇분이 계시긴 하지만." 나는 세진의 설명을 듣고도 의아함에 책상쪽을 힐끔했다. "그런데......갑자기 그런건 왜 묻는거니?" "......아...아니......저기 세야의 책상위에 올려진 액자에 있는 아이가 누군지 궁금해서요...."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면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는 낯설지 않은 이 분위기에서 슬그머니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이 방에 있는 물건들의 주인이 누구라고 생각하니? 승하야." ".....그야 세야....아닌가요?" 내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자 세진형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한번 나를 쳐다봤다. "그런 건 잘 알고 있으면서 왜 정작 중요한건 빼먹는거야? 저 녀석..." .... 정작 중요한 거? "세진이 너는 입 다물고 팔이나 똑바로 올리도록 해라." "제길...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진거유... 나만 이리 박대하게." 세진형은 툴툴거리면서도 팔을 위로 번쩍 들어올리는 것이 그래도 형의 말은 곧잘 듣는 모양인가보다. 곁에서 세현형이 벌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죽비죽 웃으며 나를 쳐다보는 것이 심상치 않다. "사직속의 아이가 무척이나 예쁘게 생겼지?" "아....예!!" 즉각적으로 튀어나온 나의 대답에 세현형은 다시 한번 재밌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음........" 그와는 반대로 내 앞에 마주 앉아있는 세야네의 장남 세이형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하긴........저 때 만해도 내말도 잘 듣고 고분고분할 때였지." 세진형 역시 빠지지 않고 한마디 덧붙였다. 왠지 저 사진에는 내가 모르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나는 그 비밀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기도 하고 추측도 해보는 둥 나름대로 머리를 쥐어짜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럴듯한 이유를 댈 수 없었다. 이들이 왜 이러는 것일까? "혹시 저 사진이 세야의 어릴적 사진이라도 되나요?" ".........." ".........." "..........음....." 그냥 농담삼아 꺼내본 이야기였다. 그런데..... 대체 이 반응들은 뭐란 말인가!? "저....정말요?" 하하... 이 사람들 재치 있으시구만. 농담 한 번 하니까 외려 다시 되돌리는 것 좀 봐. 분명 나를 놀리려고 하는 것 같은데..... ".............." ".............." "...........으.....흠......." "말도 안돼!!!!" 나는 소리를 빽질렀다. 맙소사!! 그럴 리가 없어! 저 녀석이 어떤 녀석인데 사진속 그 아이라는 거야!? 게다가......게다가.....분명 상대는 여자애였다고!! "난...이만 내려가 볼게." "큰형이 잘 좀 말해봐." 으악! 거짓말! 거짓마알!!! 이 거짓말쟁이들!! 나는 눈앞에 앉아 있는 이 방안에서 그나마 제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세이형에게 눈길을 돌리며 제발 아니라고 부정해주길 바랬다. "...괜찮다면.........앨범 보여줄까?" "..........." 아......눈물난다. 굳이 앨범으로 확인할 필요도 없어보였다. 저리도 진지한 표정을 보니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깨닫을 수 있었다. "그래서........그랬던 거였어?" 처음 만났던 날에 한눈에 나를 알아 본 것과... 수학여행 때도 영문모를 말을 했었던 거라던지.......... "승하야...." "................" 세이형은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하는 나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난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 건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척이나 허탈한 심정만이 들뿐이었다. 나에게 쵸코케잌, 고구마빵, 크로와상등 기타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함께 무척이나 예쁜 미소를 지어주었던 그 아이가..... 바로 세야녀석이었다니....... 딸기무스케잌도.......쿠키도...... 모두 내게 주었던........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했던 그 아이가 세야.....녀석이었다...니. 젠장!! 이건 사기야!! 그아이가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냐고! 나의 xx는 하얗고...!! 물론 지금도 하얗지만... 코도 오똑하고..!! 저 녀석도 깎아 내지른 듯 반듯한 코를 지니긴 했지만.... 눈도 까맣고 초롱초롱.... 그야 저녀석도........ 제길 지겹다!! 어찌됬든 다르단 말이야!!! 혼자서 말은 못하고 수시로 욹으락 붉으락 얼굴색이 변하는 나를 세이형이 딱하다는 듯이 바라보았지만 지금 그런거 신경쓸 기분이 아니다. "아무래도 당사자들끼리 대화를 나눠보는게 가장 좋을 것 같구나. 그동안 할말도 많이 쌓였을테고........" 세이형이 차분한 어조로 말하더니 몸을 일으켰다. 나 역시 그런 세이형을 보고 주춤하니 몸을 일으키니 세이형이 잠시간 무언갈 고민하듯 표정을 굳히다가 곧 나를 보고는 안심하라는 듯 빙그레 웃으며 다정하게 조언을 건냈다. "우리가족은..... 그다지 이런 것에는 편견을 가지지 않기로 했으니까 둘이서 잘해봐라." "..........." 이런....것? 어떤 것? 편견? 둘이서 뭘 잘해요? 분명 상냥한 어조에 나를 위로하려했던 말이 틀림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세이형의 말에 더할나위 없이 흉악한 무기로 내 심장을 후벼놓는 것과도 같은 충격을 느껴야 했다. 달칵............... 문이 닫히고 세이형이 나가고 난 후에도 여전히 심란하다. 이대로 그냥 집에 갈까? 아니........아니야.... 그럼 아래층에 있는 분들에게는 뭐라고 말한단 말인가. 정작 이 모든일의 당사자인 세야놈은 자신의 넓은 침대위에서 쥐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일어나.........일어나란 말이다!! 이 자식아!! .. 스륵........ 화가나서 속으로 외쳤다고 한 말이 밖으로 튀어나갔을지 모를 일이다. 정말 거짓말 같이 순간 세야녀석의 눈꺼풀이 살짝 올라가며 흐릿한 눈동자로 내쪽을 쳐다보았다. 나는 설마 내가 속으로 내지른 말을 녀석이 들은게 아닌가 싶어 흠칫해야했다. 저 녀석.. 이제는 독심술도 할줄 알게 되었나? 세야녀석은 몇 번 눈을 깜빡거리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말라..." 순간 나는 어머니께서 내속에 들려 올려보내신 쟁반 위에서 물컵을 찾아 물을 쫄쫄쫄 따라서 녀석의 면전에 갖다 바쳤다. 아픈 사람에게 박정하게 대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머....먹여줘야 하나? 녀석의 얼굴을 보니 왠지 측은해 보였다. 나는 한숨을 쉬고 녀석에게 다가가 배게를 받쳐주고는 머리를 일으켜 주었다. 이럴 때 세야녀석은 영락없이 아픈 어린애같았다. 비록 덩치는 어마어마하게 크고 평소라면 절대 상상도 못할 일이겠지만.... "너....상냥하구나. 그때처럼......" 녀석이 흐릿하게 감긴 눈으로 고개를 창가에 돌렸다. 상냥........하다구? 그런 소릴 네 입에서 듣게 되다니..... "네가.......정말 사진속의 그 아이야?" "..............." 아앗!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엄마가 곤란에 빠진 사람은 도와줘야 한다고 했어. xx 야 내일도 놀이터에 나와서 같이 놀지 않을래? 세상에서........네가 제일 좋아. 정말이야. 하늘 땅 모두 합쳐도 모자를 만큼, 이마안큼이나 너를 좋아한다구. 진짠데........ xx 야 그럼 너 내 색시하지 않을래? 원래 결혼은 서로 좋아하는 사람끼리 하는 거랬어. 그럼 xx야 내가 이걸 줄테니까 절대 잊어버리지 말고 손에 꼬옥 끼구다녀. 알았지? 이건 내가 널 무지 많이 좋아한다는 표시니까!! 잃어버리면 안돼! 알겠지? ... 진짜지? 진짜 나랑 결혼할꺼지? 절대로 안 잊을테니까 꼭 나랑 결혼해줘야해! 약속이다! 이 반지 잃어버리지마~!!!! 이거 우리 결혼반지인거다!!!!!! 그런데......너 이름이 뭐야? .... 계.....세야.... 세야...? 와아.....예쁜 이름이다. 내 이름은 승하... 유 승하야... 갑작스레 엉망으로 뒤엉켜서 언뜻 언뜻 생각나던 옛 기억들 속에는........... 분명 녀석의 이름이 존재했다........계.......세야......... "세야야..........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아?" 어느 순간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정작 말한 당사자인 나도 놀라 헉하니 숨을 들이 쉬었고 고개를 창가로 돌리고 누워있던 세야 녀석도 놀란 눈초리로 내쪽을 쳐다보았다. "너........" 아릿했던 기억속의 아이가 점점 뚜렷해지면서 눈앞에 있는 녀석과 오버랩된다. 이 빌어먹을 입이 방금 전과는 달리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왜 갑자기 이런 말을.....내가 정말 돌았구나. 녀석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약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 위에서 쓰러졌다가 침대위로 눕혀진 세야녀석이 다시 몸을 일으키자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어 침이 꼴딱 넘어갔다. 녀석은 약간 어지러운 듯 머리에 슬쩍 손을 대더니 곧 이어 나를 봤다. 와락!!! "...꿹?!!" 녀석이 나를 덮친 것은 순간이었다. 워낙 날랜 몸놀림 이었기 때문에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내가 생각해도 엄청 민망하고 괴상한 비명과 함께 녀석에게 안긴 상태로 바닥에 주저 앉았다. "너 이자식;;...갑자기......왜 그래!" "다시......다시 말해봐." 나를 껴안은 녀석이 내 머리위로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 그 음성이 상당히 떨리고 있다. "무...무얼?" 녀석이 더욱더 꽉하니 자신의 팔로 내 몸을 조여온다. 녀석의 품은 상당히 뜨겁고 편안했다. "방금 전에 했던 그 말..." "너....이자식.....?" 머리 위에서 작은 한숨소리가 들렸다. "그거.......말고....." 그럼...또 뭐? "세......세야야 세상에서 내가.....제일 좋아?" 후끈.....후끈............ 말해놓고도 심히 쪽팔리고 민망한 말이었으므로 지금 나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 꽈아아악........... 켁!! 나 숨막혀 죽는다! "......기다렸어......줄 곧......... 기다리고 있었어." "..........." "이곳으로 올라오고 나서도 계속.......계속 너만 기다렸어. 언젠간 다시 만날거라고.....못 만나면 내가 직접 너를 찾아가려고까지 생각했으니까........" 세야가 잠시 말을 멈추고는 내 머리칼에 손을 집어 넣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래서.......네가 나를 알아보지 못했을 땐 화가났다......너를 죽여버리고 싶을 만치...." 오싹...... 내가 흠칫하는 걸 느꼈는지 나를 감싸안은 팔이 한순간 느슨해졌지만 다시금 꽈악 조여왔다. ".....너를 그냥 포기할까 생각도 해봤는데......." 스윽...... 녀석이 수그린 내 고개를 들어올리고 눈을 마주쳤다. 상당히 깊고....맑은.........두 눈동자.. "네 녀석을 볼 때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어서........ 내 자신에게도 화가 나." 두근..........두근......... 나는............나도.....너를........... "유승하... 너를 사랑...해....." ...... 그 뒤로 이어지는 녀석의 부드러운 키스가...........나는 왠일인지 싫지 않았다. 녀석의 고백이.........몹시나 놀라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상외로 담담하게 세야녀석의 키스를 받아 들였던 것 같다. 사실은..........내쪽이 훨씬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랄까........... "....이거......꿈 아니....지?" 꿈일 리가 없잖아. 내 앞에서 한없이 깊은 눈동자로 쳐다보고 있는 녀석은 분명 세야녀석이다. 녀석의 입술과 내 입술사이에 이어져 있는 이 가느다란 실도 분명.....꿈은 아니다. "그러니까......나는..........나는..........에....그러니까....... 나도 세야 네가 정말 좋아. 하지만 잘은 모르겠어. 이게 좋아하는 건지.......어떤 건지는.........물론....너는 내 어릴적 첫사랑이기도 했고 네 녀석을 보면 갑자기 심장박동수도 빨라지고 이유도 없이 얼굴이 달아오르기도 하고...윽.....그......그러니까..." 정신이 혼미하고 무슨말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뒤죽박죽 이 상황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눈앞에 있는 녀석은 세야녀석이고........ 지금 말하는 건 나고.... "...좋아하는거야." "...아?" "너도 나를 좋아하는 거라고. 이런거 너에게 직접.......말해주지 않으면 너는 평생가도 모를테니까. 이미 나는 충분히 기다릴 만큼 기다렸어. 그 이상은 사양이야." 나도.....세야녀석을 좋아하는 거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평생가도..........모를꺼잖아......" 한숨쉬듯 잔잔히 울리는 저음..... 다시 한번 더 녀석의 입술이 와 닿았다. 나는 그 키스 한번으로 그동안 겪은 모든 혼란이 ........순식간에 사라져감을 느꼈다...... 내가 이녀석을 보면 두근거렸던 이유와.....은근슬쩍 신경쓰였던 이유 모두.... 이 녀석을.....좋아해서....그런거였다구? 두근.................두근..................... 이렇게 제멋대로 방망이질 하듯 두근 거리는 것도......모두.............이 녀석 때문에? 왜........이제야 확실하게 깨닫는거지? 나도...............나도 실은 좋아한다는걸...... 이.......녀석을 좋아한다는걸....... 정말......평생 이 감정들을 모른채 살았을까? 흠칫!!!!!! 순간 내 얼굴은 심하게 화끈 거렸다. 비.........빌어먹을..................맙소사!!! 내가 지금............ 하....한송이의 수줍은 꽃같이 얼굴이 붉어지는 걸 보면 ..............정말인가봐............... 무엇보다 분명한건 지금 이 녀석이 내눈에 뭐가 씌인듯 무척 멋있고 아름다워 보인다는 것......... 그리고 조금 전보다 지금이 훨씬 더 좋아졌다는것........... 아니.......세야 네 녀석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좋아질 것 같다..........그때보다 훨씬 더 많이.........말야............. 나는 확실하지 않으면 선택하지 않아.... .........좋아......해.............좋아해!!! 너를.......세야를.....좋아해...........!!! 좋아한다..................구.................. 맙소사!! 이건 완전 패닉이야!! 이제까지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아니;;;;;;;;;;; 알면서도........정말 모른척 한건 아니었을까? 녀석도 흔들리는 내 표정을 알아차렸는지 몸을 더욱 가깝게 밀착시키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그때의.......약속은.....꼭.....지킬게." 짧은 키스와 혼란스러움으로 멍해진 나에게 세야녀석이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한 말......... 약......속 이라고? 그리고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세야네 가족들의 더 있으라는 끈질긴 권유를 물리치고 겨우겨우 집으로 돌아간 그 다음날에 알 수 있었다. 나는 벽지가 벗겨진 천장을 보며 멍하니 누워있었다. 어젯밤 일들이........마치 꿈과도 같다. 정말.......그런 일이 있었던걸까? 내가...........만들어낸 환상같은거 아니었을까? 실제로 그런일 따위........생길 리가 없는데............나 혼자만의......상상......이었다면...... 진......짜였을까나....? 쾅쾅!!!!! 쾅!!!! 나의 잡념을 깨기라도 하듯 누군가가 난폭하게 문을 두드렸다. 우씨.......누구야? 가뜩이나 머리에 열올라서 아파 죽겠는데.... 주인 아줌마가 이번 달 밀린 방세를 받으러 온건가? 아닌데.... 이번 달 방세는 분명 냈었던 것 같은데.... 술주정뱅이 정씨 아저씨? 노노.......그 아저씨는 지난번에 술취해서 길가에 앉아 있다가 지나가는 차에 치여서 한동안 병원신세를 지고 있다 들었거늘.......... 덕구네 아저씨 쌀 외상도 갚았고....... 제길;;; 딱히 문 두드릴만한 놈이... 아묻튼 저렇게 문이 부서져라 치는 놈치고 좋은 용건으로 오는 놈은 경험상 한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 나는 속으로 씨부렁 거리면서도 소리쳤다. "네에! 나가요! 나가~!!" 젠장..... 소리치니까 또 머리가 띵하잖아. 휴일이라서 늘어지게 자려고 했더니만.... 아침부터 뭔 일이냐? 벌컥!! "누구!!!.........어....?" "나와." 전에도 이런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이번에는 수학여행도 안가는데 얘가 여기는 왠일이냐;;; "....뭐 해. 빨리 나와." 내가 멍한 표정으로 어정쩡하게 서서 한참 동안 세야녀석의 얼굴을 쳐다보자 세야녀석이 눈썹을 살짝 들어올리더니 다시 한 번 재촉했다. 어제........그거............정말 있었던 일이긴 했나보다. 안 그러면 이녀석이 내 눈앞에 나타날 이유는 전혀 없지. "어..딜 가는데?" 아침부터 다짜고짜 찾아와서 전혀 미안한 기색도 없이 나오라고 하는 세야녀석을 보며 나는 입만 헤벌렸다. "....우리 집." .... 우리......지입? "너....너네 집은 왜 가는건데?" 어제의 일이 새삼 떠오르면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감기는 다... 나은거야?" 이렇게 쌩쌩히 처들어온걸 보니 다행히도 다 나은 듯 싶었지만...... 어제의 키스로 덕분에 나는 왠지 머리에 열이 있는 것 같다. ... 이녀석한테 옮았나? 세야 녀석은 집안으로 들어와 방안을 훓어보더니 뭔가를 집어 들고는 말했다. "이것 외에는 딱히 가져갈 것도 없는 것 같군...... 너는 그냥 몸만 와." 이.....이자식!! 신발이나 벗고 방에 들어오란 말이다! 가뜩이나 오늘은 몸상태도 안 좋아서 밖에서 걸레 빨려면 얼마나 힘든데!! 나아쁜놈! "....하아............" 녀석은 잠시 한숨을 쉬는 듯 싶었다. 그러더니 대번에 나를 엎어 매는게 아닌가!! ...........너 나 좋아한며!! 그런데 이런 시츄에이션은 또 뭐야아아아!!! 너무나 순식간의 일이라서 그 상태에서 입이 뜨헉하니 벌어졌다. "뭐하는 짓이야!! 야! 빨리 내려놔. 너 이자식!!" "세야라고 불러." ".......아....?" "그때처럼 세야라고 부르라고." 세.....세야야아아......아? 지금 나 얼굴이 엄청 붉어졌겠지? 이....이름을 부르는게 이렇게 요상한 일이었나? "아...알았으니까 내려줘." "이름 불러. 그때까진 이대로 갈꺼니까." 이.......이 자식!! 나 좋아한다는 말 다 개구라지 그거.....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확 변해도 되는거야? 왜 갑자기 이렇게 뻔뻔하고 철판 깔은 능구렁이가 되버린거냐고오!!! "세...야야...아........나 좀 내려주면 안되겠냐?" 맙소사....... 이 무식하게 힘만 센 녀석같으니.... 도대체 그 사이에 얼마나 걸어온거야!? 그러고도 네가 정녕 인간이냐!! 세야녀석은 일단 걸음을 멈춰서서 나를 땅에 내려 주었다. "헥....헥...........그러니까........내가 왜 너희집에 가야하는지 설명해.....줘...." 힘쓴건 녀석인데 왜 이렇게 내가 다 숨이 가쁘다냐;;;; "너희집 아니야. 우리....집이야." 너희집이나 우리집이나..... 그게 그거지. "그래...그래. 갑자기 우리집에는 왜 가는건데?" 그러자 세야녀석이 기가 막힌다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봐;;; 이봐;;;; 정작 기가막혀야 할 사람은 나라구! 나!! 내가 갑자기 너네 집에는 왜 가는건데! 너희집은.......... 어제 한 번 간걸로 족하다구. 모두 좋은 분들인건 틀림없지만......... 뭔가가...찝찝한게...........쑤...쑥스럽다고 해야하나? "우리집이니까 가는거지. 그럼 누가 간단 말이지?" 가만.........말의 어감이 이상한데........ "우리..........집?" 설마.......여기 서 있는 우리? 그 우리가? 너하고..나? "알아들었으면 빨리 따라와." 텁썩..!! 녀석에게 손목이 잡혀 질질 끌려가는 동안에도 나는 아연실색 할 수 밖에 없었다. 에이.........설마...... 이 녀석도 농담한번 끝내주게......치는거 맞아? 녀석이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세운 뒤 나를 태우고 어디론가 향했다. "................" "거기 가만히 서있지 말고 들어와." 녀석이 나를 끌고 온 곳은 어느 고층아파트의 7층이었다. 그것도..........최근에 지어진 듯.... 깨끗하다. 세야녀석이 난생 처음보는 기계에 카드를 긁자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치....친척 형님네 집인가? 그.....그런거겠지? 하하하....하......... 발을 들이자 집안에서 단박에 알 수 없는 시원한 향기가 풍겼다. 에어컨이라도 켜놨는지 실내는 적당히 쾌적했다. 그리고.......정말이지...........내 단칸방하고는 비교도 될 수 없을만치 넓다. 물론 세야네 집에 비해서는 무척 작은 편이긴 했지만...... 맙소사.... 이거 몇평짜리야? 주춤거리면서도 안으로 들어와보니 온갖 가구는 옵션이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처음 보는 가전제품들도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것은 냉장고! 맙소사!!!! 저렇게 크고 세련된 냉장고라니...........!! 어흑흑흑...... 너같은 냉장고를 내가 직접 보게 되는구나!! 한참동안 냉장고에 넉이 나가서 침을 줄줄 흘리는 나를 보고 세야가 오해를 했는지 한 마디 했다. "배고프면 안에 음식이 있으니까 꺼내 먹어. 침....닦고." 쓰..읍..... 제길;; 배고파서 그런게 아니라고. 단지 좀 깊은 감명을 받았을 뿐이지.......쩝;;; "마음에 들어?" 뭐가? 저 냉장고? 당근 맘에 들지. 그런데 여기 주인 어디로 가셨다냐? 이렇게 막무가내로 남에 집에 들어와도 되는거여? 그러다가 주인이라도 돌아오면 어쩌려고;;;; 그래도 냉장고 하나만큼은 정말 끝내주는 구나. 다른 이름 모를 가전제품들도 좋은 것 같기는 하지만. "이제부터는 여기서 살 거야. 카드는 내가 줄테니까.." "....뭐!?...." 세야녀석이 방금 뭐라고 했당가? 여기서.......살거라고? 여.....기서? "...뭘 그렇게 놀라지? 말했잖아. 우리집이라고. 다시 한 번 말해줄까? 여기가 우리집이야. 너와 나의 집." 너와.........나의......집!? 세야녀석은 그럴줄 알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는 또 다시 한숨을 내쉰다. 요즘들어 저 녀석의 한숨쉬는 모습을 꽤 많이 보는 것 같다. "그럼 그렇지. 어차피 순순히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도 안했지만........둔한 건 어쩔 수 없는건가?" ".....어떻게...........?" 세야녀석이 시선을 약간 돌린 채로 조금은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다... 뚱한 것이 아니라 약간 쑥스러운 듯이...........? "너와 헤어지고 나서부터 부모님께서 주시던 용돈과 아르바이트 비를 적금들여서 샀어. 나중에.....꼭 내가 직접 마련한 집으로 데려오고 싶었거든.......물론 너를 말야." ".........아....." .........데려오고 싶었다라고.........나.......를? 나.....를 말야? 뭐라고 말해줘야 할 것 같은데...........갑자기 목이 메여서 아무 말도 안나온다. 이러면 안되는데 쪽팔리게 눈물도 나는 것 같다. 또다시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린다. 너무 빠르게 두근거려서........어쩌면 가슴이 터져 버릴지도 모르겠다. 너.........이렇게 내 주위를 맴돌면서 줄 곧 나만 생각해왔었던 거였냐........? 나는 어쩌면 너를 잊어버렸는지도 모르는데....... 세야 네 녀석은.......잊지 않고......... 어젯밤........그거...........그것들 꿈이 아니었구나...... 그것은 무척이나 갑작스럽고.........설레이는 일이어서.... ...... 으윽......... 눈물이 멈춰야 하는데..... 이놈의 눈이 고장이라도 났나;;;; "울지마....." 녀석이 혀로 내 눈물을 핧아내렸다. "승하야........." 차마 네 녀석에게 이렇게 내 이름이 부드럽게 불리우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나......절대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고......... 미안.........미안....세야야..........그 동안 너 나쁜놈이라고 욕했었던 거랑, 널 알아보지 못했었던거 모두...... 모두 미안..........하다. 좋아하는 감정이 더욱 선명해진다.........이......러면 안되는거 아닌가;;; 나........나란 녀석은 도대체가;;;;;;; "손......내밀어봐." 늘 무표정했던 세야의 표정이 너무도 다정하고 따스해서 나는 어느새 무의식중에 손을 내밀었다. 달칵........ 언제 준비했는지 반지함이 열리면서 그 안에 낯익은 반지가 보였다. 지구방위대 특공 땅의 반지........였다. 빛바랜 플라스틱 초록 큐빅이 한가운데에 박혀있는...........내가 녀석에게 준 반지였다. "네가........나에게 준 반지....야. 약속......했었지? 나중에 다시 만나면 너와 결혼할거라고......말야."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끄윽거리면서 세야 녀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야는 슬핏 웃더니 다른 한손으로 나의 보석함을 보여주었다. 언.......제 저걸? 아까...집은 물건이 저거였나? “수학여행 때........기뻤다. 네가 이걸......가지고 있는거 보면서.......실은 참기 힘들 정도로 기뻤.....다. 이제는 끼려고 해도 안 맞긴 하지만 말야......” 쑥스럽게..........귀가 빨개져서 말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정말.........정말...........현실인걸까? "울리려고.....한 건 아니었는데......" 세야의 난감한 듯한 목소리가 머리위에서 들렸다. 나........울고 있었나? “......같이......있어 줄꺼지......?"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내 눈가를 훓는다....... "..................." ...... 나는 녀석에게 대답 대신으로 키스를 했다. 당연하잖아..............난 이미 네가 좋다는 걸 알아버렸다고. 이제와서......놓아줄리 없잖아. 누가 뭐래도 나는 깡따구도 쎄고 고집도 쎄고....그리고 질긴녀석이라구. 이젠 세야 네녀석이 싫다고 해도 이쪽에서 사절이야. 끝까지.......끝까지 곁에 있을거니까.........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너를......... 이봐.........그거 알아? 내 기억속의 너는.......언제나 내 신부 1등 후보감 이었다는걸.......... 물론....지금도 말야... .......훗날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세야에게 고백했노라.. 세야야......내.......색시 해줘... < 어린날의 그놈은 the end.....> 에필로그... 요즘 나는 밤이 무섭다... 전에는 밤이 무섭다는 녀석들을 보면 콧방귀를 끼거다 그들의 심약한 정신을 비웃곤 했던 나였는데..... 이젠 내가 그런 비웃음을 당할 판이다. 그래도 차라리 밤이 그런 이유로 무서우면 나으련만..... 내가 말하는 밤의 의미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밤의 의미가 비슷한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무척이나 큰 실례이다. 나는 겨우 그딴걸 가지고 심약한 소리를 내뱉지 않는다. 문제는....... “....자자.” 눈앞의 녀석은 침대를 툭툭 두드리며 악마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녀석의 시선이 집요하게 나를 따라잡는다.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저 까만 두눈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무언가를 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긴 드는데....... 쫑긋한 귀하고 뒤에서 살랑거리는 꼬리만 있으면 딱 개x끼라고 해도 믿겠다. ...아니지.. 늑대인가? 저놈이 얼마 전까지의...... 그 무시무시한 녀석이었다는 사실은 차마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믿지 못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집안에서의 녀석은 밖에서 보던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으므로... 나는 방금 샤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처치곤란한 녀석에게 어찌해야 할지 난감해져옴에 따라 등뒤로 식은땀이 주룩 흘러내리는 듯 했다. 오늘은 또 무슨 핑계로 저 녀석을 조용히 잠재울 수 있을까......;;;; 그날 이후로 저 녀석은 상당히 저돌적으로 태도가 바뀌었다. 보고 있노라면 그간의 무뚝뚝함에도 불구하고 이 녀석은 상당위주의 행동파였다. 즉.... 말은 별로 하지 않되 행동으로 밀어 붙인다는 말이다. “그냥........자는 거지? 하하......하....” “.............” 내가 조심스레 물었지만 녀석은 시선을 회피하고는 대답하지 않는다. .....저런 썩을 놈!!!!!!! 나쁜 자식!!! 짐승같은 놈!!!!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아마 내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일그러졌을거다. 매일 밤마다 그(....)짓거릴 해대고 항상 죽어나는건 내쪽이란 말이다!!!! 이대로 또 순순히 불려가면 그 뒤로 벌어질 xx하고 xxx한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 뻔하고, 그리되면 나는 내일 죽어도 학교 못간다. 처음 녀석의 꼬임에 넘어가 했던게 약 두달 전이었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멍하니 있다가 순식간에 당해버렸는데....... .....그때 지른 비명만 해도 아파트 소음공해로 쫒겨 난다해도 할말이 없을 판이었다. 게다가..........육체적 고통은....... 생각하기 싫다. 끔찍하다...... 그 상태로 맷집과 깡따구라면 누구에게도 지지않을 자신이 있는 내가 학교에도 못나가고 약 4일동안 끙끙 앓았다고 한다면 말 다한거다. 더욱 더 민망한 일은........... 이 자식이 나에게 죽을 직접 만들어 준답시고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어머니와 아버지........그리고 어떻게 주워들었는지 세야의 형님들까지 옵션으로 줄줄이 딸려와서...... .......그 뒤는 생각하기 싫다. 그저 민망할 뿐이로다. (급기야는 세야의 사촌형인 담임선생님까지 문병을 오셨다....;;;) 사실은 세야네 가족들 모두가..........무척.....이나 다정해서...........많이 기뻤던 것 같다... ......혹시라도 거부당할까봐.........두려웠을지도.... 모르겠다. 아묻튼 그 일 덕분에 세야네 가족들이 온 날에는 이 세상에서 듣도 보도 못한 온갖 종류의 죽을 맛볼 수 있었다라는게 그나마 위안삼을 일인가? ......젠장!!! 내가 너무 순진했지. 이 늑대녀석의 무표정 뒤에 감춰진 응큼한 속내를 진작에 파악했어야 하는 거였는데!!! 그 뒤부터 녀석은 하루에 한번씩 할 것을 내게 거의 반강요하고 있다. 이제까지야 속수무책으로 별 도리없이 당해왔다지만 오늘만큼은 다르다! 오늘은 기필코 무슨일이 있어도 못하게 하리라.... 아니....하면 난 죽는다! 개근상은 이미 물건너갔다손 치더라도 전근상이라도 타야겠다!! 속으로 비분강개를 하던 나는 문득 기막힌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이거면 계세야 네놈도 꼼짝없이 그냥 자는 수밖에 없을거다!! “세....세야야........” 우욱..... 조까 재수없는 목소리긴 하다만 참아야 하느니....... 나는 억지 웃음을 만들어 내며 세야 녀석에게 다가갔다. 솔직히 녀석도 이런 내 모습은 처음인지라 약간 놀란 듯한 기색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도 잠시 곧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았지만........ 젠장! “오늘은......” 꿀꺽...... “내.......내가 위에 올라갈 꺼야!” 나는 무척이나 떨리는 목소리로 녀석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피식...“ 뭐야 이 자식!!! 그런 비웃음이라니! 뭐....... 아무렴 어떠냐. 내 몸 하나만 건사하면 되는거지;; 이정도 말해두면 상황을 보아하니 나에게 절대 깔릴 생각은 없는 것 같고 그냥 건전하게 잠이나 자는게 녀석에게 있어선 가장 최선의 선택일 것이었다. 나는 말그대로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무사히 지나갈 수 있겠구나~! 오호라 쾌재로세!!! 그러나 기쁨의 환호성도 잠시...... “그럼 해봐.” “.....에...?” .........방금 저 말 저녀석이 한거 맞지......? 어느새 녀석을 쳐다보니 입꼬리를 슬쩍 들어올려 비죽이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멋지다는건 무척이나 분한 일이지만.........지금 그게 문제냐!!! 이런 제길!!! “정말.........한다?” “....그래” “....진.......짜로 한다니까?” 녀석은 다시 한번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이렇게 되면 정작 조급해지는 내 쪽이었다. 이.....이자식!!! 정말로 하려는거야? .....장난인가 싶어 세야의 얼굴을 다시 한번 살펴봐도 아까의 웃음과는 달리 빌어먹을 그 무표정이다. 아니.....오히려 상당히............진지한 표정......이다? 나는 입술을 꾹 물었다. 하....할 수 있어!! 저 녀석이 비록 나보다 덩치가 더 크고 하다지만 나는 분명히 훌륭하게.... 이......이런 젠장!!! 이게 아닌데! “....버....벗어......” 아.....뽀다구 안난다. 어흑흑..... 그냥 자면 안될까? 세야야! 아니아니, 세야니임!! 녀석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입고 있던 윗도리를 벗어내렸다. 그에 따라 들어나는 날렵한 녀석의 몸매와 적당히 자리잡은 근육하며......상당히......관능적이다. 비.........빌어먹을!! 보고 있노라면 오메 나 기죽어다..........윽!! “뭐해?” 어느새 녀석은 다 벗은뒤 나를 보며 묻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아직 파자마에 손도대지 않은 상태......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꾸역꾸역 윗도리를 벗어야 했다. 그냥 싫다고 하면 혹시라도 모를 것을 괜히 제무덤 제가 파놓고;;; 정말 한심하다. 최대한 시간이 빨리 가길 바라며 느릿느릿 브리프 한 장을 남겨 놓고 다 벗은 나는 때가 왔음을 느꼈다. 이제 저 악마녀석의 품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나는 전혀 익숙하지 못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야!! 나는 한두걸음 뒤로 물러서다가 결국 입술을 꽉 물고 세야 녀석의 몸위로 돌진했다. 에라! 나도 몰라!!! 다다다다....!!!! 타악~!!! 녀석의 몸위로 뛰어드는 순간 갑자기 눈앞의 각도가 바뀌더니 어느새 내 눈앞에는 비릿하게 웃고있는 세야녀석의 면상이 보인다. “한번 하려다가 사람 잡겠군. 그렇게 달려들면 어쩌자는 거야? 너.” ......내가..... 왜 세야 녀석의 아래에 깔려있지? 분명히 저 녀석 위로 달려갔는데.......? 그러다가 나는 곧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 악마같은 놈의 분신이 어느새 내 아래쪽을 쿡쿡 찌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안돼!! 오늘은 못해!! 죽어도 안돼!!! “내.....내가 위라니까!!!!!!” “그래 알겠어. 네가 위야.” 무표정의 대명사 세야 녀석이 빙글빙글 웃으며 순순히 양보하는 폼이 왠지 심상치 않다. “네가 위로만 올라가면 되는거지?” ........얘기가......그렇게 되나? “....그...그래!! 내가 위야!! 위라고!!” 알게 뭐냐! 무조건 위 차지하면 장땡이지. 지가 어쩔겨!! ........피식..... “빨리 해봐.” ......빨리...........해야하긴......하는데............... 우......우선 녀석이 평소 하던데로 입술 박치기부터 시작해서.......... 슬쩍 입술을 맞대긴 했는데.........그 뒤부터는 백지다..;;;;;; 세야놈은 내가 이럴줄 알기라도 했다는 듯이 오히려 내 뒷머리를 감싸며 내 입안을 열고 침투해 들어왔다. 분명.....내가 위긴....한데............. 그동안은 서로가 많이 서투른 키스였는데 이젠 살을 맞붙이고 살다보니 어느새 상당지경까지 늘어난 것 같다. 아마....나보다도 녀석쪽이........ 뜨끔...뜨끔.......... 키스를 다 마치고 나서 엉덩이를 무언가가 찔러오는데 나는 그것의 존재가 무엇인지 알아채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니.......그간의 경험을 통해 잘 알 수 있었다. 싸아악......... 핏기가 가신다. 눈앞의 녀석은 여전히 악마같은 미소를 짓고 있다. “직접해. 위에서 한다며?” 빙글........빙글..............웃고 있는 녀석의 사악한 미소가.......뭔가가 잘못 되었다는걸 알려주었다. “.......내.......내가 말한 위는 이런 의미가 아니라.........!!!” 말하다보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결국 말문이 막혀서 아무말도 못하고 어버버 거릴 쯔음 귓가에 세야 녀석이 부드러운 울림이 있는 저음으로 속삭인다. “너는 그래서 안되는거야.....쿡.......” “..................” 세야....너.........이 자식! ......당.....했다!!!!!!!!!! 결국............나는 그 빌어먹을 ‘위’라는 말 때문에 그날 밤 원치 않는 자세에서 녀석에게 몇 번이나 봉사를 해야했고, 다음 날에 파김치가 되어 학교에 못나간 건 말할 것도 없다. ...이런 그지같은!! 내가 색시해달랬지 언제 변강쇠가 되랬냐고오오!!!!!!!! 어린날의 그놈은 외전 부제 : 다시 만날 때까지... 새로 이사온 집은 전에 있던 집보다 작았지만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형들은 벌써 자신들의 방을 정리하는데 관심을 기울이느라 밖을 둘러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듯 보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그렇듯 모임에 나갔는지 안보였다. 실은 세야도 그냥 집안에 있을까 생각 중이었지만 집안에 있어봐야 딱히 할일도 없다는 걸 깨닫았다. 세야는 별 말 없이 집안에서 나와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주변에 보이는 집들은 전에 있던 곳에 비해 상당히 낯설었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세야의 발걸음을 자꾸만 부추겼다. 보통 이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 호기심과 모험심을 가지고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주변 지리에 대해 익혀놓으려고 생각중인 세야였다. ‘조금만 더 둘러보고 가야지...’ 여름이라 그런지 도시에서는 듣기 힘들었던 매미라는 곤충의 날개 부비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매-엠 매-엠” 입으로 천천히 그 소리를 따라 중얼거리며 한참을 걸어가던 세야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잠시간 멈칫했다. 뒤를 돌아보니 꽤나 멀리 왔는지 자신의 집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집은 하얀 이층집이었는데....’ 발길 닿는대로 주위를 둘러보며 가다보니 이상한 골목길 같은 곳에 있었다. 골목길 옆으로는 자신의 집은 보이지 않고 옹기종기 모인 판자(스트레이트 지붕...) 비스무리한 것들을 덮어 놓은 집들이 눈에 띈다. 어쩌다가 이런 곳까지 걸어온걸까..? 생각도 해봤지만 달리 알길도 없었다. 그저 걸어오다 보니 도착했다고 해야할 것이었다. 이런곳에서 길을 잃었다고 울거나 징징거릴 생각은 애시당초 없었던 데다가 영 못찾겠으면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서 찾아가면 될거라는 생각에 그다지 위기감을 못느끼는 세야였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 되면 징징거리거나 울먹이는 아이들을 이해 못하는 세야였다. 울면 뭔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얼마나 걸었을까.... 왠지 같은 자리를 빙빙 맴도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슬슬 짜증이 날 쯔음이었다. 턱!! “윽!” 잠시간 한눈을 팔았을 뿐인데 그다지 곱게 닦이지 않은 골목길 위에 불퉁이 솟아오른 돌멩이에 그만 발이 걸려 넘어진 것이었다. 인상을 찌뿌리고 자신의 다리를 쳐다보니 무릎팍이 깨졌는지 흰 돌가루와 함께 시뻘건 피가 퐁퐁 쏟아나고 있었다. 타박..타박..! 누군가의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들렸지만 그런거에 신경쓸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저 자신의 무릎 위로 흘러내리는 피가 신경에 거슬릴 뿐이다. “아앗!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그냥 지나치리라 생각했던 그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자신의 앞에 멈춰서면서 상당히 놀란 듯한 약간 높은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약간은 꼬질꼬질한 옷을 입고 있는 자신 또래의 아이가 보였다. 그런데.... 상당히 기분이 이상하다...... “엄마가 곤란에 빠진 사람은 도와줘야 한댔어.” 아이는 한동안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세야에게 다가왔다. “많이 아픈거야? 호해줄까?” 세야는 그 아이를 한동안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상처가 호한번 했다고 나을 리가 없건만 누군가가 가르쳐준 듯한 그 방법을 찰떡같이 믿고 있는건지 눈앞의 아이는 어느새 자신의 깨진 양 무릎에 호호하며 바람을 불고 있었다. 세야의 깨진 무릎팍을 바라보며 호호거리는 그 모습이 사뭇 비장해 보이기까지 해서 슬그머니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후~!! 됐다. 이젠 안아프지?” 한참후 아이는 씨익 웃으며 세야에게 물었다. 이런걸로 상처가 낫는 일 따윈 절대로 없을텐데.. 정말 신기하게도 따끔거리던 통증이 멎은 것 같았다. “일어날 수 있어?”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자기 일인냥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내미는 아이... “고마워...” 세야는 슬핏 미소를 지으며 답례의 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아이의 하얗고 약간 통통한 두 뺨이 붉게 물들며 곧 얼굴 전체가 붉어졌다. “너....너 엄청 이쁘다!!” 이쁘다? 왠지 상대 아이의 어감이 이상하다고 느끼는 세야였지만 곧 그러려니 넘겼다. 아직 이 나이 또래의 아이들은 언어능력이 그닥 탁월한 것은 아닐테니..(그러면서 자신이 조숙하다는 생각은 전혀 못할테지만...) “처음 보는데 어디살아?” 처음 보는게 당연한 일일것이었다. “어제 이사왔어.” “어? 정말!? 아......그래서 한번도 못봤던 거구나. 그런데 너희집은 여기 어디야?” 세야는 아이의 물음에 잠시 멈칫했다. “이 동네에는 살지 않는데.....여기보다 조금 더 먼곳에 살아.” “.....그래?” 아이는 실망스러운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표정으로 이내 곧 자신의 손을 조물락 거리면서 입을 우물우물했다. 뭔가를 상당히 망설이는 듯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이곳에 매일 올 수 있을것 같아.” 그 말 한마디에 실망한 표정이 역력히 드러났던 아이의 표정이 환히 밝아졌다. 정작 그런 말을 한 세야는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납득할 순 없었지만 눈앞의 아이가 기뻐하는 걸 보니 후회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실은 내가 여기 길을 무지 잘 알거든. 나만큼 여기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도 없을거야! 어제 이사왔다구 했지? 모르는 거 있으면 나한테 뭐든지 물어봐도 좋아. 난 뭐든지 다 알거든! 헤헤..” 자랑스러운 폼으로 조금은 과장해서 말하는 아이가 상당히 귀엽다. 뭐든지 다 안다는 말은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않은 말이었지만... “저....그런데 말야...” 아이는 세야의 깨진 무릎팍을 슬쩍 쳐다보고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의아해 하는 세야에게 말했다. “다리 괜찮으면 놀이터에서 같이 놀지 않을래? 미끄럼틀도 있구, 뱅뱅이도 있구.. 시소도 있고, 그내도 있고.... 음...... 또... 아묻튼 재미있는거 디기디기 많아!!” 손으로 허공에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말하는 아이가 무척이나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세야였다. “좋아.” 세야의 승탁이 떨어지자마자 아이는 무척이나 기쁜 표정으로 세야가 무릎이 깨졌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 세야의 손목을 잡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무릎이 깨져도 달리는데는 별 이상이 없으니까...’ 그렇게 나름대로 납득을 하고 함께 속도를 만줘 달려가는... 아니, 끌려가는 세야였다. 놀이터는 비교적 넓고 깨끗했다. 그리고 의외로 자신의 집과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았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미로같은 골목길에서 벗어나 넓은 길로 나온 아이가 세야를 끌고 온 것은 어느 아파트 단지 옆 공원애에 자리한 놀이터였다. “여기가 놀이터야?” “응. 저기에는 놀이터가 없거든. 그래서 놀이터에서 놀려면 좀 많이 걸어 와야해.” 아이는 쑥스러운 듯 뒷통수를 슬쩍 긁으며 베시시 웃었다. “ 그런데......너 이름이 뭐야?” “.... 계.....세야....” “세야...? 와아.....예쁜 이름이다. 내 이름은 승하... 유 승하야...” 유승하......승하였구나. “저기 말야 내일 또 여기와서 같이 놀지 않을래?” 물어놓고서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에 또 다시 웃음이 나왔다. “그래. 또 같이 놀자 승하야..” 세야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승하...야..... . . . . 세야의 엄마인 숙희는 요즘따라 달라진 듯한 자신의 막내아들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약 두 달전에 무릎이 깨져서 온 그 다음날부터 달라진걸 느낄 수 있었다. 커가면서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점점 말수가 줄어들고 방안에서 책을 읽거나 혼자 조용히 있는 것 외에는 그다지 자주 외출을 하지 않는 세야였다. 그래서 속으로 내심 걱정하던 그였는데 그런 막내아들이 최근에 이사오고 나서 아침밥을 먹은 후면 쏜살같이 어디론가 나서는 것이었다. 게다가 전의 밋밋한 표정과는 달리 얼굴에 슬쩍 미소를 달고. “엄마, 저 딸기케잌 사주세요.” 그녀가 세야의 이 모든 변화들 중 가장 놀라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다. 단 것은 냄새조차 맡기 싫어하던 아이가 어느날 갑자기 달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것들을 사달라고 부탁하기 시작한 것. 딸기케잌 정도 사주는 것이야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그 사정이 궁금한 그녀였다. ‘갑자기 입맛이라도 바뀐건가?’ 어느날은 하도 궁금해서 자신의 막내아들에게 대놓고 직접 물어보았다. “세야야. 갑자기 단음식들이 많이 좋아졌니? 너 크림빵 싫어하지 않았어?” “.....네....싫어요.” “어머? 그럼 아침마다 가져가는 그것들은 어떡하고?” “먹어요.” “응? 먹어??” 싫어하는데 먹는다니..... 점점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친구랑 같이 먹어요.” “친구?” 세야에게 벌써 친구가 생겼다니.... 워낙에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듯 보이는 세야였기에 결국에는 그녀도 그러려니 했었다. 형들의 말은 곧 잘 따르는 세야였지만 이상하게도 또래 아이들과는 어울리지 않았던 막내아들 이었는데... “친구랑 나눠먹는 거로구나.” “네.” 대답을 하는 세야의 얼굴에 약간의 홍조가 피어올랐다. ‘별일이네...’ 그녀는 속으로 의아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분 좋게 세야에게 작은 가방을 들려주었다. “거기에다가 넣어놨단다. 나중에 친구랑 사이좋게 나눠 먹으렴. 차 조심하고..” 뭐 아무렴 어떤가? 저렇게 표정이 밝은 걸 보니 틀림없이 좋은 일이겠지. . . . “세야야. 너 어디가?” 앞마당 잔디밭에서 지렁이를 나뭇가지로 이리저리 뒤집으며 놀고 있던 세현이 막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 세야에게 소리쳤다. “응...형..... 친구랑 같이 놀려고.” “어? 그래?” 세현도 약간 놀란듯한 표정으로 가지고 놀던 지렁이를 내팽기치고 세야에게 달려갔다. “손에 든 가방은 뭐야?” 오늘따라 꼬치꼬치 캐묻는 세현이 약간 성가시긴 했지만 곧 대답했다. “크림빵이랑 딸기케잌” “우웩....너가 먹으려고?” 세야 만큼 만만찮게 단 것을 싫어하는 세현이 죽는 시늉을 하더니 물었다. 세야는 머뭇거리더니 곧 대답했다. “응...친구랑.” “친구랑?” “어. 형, 나 늦어서 먼저 가볼게. 이따가 봐.” 세현이 뭐라고 한마디 더 하기도 전에 세야는 재빨리 대문을 닫고 뛰쳐 나갔다. 그대로 있었다간 반나절이고 한나절이고 붙들려서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튼 세현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줘야 할지 몰랐으므로...... “에? 세야야! 이제 왔어?” 승하가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 있다가 곧 달려오는 세야를 향해 활짝 웃었다. “헉....헉.....미안....하악...학........많이 늦었지?..” 급하게 뛰어왔는지 세야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앗! 괜찮아? 세야야!” “콜록.....콜록....” 숨을 가쁘게 몰아쉬다가 기침까지 하는 세야를 보는 승하의 눈에는 염려가 가득했다. “천천히 와도 됐는데...” “이거.....먹어.” 세야가 내밀은 작은 가방안에는 오늘 아침 자신의 엄마가 넣어준 듯한 크림빵과 딸기케잌이 잘 포장되어 들어있었다. “.....우와.........딸기케잌이다! 하지만...... 이런거 매일매일 나한테 줘도 돼? 아무리 너희집에 빵이 많다지만.....” 세야가 딱히 할말이 없어서 대충 둘러댄 말을 승하는 찰떡같이 믿는 듯 하다. 실은 먹기 싫어서 아예 사다놓지도 않았던 것들이지만..... “괜찮아. 이것들 말고도 또 많이 있으니까.” ‘승하 네가 그것들을 많이 좋아하니까....’ 승하가 어느 날 자신에게 싸구려 조그마한 쿠키를 내밀면서 무척이나 기쁜 표정을 지었던걸 기억하고는 그로인해 승하가 단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된 세야였다. 자신이 먹고 싶었음에도 분명하고 자신에게 건내 주었다는 사실에 무척 감동을 받은 세야이기도 했고... 물론 그 쿠키는 한번 맛을 보고는 도저히 다시 입을 대기 무서울 정도로 달았다.... 승하가 자신들이 건내준 것들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은 무척이나 가슴이 설레고 즐거운 일이었다. 언제나 미안한 듯 두손 가득히 쥔 크림빵을 자신에게 내미는 승하였지만 세야는 늘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은 승하와 다정하게 같이 먹고 싶기도 한 세야였지만 저 달디 단 것들은 도무지가 익숙해지지를 않는다. 특히 크림류는....... 지난번에 승하 앞에서 무리해서라도 함께 먹다가 속이 메스꺼워져서 엄청 고생했다. 몸이 약하진 않았지만 체질이 그런건지 자주 잔병치레를 하는 세야였다. 결국 새벽에 화장실로 가서 한바탕 구토를 했다. 다음날 훨씬 핼쓱해진 모습으로 승하와 만나게 된건 물론이고........ 하지만 안절부절하며 자신을 걱정하는 승하의 모습에 조금만 더 아파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하기도 하는 세야였다. 그 뒤로 세야는 현명하게도 크림빵류에는 절대 손도 대지 않았다. 쿠키같은 과자류는 조금 집어먹는 정도? 승하도 이젠 세야가 함께 안 먹는 것을 의레 그러려니 넘기게 된 듯 싶다. 여전히 미안한 표정을 짓긴 하지만... “야! 계세야!! 세야야!!” 어디선가 세야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자 빵을 먹던 승하의 얼굴이 왕창 구겨졌다. “어? 여기 있었네.” 승하와 세야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건 다름아닌 세야의 셋째형인 세현이었다. 세야 역시 조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세현을 봤다. “뭐냐. 너희들끼리만 맛있는걸 먹고 있었네. 아니지... 왜 세야 너는 안 먹고 재만 먹고 있어? 야!! 그거 이리내!! 나도 좀 먹자.” “어? 형은 단거 싫어......읍!!!” 세현은 잽싸게 자신의 손으로 세야의 입을 막아버리고는 말했다. “집에 가자! 세야야.” 한편 승하는 승하 나름대로 무척이나 억울했다. 눈앞에 있는 저 얄미운 녀석은 어느 사이엔가부터 자신들이 놀고 있는데 갑자기 끼어들어 세야와 자신을 떼어놓는다. 게다가 속 뒤집어 놓는 말을 한마디씩 콕콕 찍어서 하고 가니....!! “세...야야!!” 승하가 한차례 세야의 이름을 불렀지만 세야는 그저 맥없이 세현에게 질질 끌려갈 뿐이었다. “야!! 너 우리 세야한테 눈독들이지마!! 세야는 내꺼란 말이다! 알았냐!!?” 세현은 이죽이죽 웃으며 승하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그대로 달려나갔다. 마음같아선 손에 쥐고 있는 크림빵을 녀석의 면전에 날려버리고 싶은데 이미 그 싸가지는 세야의 손을 잡고 사라진지 오래다. 승하는 그저 망연자실 세야와 세현이 사라진 자리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이 나쁜새끼야!!! 세야가 왜 니꺼야!!!!! 세야는 나하고만 놀꺼라고 했단 말이야!!!!” 씩씩거리며 뒤늦게 고래고래 소리치는 승하의 눈에는 분해서 그런지 눈물도 조금 매달려 있었다. ..... “후우...후.....안 쫒아오지? 아.... 그것 참 힘들다.” “헉....헉.....세현형!!!” 한참을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세야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눈앞에 보이는 세현을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며 말했다. “왜 맨날 우리가 놀고 있을 때 와서 그러는거야? 형은 형 친구들도 있잖아. 승하가 싫어한단 말이야. 게다가 그 딸기케잌은 먹지도 않을거면서 왜 뺏어왔어!?” 그러고 보니 세현의 손에는 어느새 뭉그러져 버린 딸기케잌이 들려 있었다. 그러나 세현은 아랑곳 하지 않고 케잌을 바닥에 내버렸다. 그리고는 씨익 웃으며 케잌이 묻지 않은 다른 한손으로 씩씩 거리는 세야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는 저 케잌이 맛있어 보였거든. 게다가........그 녀석은 당해도 싸다구.”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승하가 형한테 뭔가 잘못한거라도 있어?” “당연하지!! 그 녀석은 내가 가장 아끼는 것을 빼앗으려 하고 있단 말이야! 그 녀석 때문에 요즘 나는 아예 찬밥신세라고!” “혀엉!! 승하가 언제 그랬다는거야? 승하는 형이랑 얘기도 나눠본적이 없잖아.” 세야는 제대로 대답은 안해주면서 왠 뜬구름 잡는 듯한 세현을 노려보았다. 세현은 자신을 노려보는 동생에게 히죽 웃으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자....자... 착한 어린이는 일찍일찍 집에 들어가야지.” 그러는 자기는 매일 밤 11시가 다 되도록 집에 잘 들어오지 않고 동내 친구형들이랑 함께 놀러다니면서....!! 세야는 아쉬운 눈길로 자꾸 뒤를 돌아봤다. 한편 세현은 세현 나름대로 속으로 투덜거렸다... ‘세야 이녀석, 전에는 머리 한번만 쓰다듬어줘도 금방 화가 풀렸는데 승하인가 뭔가 그 녀석을 만난 뒤부터는 영 아니 올씨다잖아. 전에는 나하고 가장 친하게 지내더니....쳇!!’ 세야는 여전히 화난 듯한 눈초리로 세현을 뒤따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승하인가 그 녀석이 쪼금 귀엽게 생겼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가 세현은 문득 빙그레 웃었다. ‘아직까지는 말도 잘듣고 착한 동생이니까.... 그 녀석에게 쉽게 넘겨줄 수는 없지! 게다가 그 분한 표정이라니, 재밌어 죽겠다!!’ 히쭉히쭉 거리는 세현을 보며 세야는 의아해 하긴 했지만 어찌 알겠는가? 세현의 그 음흉한 속내를..... 세현은 카메라가 어디에 있는지 엄마에게 물으러 이층 계단에서 내려와 응접실로 나왔다. 요새 최대의 관심사이자 재밌거리인 자신의 동생 세야는 분명 그 아이와 함께 놀러갔을 터였다. 가족들도 세현을 제외하고는 전부 자세한 사정은 모르는 터였지만 무척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세현은 키득 웃으며 전화를 받고 있는 자신의 엄마에게 다가갔다. 아예 이참에 사진을 찍어서 누군지 보여줘야지. 그런데 어쩐 일인지 엄마의 표정이 평소와는 달리 어딘가 석연치 않아 보인다. “어머.....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결정하는게 어딨어요? ..... 애들도 이젠 이곳에 잘 적응해서 무척이나 좋아하는 눈치라는 거 당신도 잘 알잖아요. 이곳으로 온지 아직 1년밖에 안됬는데....” 아마도 서울로 올라간 자신의 아버지와 통화중인 모양이었다. “하지만......또 서울로 올라가는건...... 예, 알죠....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데....... 아이들도 놀랄거에요. 이삿짐 문제가 아니에요. 그런건 미리 귀뜸이라도 해줬어야죠. 하여간 주변머리 없기는.....” 가만히 대화 내용을 듣고 있던 세현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서울로....또 올라간다고? 탁탁탁!!! 대충 두 녀석이 어디서 놀지 훤히 꿰고 있는 세현은 주저없이 놀이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나 두 녀석은 한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 애는 저 느끼한 걸 어떻게 먹는거야? 도대체.’ 승하는 슈크림빵을 한입 가득 베어 물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세야는 그 옆에서 간간히 웃어주었다. 찰칵!! 순간 승하가 움직이는 바람에 약간 흔들린 듯 했지만 세현은 그걸로 됬다고 생각했다. ‘오늘 집에가서 가족들한테 보여줘야지. 다들 엄청 놀라겠지?’ 그러다가 또 다시 걸음을 멈춰서는 다시한번 승하를 카메라에 잡는 세현이었다. ‘아니꼽긴 하지만 기념으로 한 장 찍어주지 뭐..’ 찰칵!! “엄마.........저랑 승하랑 결혼해도 되요?” 갑작스레 달려와서 다짜고짜 숙희를 잡아놓고 묻는 세야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으....으응?” 한편 숙희는 숙희 나름대로 무척 놀라는 중이었다. 넷중에서 가장 말도 없고 누구보다 진지하고 고집도 센 자신의 막내아들이 대뜸 묻는 소리가 결혼이라니.. 게다가 누가 뭐래도 세야는 아직 어린애가 아닌가!? “누구랑 결혼한다고?” “승하요.” “승하가 누군데?” “........제......가 좋아하는 아이에요.” 숙희는 순간 아닐거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승하라는 아이가 아침마다 같이 논다는 그 아이니?” “......네...” 숙희는 대뜸 소리를 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세야는 나이가 무척 어리긴 해도 결코 빈말을 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한번 고집을 피우면 끝까지 밀고 나가는 정말 심지가 굳은 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세야야......그 아이는 남자애가 아니었어? 남자랑 남자는 결혼을 못하는 거야....” 제발 알아듣고 넘어가 주면 좋으련만......... “알아요. 하지만 저는 승하랑 결혼할거에요.” “....세야야...” “....죄송해요. 하지만 나는 정말 승하를 좋아한단 말이에요.” 숙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떠억 하니 벌렸다. 밖에서는 세현이 안방을 힐끔힐끔 보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사실 세현은 그다지 놀란 표정은 아니었다. 자신의 남동생이 남자애랑 결혼한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태연작약하다. “그애가 그렇게 좋니?” “네!!” 정말 뜻밖에도 세야가 매우 큰소리로 대답한 점... 숙희는 매우 놀랬다. 아니, 방금 이 아이가 남자애랑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이미 세상에서 놀래야할 일의 절반은 놀란 것 같았다. “그래도.......안돼.....!!.........우리는 내일 서울로 이사갈거란 말야. 그아이가 아무리 좋아도 곧 헤어지게 될거란다.” 세야는 몹시 충격 먹은 표정으로 자신의 엄마를 쳐다보았다. 엄마의 심기도 그다지 편해보이진 않았지만 차분히 말씀하시는 어조로 보아하니 정말인 것 같았다. “그.......래도......나는 승하랑 결혼할꺼에요!!” “세야야....... 곧 헤어지게 될거잖니? 그 승하란 아이랑은 또 못보게 될텐데 어떻게 결혼을 한다는거야?” 그녀가 최대한 안타까운 어조로 설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야는 요지부동 그저 단호한 눈빛으로 자신의 엄마를 바라볼 뿐이었다. 자신의 어린 막내아들이 그런 눈빛을 할줄 안다는게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더니 어느 한순간 방바닥에 드러누운 세야가 갑자기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이사 안갈래요......승하랑 있을 거야. 어헝...헝헝....승하랑 있을꺼야아아!! 나 승하랑 결혼할래!!! 엉엉엉.....엉........미워요!! 왜 이사를 간다는 거에요!!!!” “어머...세...세야야;;;;!!” 처음이었다. 승하가 눈물을 흘리며 저렇게 징징 짜는것은! 맙소사!! 그정도로 그 아이가 좋단 말이냐? 남자앤데도!? 세야의 울음으로 인해 엄마는 물론이요 방에 있던 형들과 세현까지 달려와 그 진귀한 광경을 넉놓고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세진아....막내가 운다.........” “어 형....나두 처음봐......” “...............” “엉엉!!! 나 승하랑 결혼할꺼야!!!!! 나 서울 안가!!!!!! 서울 안갈꺼란 말이에요!!!!!!!!” “어....어머 얘가 참;;;;; 세...세야야!! 알았어. 결혼해도 돼.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울렴;;; 나중에 만나서 결혼하면 그때는 엄마도 아무말 안할게. 됐지?” 얼결에 그녀가 승낙을 했지만 세야는 결코 큰소리로 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으허어어엉.........싫어어어어!!!!!!!!!!! 서울 안갈래........어헝헝.....!!!!” 그 자리에 있는 가족들 모두 난감한 표정으로 떼를 쓰며 우는 세야를 망연히 바라볼 뿐이었다. “알았어....알았으니까.....나중에 커서 만나도 되잖니? 엄마가 아빠한테도 잘 말해줄게. 얘들아 너희들도 좋지?” 이대로 가다간 세야의 울음이 결코 그치지 않을거란걸 깨닫은 그녀가 자신의 나머지 아들들에게 얼른 눈치를 주었다. “응!! 세야야 나중에 데리고 와. 형도 잘해줄게.” 그나마 제일 유순하고 남달리 자신의 막내동생에게 다정한 세이가 얼른 대답했다. “야! 그만 좀 울어. 남자가 그게 뭐냐? 근데 진짜 이녀석 왜 울어?” 세진이 투덜거리긴 했지만 끝에 가서는 뭔진 모르겠지만 잘 알겠다고 말했다. “나는 알지.....오늘 세야가 그 녀석한테 고백까지 받았는데......” 세현이 조그마한 소리로 웅얼거렸지만 세야가 고래고래 질러대는 악과 울음으로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 뒤에도 지치지 않고 울며불며 가족들을 달달 볶아대던 세야는 이제는 될대로 되라는 듯 결국엔 가족 모두가 세현을 빼고는 얼굴도 본적이 없는 승하와의 결혼을 승낙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어린애치고는 참으로 무서운 집념이라고 해야하나? 결국 이사가는 마지막 날까지 안 간다고 발악을 하다가 나중는 가족들을 태우러 내려온 아버지까지 합세해서 커서 만나면 된다고 계속 어르고 설득한 탓에 겨우겨우 차에 올라선 세야였다. 승하와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러 갈땐 놀랄정도로 태연한 세야였지만 승하가 소리칠때는 발목이 삐끗 할정도로 기쁘고 눈물이 났다. 차에 올라타고 나서도 자꾸만 차창 밖을 돌아보는 세야의 손에는 전날에 승하가 고백을 하면서 건내준 초록색 플라스틱 큐빅반지가 들려있었다. 승하야... 나중에 내가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면 승하 너랑 결혼할게. 꼭 너랑 결혼할거니까 너도... 나 절대 잊어버리면 안돼. 알았지? 꼭이야......!!! 나도 너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꺼니까.....꼭.........잊지마..........!! 세야는 입술을 꾸욱 깨물며 속으로 깊게 다짐했다. .......잊으면 안돼!! 그 후로부터 정확히 8년 후......... 정말 고래심줄보다 더욱 질긴 인연이었는지.......... 그들은 어느 고등학교의 입학식날 학교의 어느 모퉁이에서 ‘운명의재회’를 하게 된다...... " 오랜만이다...... 승하.....유승하 맞지?" 이로써............승하의 수난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스페샬외전> 방정식 : 계세야x + 요리y = ?? 날씨도 맑고 화창한 어느 휴일날... 그러나 승하는 모처럼 만끽하게 된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불행히도 침대 위에 끙끙거리며 누워 있어야 했다. 어젯밤이 너무도 격했던 탓이리라... 그런 승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세야는 조심스레 승하의 머릿칼을 쓰다듬었다. 승하가 이렇게까지 될 동안 자제하지 못했던 자신에게 화가났다. “으.....으음..........” 승하는 신음을 흘리며 흐릿한 눈으로 자신의 곁에 앉아있는 세야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음.......미안...........” 승하가 기운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세야는 고개를 저었다. “별로.......네 잘못이 아니잖아.” 따지고 보면 승하가 아닌 자신에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체력소모가 심한 운동을 무리해서 자주하게 되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자신은........ 세야의 표정이 상당히 착잡해졌다. 조금만 더 자제했더라면.........괜찮았을까....? “....청소해야 하는데...” “됐어...넌 그냥 누워있어.” 승하는 무척 미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지난 한달간 너 혼자 거의 다 했잖아.... 내가 자꾸 드러눕는 바람에.........” 세야는 그런 승하를 보고 슬핏 웃으며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 대단한 것들도 아니야.... 승하 넌 신경쓰지마...” 그 부드러운 손길과 함께 굉장히 다정히 속삭이는 세야의 낮은 저음에 기분이 좋아진 승하는 또 다시 까무룩히 잠에 빠져들었다. 한편 세야는 승하가 잠이 든 걸 확인하고 조용히 부엌으로 향했다. 주변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여러 가지 밑반찬 거리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마 어젯밤에 무리해서라도 승하가 장을 봐온 것 같았다. 세야는 그것들을 보고는 인상을 슬쩍 굳힌 뒤 전화기에 다가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번호를 누르는 세야의 표정이 그다지 탐탁치 않다. 슈베르트의 세레나데가 한동안 들리더니 곧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세진형... 난데 지금 어머니 계셔?” -아.. 세야냐? 그런데 지금 어머니 안 계시는데 어쩌냐? 아마 아버지와 같이 모임에 나가신 것 같다.- 세야는 세진의 대답을 듣고 나서 얼굴을 난감한 듯 굳혔다. -그나저나 무슨일인데 왠일로 네가 어머니를 찾아?- 세진의 의아한 목소리와 함께 전화기 저편에서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아.. 사람 바꿨다. 여보세요?- 상황정리가 되었나 보군.... .....너!! 이 자식 치사하게 간지럼 피는게 어딨어!!!!! 세진의 억울한 음성이 희미하게 들렸다. “형. 죽같은거 만들 줄 알지?” -왠 죽이냐? 승하가 할 줄 모른데?- “아니.” -둘이 싸웠냐? 그럼?- “...아니..” -그럼 왜?- 세야는 잠시간 시선을 돌려 승하가 잠든 방을 흘끗 쳐다봤다. “그냥...” -그래? 그럼 그냥 승하한테 해달라고 해. 승하가 만든 음식이 네가 직접 만들어 먹는 것 보다는 훨배 나을테니까.- 대답하는 세현의 목소리에 은근히 장난끼가 섞여 있다. 아마 또 무언갈 눈치채고 캐내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 사실을 알아챈 세야는 못 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곧이 곧대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알았어. 그럼 나중에 또 연락줄게.” -어? 야! 잠깐!! 세야 너...- 달칵....!! 세야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세야는 싱크대로 다가가서 도마를 꺼내들었다. 전에 형들이 아팠을 때 자신의 어머니가 어떻게 죽을 끓였는지 생각하며 냉장고 쪽으로 다가갔다. 당근, 마늘, 파....쇠고기....... 하고 생강이었나? 무척 어렸을 때의 기억이라.... 가물가물하다. 천천히 기억을 더듬던 세야는 잘 닦인 냄비 하나를 집어 들고 그 안에 쌀을 부어 넣었다. 물로 쌀을 씻고 쌀뜨물을 빼기 위해 냄비를 기울이는 순간 투두둑 하는 소리들과 함께 쌀알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내렸다. 세야가 재빨리 냄비를 들어올렸지만 이미 상당량의 쌀들이 쏟아져 내린 후였다. 한숨을 내쉬는 세야의 얼굴이 사뭇 착잡했다. 몇 번이나 쌀을 쏟아낸 뒤 어렵사리 물을 부어 가스렌지에 냄비를 올려놓은 세야는 다음에 할 일을 생각해 내었다. 파를 썰어서 넣었던 것 같은데...... 냉장고를 열어 두리번 거리던 세야는 단박에 대파를 들어올렸다. 이상하군.... 내가 봤던 파는 이렇게 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딘지 미심쩍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이내 그래봤자 파는 파라는 생각에 무심코 집어드는 세야였다. 당근도 있고, 마늘, 쇠고기....... 그리고 생강? 그러나 아무리 냉장고를 훓어 보아도 생강이 보이지 않는다. 생강 하나 없이 무난히 넘어갈 수도 있으련만 (사실은 아예 필요도 없지만) 생강을 꼭 죽에 집어 넣어야 한다는 생각에 세야의 눈빛이 결연해진다. 잠깐 마트에 들렸다 와야겠군... 세야는 냄비위의 죽이 끓으려면 아직 멀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현관문을 열어 마트를 향해 전력질주 했다. 가까운 동네의 할인마트안으로 들어선 세야를 보고는 인근의 여자들이 저들끼리 뭐라뭐라 속닥거린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신경쓸 틈도 없이 세야는 야채코너로 다가가서 생강을 찾았다. 가장 크고 탐스러워(?) 보이는 생강을 집어든 세야는 이내 그냥 돌아서려다가 과일코너에 눈길을 돌렸다. “딸기도 집어 넣으면 좀 더 맛있지 않을까...?” 세야는 곧 자신의 말에 확신을 하면서 주저없이 딸기도 집어올렸다. 딸기를 집어올리니 그 옆에 있는 레몬이 눈길을 잡아끈다. 그 뒤로는 오렌지, 파인애플, 메론, 사과, 키위....... 보이는 족족 과일들을 집어올렸다. .....승하는 과일도 무척 좋아하니까......섞어주면 좋아하겠......지?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계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세야는 다시 도마 앞으로 다가섰다. 파는 이렇게 썰어 넣으면 되는건가? 깍두기 자르듯 썩둑썩둑 잘라낸 대파들의 크기가 무척이나 일정하다. 단지.....크기가 커서 그렇지..... 세야는 썰어놓은 파들을 끓고 있는 죽으로 집어 넣었다. 마늘은 10쪽 정도 집어넣으면 되나...? 세야는 마늘 10쪽을 도마위에 올려놓았다. 탁탁탁탁....... 빠른 칼질이 무척이나 정교한 모양으로 마늘들을 조각내갔다. 손놀림만 봐서는 일류 요리사들도 부럽지 않건마는..... 정작 세야는 가장 중요한 사실 두가지를 모르고 있었다. 첫 번째는 마늘의 양이 너무 많다는 것과.... 두 번째는 죽에 집어넣을 마늘은 썰어서 넣을게 아니라 다져서 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당근은 일정한 크기로 얇게 저몄었나? 사아악..........사아악........ 달밤에 당근을 달에 비춰보면 달의 모양이 그대로 통과할지도 모를 만큼 잘 저며놓은 당근도 냄비안에 집어넣고...... 쇠고기는 씹히는 맛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탓에 깍두기 모양으로 보통사람이라면 상상도 못할만큼 질서정연하게 잘라놓고 역시나 냄비 속에 단번에 집어넣는다. 생강은......우려내는 되는 거겠군... 어느새 생강을 깨끗이 다듬은 세야는 통째로 냄비속에 집어넣은 후 이제 천천히 죽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무언가를 깨닫은 듯 다급히 찻장을 뒤지더니 소금병을 꺼내들었다. 간맞추는 걸 잃어버릴 뻔했어........ 툭툭.... 소금을 털어 넣고 그걸로는 뭔가가 부족한 듯 후추도 털어 넣는다. 보글...보글.... 일이야 어찌 되었건 제 나름대로 잘 끊고 있는 죽을 보던 세야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세야는 마지막으로 마트에서 사온 과일들의 껍질을 까내고 모두 믹서에 넣어 갈았다. 과일들이 모두 다 갈리자 세야는 그것들을 죽 위에 붓고 슬슬 저었다. 색깔은 조금(...일까?) 이상했지만 몸에는 상당히(!) 좋을 것 같은 영양죽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에 완성되어 가는 죽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는 세야였다. 이제..... 승하가 깨면 갔다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틀림없이 맛있게 먹어..주겠지? 보글.......보글....... 한편 승하는 방에서 어디선가 풍겨오는 야리꾸리한 냄새에 잠이 깨면서 약간 어지러운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코를 자극하고 있는 이 냄새는 분명 부엌에서 풍겨나오고 있었다. 머리가 울리는 걸 억지로 눌러 참고 부엌으로 향한 승하는 세야가 막 쿠킹장갑을 끼고 냄비를 식탁위에 올려놓는 걸 보았다. “이제 일어났어? 어때...? 몸은...” 승하는 아직도 약간은 몽롱한 눈빛으로 자신에게 몸상태가 어떤지 물어오는 세야를 잠시간 바라보다가 베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많이 나아졌어...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야?” 아까 전부터 세야가 식탁위로 올려놓은 냄비가 자꾸 신경쓰였다. “배.....고프지 않아? 죽 만들었어...” “에......? 죽!? 세야 네가 직접 만들었다.....고?” 세야는 대답대신 간단한 고갯짓을 했다. 승하는 그런 세야의 모습에 묘한 감동을 받았다. ..아마 쑥쓰러워 하는 걸거다. 저렇게 시선을 살짝 피하는 걸 보면.... 승하는 그모습에 왠지 웃음이 나올 것도 같았다. 세야가 만든 음식을 먹어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므로 승하는 자신의 몸이 아프다는 사실도 잠시간 잊을 만큼 기쁘기도 하고 무척 고맙기도 했다. “처음 만든거라서 맛은 장담 못해.” “....처음이라고?” “응” 맙소사!! 세야녀석이 처음 만든 요리가 자신을 위해서 만든 죽이라니........이거 왠지 무척 감격스럽잖아!! “고...고마워. 그럼 어디한번 먹어볼.............게?” 그러나 처음의 흥분된 어조와는 달리 승하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멀리 있었을 때는 잘 안보여서 몰랐는데.... 냄비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냄비안의 내용물을 확인하는 순간 표정도 덩달아 떨떠름하게 변했다. “하.....하하......이거 먹으라고?” 냄비안에는 차마 농담으로라도 맛있게 생겼다고 할 수 없는 의미불명의 걸쭉한 음식물들이 들어 있었다. 게다가... 풍겨나오는 냄새또한 결코 예사스럽지 않았다. “처.......처음 만든거라고 했지?” “응.....문제있어?” 세야가 슬쩍 표정을 굳히며 묻자 승하는 뻘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아니 처음 만든 것 치고는 잘만든 것 같아서.....하하....” 승하의 등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세야녀석의 눈치로 보아하니 눈앞의 이 의미불명의 음식을 무척 정성들여 만들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먹어야....하나....? 말아야 하나...? 먹으면 결코 무사할 것 같진 않은데............. 세야몰래 속으로 심각한 고민을 하던 승하는 천천히 숟가락을 들어올렸다. 아니, 어쩌면 의외로 솜씨가 좋은 걸 수도 있어! 생긴건 이래도 나름대로 맛있지 않을....까? 승하는 드디어 결심을 굳히고 수저로 죽을 퍼올렸다. 그리고 그 의미불명의 음식을 입안에 집어넣는 순간........ “!!!!!!!!!!!!” 혀의 감각이 마비되는 듯한 아찔한 느낌이 입안 전체를 휘몰아쳤다. 이.........이건............... 천상천하 유아독존 지고지순의 절대!! 극악의 맛!!!!!!! 당장 내뱉을 수도 없이 머금고 있는 것만 해도 희대의 인내심을 자아내게 하는 바로 그 맛!! “..죽....어때?” 조심스럽게 묻는 세야를 승하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차마 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고개를 수그린 승하에게서 세야도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았다. 마......맛있다고 해야해.... 모처럼 세야녀석이 만들어 준건데..그런데........ 워낙 충격적인 맛이었으므로 대답은커녕 삼키기 조차 힘들었다. 아니... 당장에 마음같아서는 화장실로 달려가 모두 쏟아낸 다음 입을 한번 헹구고 나서 양치질을 해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꿀.........꺽............ “마......맛있어! 진짜 맛있다!! 너무 맛있어서 대답도 제대로 못했네.” “....그래?....” 승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세야가 만든 죽을 칭찬했다. 하지만 그에 반해 세야는 미심쩍은 듯 수저를 들어올리며 그 영양죽에(세야 나름대로의...) 수저를 가져갔다. 챙그랑!!!! “!!?” 순간이었다. 승하가 죽의 그 치명적인 맛으로 횡설수설하는 와중에도 세야의 숟가락을 번개같이 쳐버린 것은.... “케...켁!! 지...진짜 맛있어서 둘이 나눠먹기도 아깝네. 아하하하...하...... 혼자 먹어도 아쉬울 만큼 진짜 죽을만큼(!!) 맛있어. 그러니까.........에.....이건 그냥 내가 다 먹을게.” 후룩......후루룩....... 승하는 세야가 자신이 만든 이 죽의 살인적인 맛을 알고난 뒤 실망할 것을 막기위해 제 나름대로 그 몹쓸 죽들을 입안에 쑤셔 넣었지만......... 꿀꺽.......! 주르르륵..................... “....승하야...” “으......응?” “울 만큼 맛있냐.........?” 그랬다.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승하의 몸은 솔직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맛이 없노라고.......... 탁!!! 승하가 제지하기도 전에 냄비를 잡아챈 세야는 그 자리에서 재빨리 손가락으로 자신이 만든 죽을 찍어 맛을 보았다. “............” “세......세야야!” 그 살인적인 맛을 본 세야의 표정은 더할나위 없이 무표정했지만 승하는 세야의 관자놀이가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세야는 그 뒤로 아무말 없이 싱크대에 다가가서 그 독극물을(영양죽에서 상당히 저하되버린..) 버렸다. “...승하야............” 승하는 순간적으로 바짝 긴장했다. 세야가 저렇게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무척 기분이 안 좋다는 뜻이었다. “너...........왜..” ...........!!!!? “아.........아흑!!!!!!!!!!!!” 그러나 세야는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놀란 표정으로 승하에게 다가갔다. 승하가 갑작스레 배를 움켜잡고 신음을 흘리며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윽..........흐윽...........흑!!” “승하야!!!!! 이런 제길!!!!!!!” 세야는 배를 잡고 고통을 호소하는 승하를 안고나와 급히 택시를 잡았다. “인근 종합병원으로 빨리 가주세요!!” 종합병원에 도착한 세야는 거스름돈 챙겨가라는 택시기사의 말도 무시한 채 곧바로 응급실로 향했다. 생각해보니 승하는 최근에 와서 몸상태가 많이 약해져 있었다. 가뜩이나 아픈데 거기에 엎친격으로 그 독극물(...)을 먹었다면!! 탁............ 문이 열리고 초조한 표정의 세야가 진료실 안으로 들어섰다. “유승하씨의 보호자분 되십니까?” “네” 의사는 침중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세야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지만 세야는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지금 세야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자리에 앉느냐 마느냐 따위의 것이 아니라 승하의 상태였다. “흠...그럼 환자분의 상태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많이........아픈건가? 혹여... 고치지 못하는 병같은 것은 아니겠지? “...........” 의사는 긴장한 세야를 보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검사를 해본 결과 승하씨는 위경련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위경련 말입니까?” “네. 평소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거나 아니면 너무 식사를 불규칙하게 한다거나 위에 자극적인 음식등을 섭취하면 이런 위경련 증상이 나타납니다. 당분간은 심한 스트레스나 불규칙적인 식사 또는 자극적인 음식들을 피해주셔야 할겁니다.” 심한... 스트레스..... 자극적인 음식!! 세야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럼 지금 상태는 어떻습니까?” “승하씨 같은 경우엔 다행히 그리 심각한 증세는 아니니 오늘 중에 퇴원하셔도 괜찮습니다. 일단 병실에 누워 링겔을 맞고 있으니 한 두시간 정도면 충분히 상태가 호전될 겁니다.” 그리 심각하지 않다는 의사의 설명에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 한편 주먹을 꽉 쥐는 세야였다. 그걸.......맛있다고 먹었던거냐!? 세야는 접수실에서 약을 받아가라는 의사의 말과 함께 인사를 건네고 진료실을 나왔다. 그 뒤로는 간호원에게 승하가 누워있는 병실을 물어 찾아갔다. 간호원은 매우 친절하게 호들갑을 떨면서 사양하는 세야를 병실 문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의사의 말대로 승하는 그리 심한건 아니었는지 많이 안정된 얼굴로 침대위에 앉아 있었다. “어...? 왔어? 의사선생님이 뭐래?” 승하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세야는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승하 역시 세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입을 다문뒤 당장에 눈앞에 보이는 흰 벽만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너.......그거 왜....... 맛있다고 한거야?” 한참 후에야 세야가 무거운 음성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승하는 이크하면서도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뭘? 정말 맛있었어.” 실은 눈물이 나고 병원에 실려올 만큼 정말 정말 맛이 없었지만... “...........” 그러나 승하도 곧 자신의 말이 무척이나 신빙성이 없다고 느끼고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세야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너........” “..............” “맛없으면 뱉어야지!! 그걸 그렇게 먹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너!!” “미안..........” “가뜩이나 몸도 안 좋은데 그걸 꼭 먹어야 했어!!?” “미......안...” “그런 거짓말 하고나면 어떻게 될 줄 몰랐던거냐!?” “미......안해......” “넌 네 의사도 없어? 바보같이 맛없다고, 먹기 싫다고 말도 못하게!!” “.............미안.....정말 미안해....세야야......” “.....그리고 너!!!” 세야가 거칠어지던 한 호흡을 잠시간 끊고 승하를 바라보았다. “너..........잘못은 내가 한건데 왜 네가 미안하다고 하는건데.................화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잖아.............” “......미안.........이 아니라.... 으....으응?” 얼떨떨하게 되묻는 승하를 보며 세야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할까....... “미안........미안하다.......너에게 화낼일이 아니었어......오히려 내가......” 어느새 침대위에 앉아있는 승하를 껴안은 세야의 목소리가 은은히 떨리고 있었다. 나는 네가 정말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아서...... 너에게 못되게 군 죗값이라도 받는건 줄만 알았어.........이렇게 소중한 너를......... 혹시라도 잃게되는 줄 알고.................. “다음엔.......그러지마. 아무리 배가 고파도.............” “아......아니야!! 그런거 아니야!” 아무말 없이 세야의 품에 안겨있던 승하가 갑작스레 고개를 발딱 들어올리고 소리치자 세야는 놀란 눈으로 승하를 바라봤다. “제길.... 그런거 아니란 말이야.......” “그럼 왜.....” 그 독극물을 맛있다고 억지로 입안에 집어 넣을만한 다른 타당한 이유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무척이나 사람잡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극악의 죽이었으므로.... 미칠 만큼 배고프지 않고서야.............. 아니, 미칠 만큼 배고파도 차라리 굶어 죽을지언정 그 죽을 먹는건 무리다. 도대체 그 까닭이란게...... 그러나 세야는 곧 승하의 침울한 대답으로 인해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네........녀석이 나에게 처음으로 만들어준 음식이었다구.............게다가 처음이라며? 무지....정성스럽게 만들었을거 아냐........맛은.......조금(...)없었지만... 그....그리고 꼭 그것만은 아니더라도 음식(...)을 남기는 건 큰 죄라고...........물론 그것만은 아니지만...” 승하는 세야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새빨갛게 달아올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그걸 먹었다는 거야?” “...응” “.................” 세야는 잠시간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이제까지 어느 순간에도 이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은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지금 만큼 사랑스러웠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런.......” 당장에라도 꽉 껴안고 키스하고 싶다..... .........하지만... “그만 푹 쉬고 있어.... 잠시간 링겔을 맞고 있으면 나아 질거라고 했으니까.” “............” “이따가 저녁에 데릴러 올게....” “.............응...” 한껏 풀이죽은 승하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세야는 급히 병실을 나섰다. 역시 화가 난거겠지? 내가 바보같이 그 죽들을 먹어버려서 이렇게 병원에 실려온 거니까..... 하아.... 나란 녀석은.......... 물론 내가 엄청 핸섬하고 똑똑하고 아묻튼 여러모로 잘난건 인정하긴 하지만.........그렇지만.............. 혼자서 자화자찬하며 자기위로를 해봐도 도무지 기운이 날것 같지 않았다. 세야........녀석... 돌아보지도 않고 나가냐.........칫... 세야가 또다시 뭐라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괜시리 서러운 생각이 들어 창밖을 한번 바라보고는 눈가에 맺힌 이슬을 팔로 쓱쓱 문질러 닦는 승하였다. “우씨.......나는 그래도 열심히 노력했단 말이야........그런데도 이렇게 되버리는 걸 어떡하라구....” 승하의 힘없는 목소리가 병실안에 울려퍼졌다.. 세야는 약속대로 저녁때 쯤에 승하를 데리러 왔다. 그의 표정이 조금 초췌해 보이긴 했지만 세야는 달리 아무말도 해주지 않았다. 택시를 잡아탄 그들은 집에 오는 동안 내내 아무말도 안했다. 세야가 어딘지 지쳐보이는 까닭에 승하는 말을 걸 수 없었다. “손님들 다 왔습니다.” 택시운전기사의 말과 함께 금액을 지불하고 내린 두 사람은 아파트 계단 위로 올라갔다. 집의 문앞까지 다다렀을 때였다. 세야가 집안으로 들어가려는 승하를 잡아끌었다. “......승하야.....” “어엉....?” “...........그러니까.......나는 오늘 좀 급한 일 때문에 집에 못들어 갈 것 같다......약은 챙겨두었으니까 혼자서 먹을 수 있지?” 세야가 무척 곤란한 표정으로 그렇게 묻자 승하는 처음엔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잘 다녀오고..... 급한 일이라는데 어쩔 수 없지. 헤헤.... 약은 혼자서 챙겨먹을 수 있으니까 걱정말고 다녀와.” “...정말 괜찮겠어?” 미안한 표정으로 되묻는 세야를 보니 어딘지 모를 가슴 한켠에서 서늘한 바람이 스친다. “걱정말고 다녀오라니까? 이래뵈도 멧집이랑 깡따구만큼은 누가 뭐래도 자신있으니까! 급한 일이라며? 얼른 가봐..” 일부로 과장해서 미소짓는 승하를 보던 세야는 얼굴을 약간 흐리게 굳히더니 이내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 이번에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는구나...........너........ 섭섭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일테지.....쩝.......정말 급한 일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예전에는 이렇게 아파도 어차피 나 혼자서도 잘 견뎌냈으니까.....이번에는 사치스럽게 병원까지 다녀왔는데 뭐.... ....사치스럽게.............도...............말야... 다음날 아침 빈 침대에서 일어난 승하는 피곤한 표정으로 거실 쇼파에 누워있는 세야를 봤다. 어제........침대위에서 안잤네..........전에는 꼭 같이 잤는데........ 툭툭......... “세야야 일어나......” ...으....음..... 잠시 몸을 뒤척이던 세야가 그 잘생긴 미간에 주름이 잡히면서 흐릿한 눈으로 세야가 승하를 올려다 보았다. 확!!!! “자....자..” 세야가 갑작스레 승하를 끌어당긴 탓에 엉겁결에 누워있는 세야의 가슴에 얼굴을 묻게 된 승하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하......학교 가야하는데......... “야.....세야야.......세야..........계세야..!!” “.........” 전에는 성까지 합쳐서 부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주변을 살벌하게 노려보던 녀석이었는데.......... “일어나...! 우리 학교가야 한단 말이다!!” 꽈아악....... “....조금만 더 자면 안될까?” 으......으아..... 세야 너 이자식 그런 표정 짓지마;;;;; 시...심장 떨려........ “미..안하지만 벌써 7시 20분이라고........빨리 준비하고 나가야해..........” 그렇다.....이러니 저러니 누가 뭐래도 그들은 불굴의 고등어!!! 세야나 승하나 일이야 어찌 되었든 혹자의 말을 빌리자면 헬리혜성이 지구로 박치기를 하여 세상이 두쪽이 나고 하늘이 무너지며 땅이 뒤집어져도!! 당장에 북한 인민군들이 동무를 외치며 남한으로 침공해 온다고 하더라도!! 학교는 꼭 가야만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의지의 고등어들 이였던 것이었다......... (그래봤자 대다수는 별 볼일도 없지만-_ㅜ;;;...) 하지만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승하 또한 세야 녀석의 품에 안겨 그대로 자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다. 그대로 고개를 떼어내기엔 세야의 품은 무척......포근하고 따스했다... 에씨.......나도 자고 싶은데..................... 이대로 안겨있다간 한도 끝도 없을 거라는 생각에 승하는 발딱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아쉽다...... 그러나 승하는 이내 도리질했다. 세야야....미안..........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다. 그래도 학교는 가야 허지 않겄냐........... 그럼 눈물을 머금고............... 타아아아앗!!!!!!!!! 텁!!!!! “.......뭐 하는거야?” 쳇..!!...잽싼놈..........하여간 이렇게 허술해 보여도 자기방어는 철저하게 하는 녀석이라니까.... “.....너 깨우려고........” 현재 승하의 주먹은 세야의 손에 가로막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하아....... 한숨을 내쉬던 세야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꼭 이런 방법으로 깨워야 되겠어?” “....그럼 어떻게 깨워?” 승하의 물음에 순간 세야가 짓궂은 표정으로 피식하고 웃더니 갑작스레 달려들었다. “으.....으읍!!!!” .........@%@&@&$@*@%$* 한참을 빨리고 난 후에야 승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는 세야를 쳐다봤다. 세야는 어느새 멀끔한 얼굴로 비죽이 웃으며 말했다. “모닝 키스. 그거 하나면 돼.” .........화아아악!!!!!!!!!!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홍당무가 되버린 승하를 뒤로하고 세야는 쿡하니 웃었다. 승하는 또 당했다는 생각에 씩씩거렸지만 그래도.........그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 그것이 불과 아침까지의 일이었는데............ 학교에서의 세야는 하루종일 졸았다. 전에는 누가 뭐래도 수업만큼은 꼭꼭 열심히 챙겨듣던 그 계세야가 보충학습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꾸벅꾸벅 졸은 것이었다. 승하는 물런이거니와 아이들까지 놀랬다. 계세야가 수업시간에 졸고 있다? 다른 아이들 같았으면 그 모습이 흉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어찌된 일인지 놈은 너무도 완벽하게 조는 모습마저 멋지게 보일지경이었다. 오히려 평소에는 상상도 못할 색다른 모습을 보여줘서 더욱 관심이 쏠리는.......... 아마 뒤로 가서는 또 자기들끼리 뭐라고 쑥덕거릴 것이 뻔했다. 아직 그들은 승하와 세야의 사이를 자세히는 몰랐지만 대강 세야의 행동변화로 봐서 승하가 세야와 굉장히 친해졌을 거라고만 추측하고 있었다. 더불어 승하는 예전과는 달리 그럭저럭 평온한 학교생활을 지속하고 있었다. 가끔씩 여자애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는 것 외에는... 그나마 그것도 세야가 있을 때는 잠잠한 편이었다. 학교 수업이 모두 끝나고 교문을 나설 때 쯤 세야가 승하에게 말했다. “승하야 미안하다. 너 먼저 집에 가있어. 난 좀 들릴데가 있어서.......” “....들릴데?” “......별로...........그냥 좀 들려야 할 것 같아서....” 그러나 말을 하는 세야의 표정도 그다지 석연치는 않았다. “너희집에 들리는 거야?” 그 말에 한순간 표정이 무섭게 굳어지는 세야였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다른 곳이야. 오늘밤도 좀 늦게 들어올지 모르니까 약 잘 챙겨먹고 너 먼저 자고 있어..... 저녁식사....꼭 챙겨먹고.......” 그러고선 손목시계를 흘끗 쳐다본 세야는 승하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타고 어디론가 향했다. 교문 앞에는 승하 혼자 뎅그러니 남아 있었다. 어디를.........가는 거지? 터벅....터벅....... 혼자서 길을 걸어가는 승하의 발걸음이 왠지 맥아리가 없다. 그 다음날도.....그 다음날도........ 거진 나흘째 세야는 학교가 끝난 뒤에는 어김없이 어디론가 쏜살같이 사라졌다. 어디로 가는지 묻고 싶은 승하였지만 오히려 귀찮게 구는건 아닌가 싶어 잠자코 있기로 했다. ........나쁜자슥....그래도 어디로 가는지 정도는 가르쳐 줄 수 있는거 아니야? ........이게 뭐냐.......집에 가면 청소 빼고는 할일도 없는데........제길....부업이나 다시 시작해볼까? 요새 세야녀석의 행동패턴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부쩍 느끼는 승하였다. 아침마다 잠투정을 하고 학교에서는 졸고....... 게다가.......밤늦게 까지 집에도 잘 안들어오고.... 아침에는 어김없이 침대쇼파에 누워있지만...... 나한테 뭔가 숨기는게 있는건 아닐까? 실은........내가 무지 싫어져서..........일부로 피해다니는 건 아닐까........ 하긴........나는 남자고........무엇보다 가진것도 없는 가난뱅이에........ ....물론 머리도 좋고 얼굴도 핸섬........하고.........그리고 또.....빨래도 잘하고.............요리도 잘하고...... 목걸이 만들기도........... 잘해봤자 그것들은 모두 세야녀석에겐 별 필요가 없는 것들이잖아........젠장... 돌아오지 않는 세야를 기다리며 시계를 쳐다보는 승하의 얼굴이 어둡다.... 이씨!! 이 나쁜놈... 내가 싫어졌으면 싫어졌다고 말을 해야할 것 아니야!! ........그러면 아무말 없이 사라져 줄 수 있는데...... 내가 좋다고 할때는 언제고.......... 지금은 이러기냐.........우이씨.......나쁜놈........... 분명 그 때 그 죽사건 이후로 나한테 정나미가 떨어진게 틀림 없어.......... 어느새 참았던 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거봐........이렇게 암만 기다려도 너는 안오잖아............... 세야는 요새 와서 부쩍 어두워진 승하의 얼굴에 신경이 쓰였다. “승하.....너 요새 무슨 일 있어?” 세야가 아침식사를 하다말고 물은 말이었다. 승하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마늘쫑을 집어 들며 말했다. “아니...” “................” 썩을놈........두번은 더 안 물어보냐? 치사하다........... 예로부터 적어도 3번은 물어보는 것이 예의라고 했는데...... 세야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 굉장히 아파 보여..........” 다정한 울림이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승하는 세야의 말에 오히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이게 다 누구탓인데!! 다 네녀석 때문이잖아!! 우씨...... 이 자식이 사람 헷갈리게 만들고 있어. 내가 싫어졌나 싶으면 이렇게 걱정되는 눈빛으로 사람 가슴 헤집어 놓고.... ......또 다정하다 싶으면 어느 순간 돌아서서 사람 마음 섭섭하게 만들고.........어쩌라는 거야! “....아니야...........그냥........밥이 너무 맛있어서...............” 여기에서 왜 갑자기 밥이 맛있다는 말이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투둑.....툭... “!!!!!” 이 미친!! 왜 갑자기 눈물이 떨어지고 지랄이야!! 쪽팔리게 쓰리.... 그러고 보니 요즘에 와서 별것 아닌 일로 참많이 울었다.... ..쓰불.....사나이 유승하 다 어디로 갔냐!! “너.........아직 다 안 나은거야?” 눈물을 흘리는 승하를 가만히 바라보던 세야가 무거운 낫빛으로 말을 꺼냈다. “에? ..으...으응?” “......빌어먹을” 세야가 굉장히 낮은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지만 승하는 들을 수 있었다. 왜..........화를 내는거지? 역시.......내가 아픈게 짜증이 나서......그런건가? 그러고 보니 그 때 그 죽사건 이후로 세야녀석이 달라졌다........ “........치울게....” 쓱쓱...... 전에는 이렇게 내가 울면 저 자식이 닦아줬는데.............쳇........ 그 뒤로는 하루종일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세야는 책상위로 엎어졌고 승하는 승하 나름대로 침울한채 있을 뿐이었다. .....나 한테 정말 질려버린 걸까...........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승하의 얼굴이 새하얗게 굳었다. 정말.........그런건지도.......... “승하야 미안하다... 오늘도 너 먼저 가있어......나 기다리지 말고.” .......기다리지 말라구? 그래.....그럼 그러지 뭐.........내가 기다리면 귀찮기라도 한건가? “.....으응...잘........다녀와.” 승하의 어두운 표정이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세야였지만 그는 이내 몸을 돌려 택시를 잡아탔다. 매연을 뿜으며 사라지는 택시를 멍하니 쳐다보던 승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진짜 다시 부업이라도 해야할까봐.......... ......오늘은 말해야지................내가 질린거라면 얼마든지 떠나줄 수 있노라고......... 서러운 생각에 눈물이 북받친다. 집까지 어떻게 걸어왔는지도 모르게 와버린 승하는 침대위로 달려갔다. “으허어어어엉!!! 계세야 이 나쁜놈아!! 그래도 나는 너를 엄청 많이 좋아한단 말이다!!!!.... 뭐가 첫사랑이냐!! 으훅훅....흑..........나쁜놈......나아쁜 자식......썩을놈.... ....어헝....헝....침대야 잘 있어라. 너랑 나랑도 오늘이 마지막인가 보다.......” 승하는 한참을 그렇게 울다가 옷장을 뒤져 주섬주섬 옷을 꺼내입었다. 밖의 날씨는 늦가을이라서 그런지 무척이나 쌀쌀했다. ...오늘은 밖에 나가서 기다려야지. 기다리지 말라고 했지만 어쩔 수 없는걸....... 보고 싶은데 그럼 어떻게 한담?.... 네가 나에게 싫증이 나서 피해 다니는 것쯤은 잘 알고 있지만.....그래도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올 때까진 기다렸다가 꼭 말해야지........ 얼마나 기다린 걸까.......... 혹한 추위 속에서도 꾸벅꾸벅 잠이 들려는 찰나였다. 부우우우웅.................끼이이익!!!!!!!!! 순간 무척 거칠게 모는 차소리가 들리며 한대의 그랜져가 승하가 쪼그려 앉은 벤치에서 한참 떨어진 곳 옆에 멈춰 섰다. 탁......!! 운전자석의 차문이 열리면서 나오는 그 난폭한 운전의 주인공은 왠 여인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조수석에서 내리는 사람은.........계........세..........야? 순간 승하는 심장의 어느 한 부근이 싸하게 굳어지는 것 같았다. “호호호! 미안해~ 세야야. 내가 항상 자제한다고 해도 이모양이네. 미안~” 누굴까...? 저렇게 친근하게 세야녀석의 이름을 부르면서 엉겨붙는 사람은........ 누구길래........세야가 싫은 내색 없이 가만히 있는걸까............ “.....제발 자중하세요. 그래가지고 시집이나 오겠어요?” “어머~! 뭐가 어떠니? 걱정마! 오지말라고 해도 알아서 다 갈꺼니까...여차하면 너말고도 두명이나 더 남는데 무슨 걱정이야?” 쿵..........쿵!!!!..... 심장박동수가 제멋대로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새벽 늦게까지 둘이서 함께 있으려니 힘들다.......그치? 그래도 어쩌겠니? 원래 사랑의 힘이란 위대한거잖아~ 후후......그래도 오늘까지 마칠 수 있어서 다행이지 뭐야...” “......네...” 세야가 슬핏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더할나위 없이 기뻐보인다......... 그녀는 매우 발랄한 목소리에 무척이나 예쁜 것은 아니었지만 꽤 단아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연상의 누님이라도 사귀었나 보네..... 승하는 씁쓸히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학교 끝나자마자 바쁘게 사라진 거였구나......... 역시 내가.........짐이 되서....... 하긴.......저렇게 귀엽고 발랄한 여자라면 누구라도 좋아할테지만....... “푸후후후!! 아이고 웃겨!! 지금도 그 생각하면 숨이다 넘어가네;; 꺄하하하하........” 여자는 갑자기 웃어 제끼기 시작했다. “......그만 웃으세요.” “꺄하하하....하하하하.....아이고 배야......미....미안....푸흡!!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걸? 우리 세야님이 나를 다 찾아오고 말이야.....” “거기에 대해선 더 이상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기로 했잖아요.......” 세야가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무슨 소리야!! 매일밤 찾아와서 찐~!!! 하게 사랑을 만들어갈 때는 언제고!! 이제는 다 끝났다고 이렇게 매정하게 굴기야? 난 아직도 너의 그 귀여운 모습들을 잊지 못하는데” ..매일밤....찐......하게 사랑을 만들어?...세야의 귀여운 모습? 그말에 부정할 줄 알았건만 오히려 세야는 그녀의 말에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그리고 ... 그 모습을 보던 승하의 얼굴은 더욱 창백히 질려갔다. “자자! 세야군 힘내~! 성공하면 꼭 말해주고! 알지?” “예. 감사해요.........” 무엇을 성공한다는 것일까......... 쵹!! “!!!??” “.........!!!!!!!!!!!!” “후훗~!! 굿나잇 하렴~!! 세야 너 의외로 입술 부드럽구나?” “......그런!!” 탁!! 부우우우웅!!!!!!!!!!! 끼이이익!!!!!!!!!!! “..........난폭운전 좀 자제하라고 한지가 언젠데...못 말리겠군..” 약간의 염려가 묻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세야는 이내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만 아니었다면....... “승........하?” 통로 앞 계단에 승하가 유령같이 앉아있었다. 늦은 새벽이라서 지나다니는 사람들만 많았더라면 무심코 그대로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어?” 세야가 당황한 낫빛으로 승하에게 물었다. 승하는 그런 세야를 보고는 베시시 웃었다. 그런데.......가슴이 너무.... 아프다....... “그냥.........너 기다릴까 해서...” 세야는 그런 승하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옷도 이렇게 얇게 입고 나와서 이제껏 자신을 기다렸단 말인가? 그러나 승하는 그런 세야의 표정을 오해했음인지 곧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기다리지 말라고 했는데........내 멋대로 기다려버렸어.” “.......들어가자...감기걸려...” 쿨쩍.......쿨쩍...... 이미 걸려버렸는데 뭐..........게다가......다 봐버렸는걸......... 승하는 세야의 뒤를 따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세야는 승하의 안색이 안 좋은 것을 보고 또 어딘가 아픈건가 싶어 걱정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그일로 인해 승하에게 신경써주지 못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내일부터는......... 달칵...... “.........세야야...” 카드를 긁고 난 뒤 현관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승하가 입을 열었다. 세야는 자신을 부른 승하를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승하의 표정은 몹시 창백하고........어두웠다......... “너......무슨 일 있어?” 세야가 걱정스레 물었지만 승하가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을 하지 않는다. 가까이 가보니 승하가 소리없이 울고 있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왜 그래?” “나.. 갈게 .......” “......뭐?” “...그동안 눈치도 못 채고 계속 붙어있어서 미안했어......” “........뭐.....라고?” “....이제까지 고마웠어.......그 누나 무지 괜찮아 보이더라..... 그런 사정이었으면 진작에.......말해주지. 하마터면 병신같이 계속 붙어있을 뻔했잖아...” 승하의 말을 듣던 세야의 표정이 점차 굳어져 갔다. “너.......지금... 진심이냐?” “.....역시 좀 더 일찍 알아챘어야 하는 거였겠지..?.....내가 워낙 둔한데다가 눈치도 없어서...둘이 사귀는 줄 몰랐어..........” “....!!!!!!” “..이 말하려고 오늘 너 기다렸거든........헤헤...무지 좋은 분 같으니까 잘해드려......진짜.....진짜..........잘..해드려......그럼 잘 있어......나 갈게.............” 웃.....웃어야 하는데 사나이답게 쿨한 작별인사를 하고 나가야 하는데....... 왜......이렇게 자꾸 눈물이 나오느냔 말이다!!! 젠장;;;; 계세야 이자식아. 나 진짜 너 좋아해...... 원래는 찐드기처럼 끝까지 들러붙을 작정이었는데 그러지도 못 할만큼 너 무지 좋아해... ....으....으욱.........정말......좋아해...... 그러니까 그 누님이랑 부디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아라........ 내가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괜찮은 사람이 되면 그때는 꼭 두 사람 축복해주러.... “야! 유승하!!! 너 나랑 말좀해!!!”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뒤에서 세야가 갑작스레 승하를 잡아챘다. “윽!!” “너....... 도대체 누구랑 누가 사귄다는 거야?” 그야.........너랑 그.........누님..... 주르르륵.... 그 와중에도 눈물은 계속 흘러나왔다. 세야는 뭐라고 하려다가 난감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는 승하의 눈가를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하아......유승하............내가 지금 너와 이렇게 있는게 장난으로 보여?” 물론 그렇게는 안보이지...... 하지만 사람이란게 살다보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는거고....... 세야 네가 그렇다 해도 나는 아무 말도 못하는 걸........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단 한사람 밖에 없어..” 누구? 그 누님? “몇번이나 말해줘야 알겠어? 잘 못알아 들었으면 다시 한번 말해줄까?” .......말 안해줬잖아. 그 누님 얘기 나한테 한번도 안해줬잖아........ “....바로......너...유.승.하! 너 하나밖에 없다고.......” .....에?..............그 누님이 아니고 누구....라고? “하아......보자보자 하니까 혼자서 이상한 생각이나 하고 있고.......“ 다시........다시 말해봐. 방금 뭐라고.........? “.......빨리 들어가서 자자........이렇게 늦은 시간에 가기는 어딜 간다는거야? 설마 내가 허락할거라고 생각한건 아니겠지?” .............투두둑...!!....흑.....으...흑..... “!!!!!!!!!” “.......으.....으훅.......으헝헝헝......헝........계세야 이 나쁜놈아!!! 그럼 왜 맨날 말도 없이 사라진 건데!? 아까 그 누님은 또 누구고!! 너 지금 나 놀리는거지? 그렇지!! 어헝헝.....헝..........나는 다 알고 있단 말야!....... 네가 아무리 나 몰래 그 누님이랑 만나서 사랑을 만들고 귀여운 모습도 보여줬다 해도 나는 다 알 수 있단 말이야. ......엉....엉.............그러니까........그러니까...뻥까지마 이 새꺄.......!!! 그냥 사실대로 말하란 말이야...내가 싫어졌다고!! 끄윽....끅........” 결국엔 현관문 앞에서 목놓아 우는 승하였다. 참았던 말들이 횡설수설 쏟아져 나오면서 이제는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는 말을 하고 있는지... 모든게 다 서럽기만 하다. 참고 참았던 만큼 눈물이 쉴새없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더불어서 콧물도 찔끔찔끔 나왔다. “승하야.........그건.....” 세야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거봐.....대답 못하는거........으흑...끄윽....역시.......내가 싫어진거지....어헝....헝......미안.....미안해!!..........그동안 정말 미안했어.....훌쩍........” “이런........내 말좀 들어봐.... 내일........내일 아침에 다 말해줄게. 울지마.......내일 모두 설명해 줄테니까........그만 울어....절대 네가 생각하는 그런게 아니니까........하아.....” 세야가 당황한 표정으로 승하를 계속 어르고 달랬지만 요지부동으로 한번 터져나온 눈물은 좀처럼 그칠 기미가 안보였다. “나는..........정말 다 할 수 있다구..........정말이야..... 정말 널 위해서 다 할 수 있어..... 그 때 그 일도 미안해.........내가 바보같이 먹어버리는 바람에......” 우뚝.......!! “화났을거야........그랬겠지....나 때문에 괜히 병원까지 가는 고생이나 하고.........” “유승하!!!” “......히끅!!” 한참을 혼자서 횡설수설 주절거리다가 고개를 든 승하는 세야의 슬프게 굳어진 표정에 깜짝 놀랬다. 왜 그런 표정을....? “정말.........그렇게 생각해? 내가 승하 네가 아픈데도 병원에 데려가는 걸 꺼려한다고 생각..하는거냐? 그런거.......내가 귀찮아 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럼 아니야? “..........잘 들어......난!!! 한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어! 너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적 한번도 없다고!! 알아들어? 너는........너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해!! 그런 너를 내가 그런 취급하리라 믿는거냐!? 지금!” 세야의 화내는 모습이........무섭기도 하고........그와는 반대로 무척이나.........기쁘기도 하고..... 승하는 도무지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단 한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다고........!!!” 털썩!!! 세야는 그 상태로 승하의 손목을 잡고 끌고 삽시간에 잡아끌었다. “아........그러니까...” “.........그런 바보 같은 말 다시는 하지마.......” “.............” 세야의 일정한 심장박동수가 들리면서 긴장이 풀리자 느닷없이 졸음이 찾아온다. 울만큼 울고나니 몸안에 있던 기운들이 모두 빠져나간 것 같다. 그러고 보니..........지금은 한참이나 늦은 시간............이었지...... ....... ............ 승하는 약간 부은 눈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에서 아직 덜 깼는지 한동안 멍하니 눈을 껌뻑거리다가 곧 어젯밤 무슨일이 있었는지 떠오르면서 스스로가 무지 쪽팔리고 민망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어떻게 그랬나 싶을 정도로 과격하게 울었던 것 같다. 곁에서 한참을 다독거리던 세야를 생각하니..... 화끈!!!!!!! 빌어먹을...... 내가 이제까지 쌓아왔던 쿨한 이미지가...;; 승하는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순간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이게 무슨 냄새지? 방문 틈사이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냄새가 승하의 코를 자극하고 있었다. 불과 일주일 전에도 이랬던 기억이........ 그러나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무척이나 향긋하다고 까지 할 수 있는 고소하고 감미로운 냄새였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부엌에 다가서니 역시나 세야였다. 언제 일어났는지 벌써 깔끔하게 옷을 다 차려입고......... 앞치마를 두르고 있다!? “일어났어? 거기 앉아.” 승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세야의 말에 따라 식탁의자 위에 앉았다. 승하는 안 어울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잘 어울리는 세야녀석의 앞치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곧 놀란 표정으로 흠칫하며 의자를 뒤로 뺐다. “뭐.....뭐해!?” 승하의 목소리가 슬쩍 떨리는게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았다. 세야가 지금....하고 있는게 요리라면.........그렇다면...... 전에 먹었던 그 공포의 죽이 자연스레 떠오르면서 승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내가 만들께!!” 안색이 하얗게 질려 바르르 떠는 모습이 사뭇 안쓰럽다. 세야는 그런 승하를 보고는 어딘지 조금은 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거의 완성돼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거야.” “......으응......그...으래...에......?” 이제는 거의 밀랍인형같이 창백해진 승하가 절망적인 시선으로 다시 요리에 몰두한 세야의 뒷모습에 눈길을 두었다. 오 쉣트!!! 하나니임~!!!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세야가......세야가 또 다시 요리를 했습니다. 요새 가뜩이나 몸도 안 좋아 진데다가 얼마 전에는 위경련까지 걸려버렸다구요!! 이번에도 세야녀석이 만든 음식을 먹고 살아남을 자신이....아니......살....아 남을 수 있을까요? 그렇....겠지요? 살 수 있겠지.....요? 척봐도 엄청 겁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승하의 표정변화를 눈썰미가 좋은 세야가 놓칠리 없었다. 세야는 조금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국자를 집어 올렸다. 마지막은 약한 불에서 뭉근하게 끓여낸다........라..... 탁!! 가스렌지의 레버를 돌려 불을 끈 뒤 쿠킹 장갑으로 냄비를 들어올렸다. 꿀......꺽...!! 세야가 냄비를 들고 식탁가까이로 다가올수록 승하의 몸은 천천히 경직되어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난번과는 달리 분명 냄새는 천양지차로 다르다....훨씬..........좋다. 탁....!! 냄비가 냄비받침대의 정가운데에 놓여지는 순간 승하와 세야의 주변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먹어.” 그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건낸 것은 세야였다. 승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공포의 냄비로 손을 가져갔다. 뚜껑을 여는 순간 무엇이 나올지는....!! 달그락.... “......에?” 승하의 예상과는 달리 냄비 안에는 놀랍게도 정상적인 형태의 야채죽이 들어있었다. 아니.... 무척이나 먹음직스럽게 생겼다. 떨리는 손으로 한수저 들어올려 입에 넣자 놀랍게도 매우 부드럽고 감미로운 맛의 죽이 목구멍 안으로 슬슬 넘어갔다. “마......맛있어...!!” 적당히 간해진 죽에 고소한 맛이 입안을 감돈다... 간단한 야채죽일 뿐인데... 이렇게 맛있을 수도 있구나.. 승하는 마저 죽을 뜨려다가 멈칫하고는 세야를 바라봤다. 승하의 눈동자는 이게 어찌된 일이냐는 듯 의문에 가득차 세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죽은 입맛에 맞아?” “무척이나....” “그래? 그거 다행이군...” “.....응...” 세야는 승하의 대답에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슬쩍 들어올려 웃었다. 그러나 승하는 여전히 얼굴에 의문을 지우지 않은채 세야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우선 먹어. 식으면 맛없으니까. 먹고 나면 얘기해 줄테니.....” “넌 안 먹어?” 승하의 물음에 세야의 표정이 난감한 듯 슬쩍 굳어진다. 뭔가가 매우 껄끄러운 양 주춤거리던 세야가 곧 어딘지 풀이 죽은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죽이라면 질릴만큼 많이 먹었어.” ....... ................. 승하가 냄비안의 죽들을 거의 다 비워갈 때 쯔음 그 모습에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고 바라보던 세야가 입을 열었다. “실은 어제 네가 본 그 사람은..” 죽을 떠올리던 승하가 그 말에 고개를 발딱들고 세야를 바라봣다. “..누군데?” “..........세진형의 소꿉친구이자 여자친구..... 미래의 둘째형수...가 될 사람.” “세진 형이라면 너희 집 둘째형?” “......응..” ............ ...... 사실 세야의 사정은 이러했다. 승하의 가출선언이 있기 전까지 그간 세야의 근황을 대략 설명하자면 시간은 약 일주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승하가 그 극악의 죽을 먹고 병원에 입원하던 날 세야는 속으로 크게 자책하고 있었다. 게다가 승하의 마지막 말을 듣고난 세야는 크게 감동을 받고 한가지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다지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보기로 한 것이었다. 세야는 곧바로 승하를 뒤로 한 채 병원에서 빠져나온 뒤 곧장 본가로 향했다. -누구?- 벨을 누르자 세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세야...” -세야?- “빨리 문 열어.” 곧이어 닫혀있던 대문이 열리고 세야가 집안으로 들어섰다. “왠일이야? 얼마전엔 전화씩이나 다 하더니... 정말 승하랑 싸웠냐?” 세현이 먼저 세야의 곁에 들러 붙으며 궁금한 점을 물어왔다. “너 독립한 후부터는 여기 잘 안왔잖아.” 곁에서 세진이 거든다. 세야는 인상을 슬쩍 찌뿌렸다. 그거야 당신들만 집에 없으면 자주 들릴텐데 말이지.... “아무 일 없어.” “거짓말!!!” “거짓말!!!”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자신의 형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세야는 결국 실토했다. “실은 승하가 지금 병원에서 링겔맞고 있어...” 드물게도 짐짓 음울한 어투이다. “승하가 어쩌다가 그렇게 된거래?” “낸들 아나.... 세야가 더 잘알겠지.” 그러면서 세야를 곁눈질 하는 것이 빨리 실토하라고 재촉하는 듯 싶다. “내가......만든 죽을 먹고 위경련을 일으켰어.....” 읇조리는 세야의 안색이 더없이 침울하고 딱딱하다. 세진과 세현은 그저 넋을 잃은채 세야를 바라봤다. 이자식이 공부말고도 못하는게 또 하나 있었구나...... 아니, 다시 정정해서 공부는 그래도 하면 성적이 오른다는 걸 알았으니까 넘어가고.... 도대체 그 죽이 어떠했길래 위경련을 일으켰다는 거지? 세진과 세현이 서로 곁눈질을 하면서 떨떠름하게 반응했다. “혹시 지난번에 죽 만들줄 아냐고 전화한 것도 네가 직접 만들어 주려고 그런거였냐?” “..........” 대답은 안했지만 그렇노라 시인한 것이나 다름없다. “어떻게 만들면 위경련이 일어나는거냐....” 세진은 쇼파로 가서 앉았다. 노려보는 세야의 눈빛을 감당할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너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가정시간에 뭐했냐?” 세현이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며 물었다. “설거지..또는 뒷정리.” “.....음식엔 손도 안대고?” “여자애들이 알아서 해줬어.” “적어도 tv에서 본건 있을꺼아냐. 하다못해 집에서라도!” “.....내가 요리에 관심을 가질리도 없거니와 그런거 신경쓰고 살 틈도 없었어. 그리고.....나름대로 어머니가 하셨던 방법으로 했어.” 세야의 말에 세진이 쇼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맙소사! 우리 어머니가 언제 위경련이 날만큼 파격적인 음식을 만드시는 거 본적 있냐!?” “어머니가 만든 음식을 네 음식에 비교하는건 좀 지나친 과장이 아닐까......?” ....불끈!! 순간적으로 세야의 이마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젠장!!! 알아! 잘 안다고! 그런 것 쯤은....... 빌어먹을! 어째서 집에 오면 다른 사람은 없고 형들만 있는거야!!” 세야가 화가 난 목소리로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난 고3이야. 어딜 돌아다닐만한 처지가 아니라고. 수능이 코앞이야.” 세현이 냉큼 그럴듯하게 들이 밀어 댔다. 세야의 시선이 가당찮다는 듯 세현을 쳐다봤건만 세현은 모른척 오히려 빙글빙글 웃어넘길 뿐이었다. 세야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세진을 돌아보자 그간 세야에게 지은 죄가 많았던 세진이었으므로 움찔하면서 조그마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오...늘은 순영이랑 데이트약속이 깨졌단 말이다....누군 뭐 좋아서 여기에 있나.” “순영이 누나?” 세야가 뭔가를 깨닫은 표정으로 세진에게 되묻자 세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그래? 순영이랑 나랑 사귀고 있는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고....” “난 가서 공부나 하마. 고3은 괴롭거든...” 도중에 세현이 손을 휘휘 젓더니 곧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갔다. “승하에게는 몸조리 잘하라고 안부나 전해줘. 언제 한 번 또 찾아 갈테지만..” “오지마!!!” 세야가 딱 잘라 말하자 세현이 미간을 찌뿌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매정하기는.. 쯧!!” “나도 그럼 올라가서 하던 일이나 마저 해야겠다.” 세진마저 세현을 뒤따라 방으로 올라가려고 하자 순간 세야가 급히 세진의 어깨를 낚아챘다. “잠깐만, 세진형!” “왜?” 세진이 자신을 잡은 세야를 돌아보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순영이 누나 한식 잘 만들 줄 알지?” “당연한 걸 왜 물어? ..... 개네집이 한식전문점 이잖냐. 이제 곧 장모님 뒤를 이어서 주방일을 물려받을 판인데.....” ...가끔씩은 둘째형도 도움이 되는군. “순영이 누나 연락처 좀 가르쳐 줘.” 세야가 난데없이 순영의 연락처를 묻자 세진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순영이 연락처는 왜!?” “나 급해! 빨리 가르쳐줘.” “순영이는 눈꼬리가 찢어진 남자를 좋아해!!” “그딴 거 알게 뭐야!” “순영이는 키 큰 남자를 좋아한단 말이다!!!” “관심없어.” “..순영이는......” “그게 순영이 누나 연락처를 가르쳐 주는거와 무슨 상관인데!!?” 자신이 원하는 정보는 가르쳐주지 않고 동문서답을 해대는 세진을 보며 세야가 참다못해 짜증스럽게 윽박을 질렀다. 그러자 세진의 표정이 살벌하게 구겨지더니 소리쳤다. “네가 상관없긴 왜 없어!! 네가 지금 딱 그렇게 생겨먹었잖아!!” 세야는 씩씩거리는 세진을 보며 기가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무슨 소리야? 순영이 누나는 형 애인이잖아.” “제길.......네가 내 연애사업에 초를 치게 생겼으니 이러는 거 아냐......” 한참을 못마땅하다는 듯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던 세진은 여전히 불만은 많아 보였지만 곧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정말 곤란하다고...” “이리줘.” 세진이 울상을 짓든 말든 세야는 관심없다는 듯이 그대로 핸드폰을 낚아채듯 받아들고는 순영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좋은 일만 가~득 하셔야 해요. 행복하셔야 해요~ 돈 많이~ 받으세요~ 귀여운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오더니 곧이어 갈라진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계세진! 너 죽을래? 오늘은 못 만난다고 했잖아. 어제 선배들이랑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누나... 저 세야인데요....” -....음......누구?....어머!!! 세야니?- 순식간에 갈라진 목소리에서 금새 상큼발랄하게 바뀐 순영의 음성을 듣던 세야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난 세진이 번호가 뜨길래 또 세진인줄 알았지 뭐야. 그런데 네가 나에게는 무슨 볼일이야?- 순영의 목소리가 묘하게 들떠 있었다. “누나 죽 만들줄 아시죠?” -어머, 그건 왜? 누가 아프기라도 해?“ “예......어쩌다보니......저.. 그래서 말인데 죽만드는 방법좀 배울수는 없을까요?” -물론이지! 지금 당장이라도 괜찮아.- “...지금 당장은 좀 곤란하고......저녁쯤은 시간 나세요?” -당연한 걸 묻니~ 그때쯤이면.....어디보자... 음....괜찮겠는걸. 우리집 알지? 거기로 찾아와. 간만에 네 얼굴이나 보자. 호호호호.....- “감사합니다. 그럼 이따 저녁에 찾아뵈겠습니다.” -어우~! 딱딱하기는.... 알았어. 이따 보자.“ “.....예..” 세야가 통화를 다 마치고 세진에게 핸드폰을 건네자 곁에서 다 듣고 있던 세진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젠장! 오늘은 힘들어서 도저히 못 움직이겠다고 하더니!!” 세진이야 어찌되었든 볼일을 모두 마친 세야는 현관으로 가서 신을 신었다. “순영이 누나는 분명 형을 선택할 테니까 걱정할 필요없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세야는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서 툭하고 한마디 던졌다. “순영이 누나는 진짜로 편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 목 쉰 목소리는 안하거든.” ........... ....... 승하를 집에 바래다 준 뒤 세야는 곧바로 순영의 집을 찾아갔다. 오래전부터 잘 알고 지내왔던 집안이었기에 모두들 살갑게 세야를 반겨주었다. 세야의 사정을 듣고 난 순영은 자지러지게 웃어댔지만........ 그러나 그에 반해 요리수업은 꽤나 힘겨운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재료를 다루는 솜씨는 일반인보다 월등히 좋은 세야였으나 문제는 요리에 대한 기초상식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파 다듬는 법부터 마늘을 까고 다지는 법 심지어는 쌀을 씻는 법까지 하나하나 일일이 배워야했다. 세야를 가르치는 순영의 요리수업은 매우 친절하고 자세하게 전개되었지만 문제는 제대로 된 음식이 나올 때까지 새벽까지 지새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본래 그녀가 요리에 대해 쏟는 열정은 매우 엄청난 것이어서 이왕 가르치려면 똑바로 가르치자는 일념하에 세야에게도 매우 꼼꼼한 기준안을 적용시켰는데... 사실 초보중의 초보라고 불릴 수 있는 세야가 그녀의 마음에 썩...들만한 음식을 대번에 만들어 내기란 무리였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새벽까지 음식을 만드는 건 예사가 되었던 것이었다. 물론 새벽까지 지새는 것쯤은 집에 있을 때 아무런 하자가 될일이 없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순전히 승하에게만 한해서이고....... 실은 제때제때 잠이 들던 규칙적인 생활을 하던 세야에게 그것은 꽤나 고역이었다. 어쩌다가 깜빡 졸아서 제시간을 못맞춰 순영의 기준안을 통과하지 못할 때도 있었고 가끔씩 손가락을 베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들려오는 순영의 앙칼진 타박.... 평소에는 세야에게 무척 잘해주는 그녀였다가도 요리에 대해서 만큼은 누구보다 엄격한 그녀이기도 했다. 그 덕분에 지금과 같이 성공적으로 죽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승하에게 맛.있.는. 죽을 만들어주고 싶었던 세야였다. “.......해서....어제 나를 데려다 준거였어. 마지막의 그건....거의 우발적인 거였고..” 아묻튼 이런 자세한 사정까지 일일이 나열하지는 않았지만 차분하게 전개해나가는 세야의 설명을 듣던 승하는 느낄 수 있었다. 이....자식.....진짜 열심히 했구나. 나 하나 때문에...... “그러니까..... 이제까지 학교 끝나고 일찍 사라진거랑 새벽 늦게 들어온게... 그런....이유였다는 거지?” “...말하자면...그래.” “...............” 나는 그런줄도 모르고..... 바보같이 이 녀석을 의심했는데... “진작에 말해주지 그랬냐... 나는 몰랐어...그런건 줄은...” 승하가 속으로 아무리 쿨한 이미지를 외치며 진정하려고 했지만 도무지 컨트롤이 되지 않는다.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빌어먹게도 또 눈물이.... 후읍........후읍.......!! 심호흡도 해보고 눈에 힘을 준 뒤 입술도 꾹 깨물어 보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결국 허무하게 눌러참았던 눈물이 볼따구를 통해 흘러내렸다. 고개를 돌리고 팔로 쓱싹쓱싹 눈가를 문질러도 보지만 오히려 더 눈물이 난다. 이런 젠장....!! 이 빌어먹을 눈물;; 청승맞게......;;; 승하가 팔로 계속 눈가를 거칠게 문질러대자 세야가 팔을 낚아챘다. “지금 뭐하는 거야!” “에.....그...그러니까..” 승하는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갑작스레 목이 꽈악 메여왔다. 이대로 입을 열게되면 분명 흐느낌도 새어나올 것 같았다. 그런 승하를 바라보던 세야는 천천히 울고 있는 승하를 감싸 안았다. “왜.........” 세야는 말하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 너 요새 와서 너무 자주 우는거 알아?” 그.....그거야 네녀석이.... “이러면 정말 곤란해... 말은 안했지만 네가 울면 얼마나.........” ........섹시한데......제길...!! 뒷말은 힘겹게 속으로 집어 삼킨뒤 세야는 울고있는 승하의 눈에 입을 맞추었다. 하아... 아침인데 이렇게 도발적으로 나오면 어쩌자는 건지...... 지난 일주일간 승하의 몸상태를 생각하여 힘들게 참아왔던 인내심이 바닥을 긁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너에게 계속 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미안해.......” .....으욱! 오늘따라 왜 이리도 센티멘털 해진다냐!! 그렇다해도... 이 상황에서 감동받지 않을 인간이 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냐고......;; 정말............정말....이라구..... 그러나 세야의 표정이 승하의 덧붙임에 미묘하게 변했던 건 순간이었다. “나도 너에게 뭔가 해주고 싶은데...” 승하의 말이 끝나는 시점에 세야의 입가에 어딘지 께름칙한 가느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꼭 그런 것 만도 아니야....” 갑작스레 낮게 속삭여오는 세야를 승하는 눈물을 멈추고 곧 멍청한 표정으로 올려다 보았다. “나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다면.....” 점차 가까워져 오는 세야의 몸에 어느새 승하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슬슬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무척이나 가슴 찡한 감동의 도가니였는데;;; 갑작스레 변한 세야의 태도에 비지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린다. “정말 내게 뭔가를 해주고 싶다면 말야........” 히익!!! 이........이자식;;; 잘나가다가 갑자기 왜 이래? 이제는 뒷걸음질 칠대도 없이 벽에 다다른 승하는 억지로 안면근육을 끌어 올리며 말했다. 이제는 눈물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위기를 어찌 모면할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였다. “있잖아.......저기...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방금전의 내말은.....” 그러나 뒷걸음질 친 보람도 없이 어느새 세야의 손에 붙들린 승하는 세야의 달콤하게 속삭이는 낮은 저음에 몸이 경직됐다. “...하자.” 그 목소리에 껌뻑 죽어 무의식적으로 그러겠노라 대답하려던 승하는 깜짝 놀라 흠칫했다. “하......학교가야지!!” 그래!! 학교가야지! 학교 가야하고 말고! 무엇보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건전한 고등학생들이 아닌가!? 그러나 승하의 발악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듯 세야는 더욱 가까이 몸을 밀착시키며 말했다. “시간은 충분히 여유가 있잖아?” 켁!!! “나! 이래뵈도 환자라고!” “...위경련이잖아. 직접적인 관련만 없으면 돼.” 히.......히익!! “이....이러지 마. 너 피곤하잖아. 어제도 새벽늦게 잤을 거 아냐..” “...너 때문에?” 윽...!!... “그래.... 나 때문에......” 이제는 인신공격까지;;; 이 치사한;;; 녀석;;;; ........넘어가면 안되는데;;;; 정말 넘어가면 안되는데에;;;;;; 그런데 생각해보니 한두가지 찔리는게 아니다. 게다가..... 세야 녀석이 말없이 나를 쳐다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나도 묘한 기분이 드는게..........정말 이러면 안.....돼는데.... “...할꺼지?” “.............응........” 빌어먹을!! 이래서 사람은 평소에 뭔가를 빚지고 살면 안된다는 거다!!! 결국 감동의 눈물 한바가지와 개탄의 비명 한바가지를 모두 쏟아내 버린 승하였다.... ..................................... .................... “요새 세야녀석 또 어디를 다닌데?” 세진이 잘 깎인 사과를 으적으적 씹어 먹다가 말했다. 큰형인 세이는 그간의 사정을 몰랐으므로 의아한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제빵학원.” 세현이 세진의 물음에 답하면서 어리둥절한 세이에게 씨익 웃어보였다. “엑!? 아니, 거기는 또 왜?” “......글세...” 세진이 무척이나 놀란 목소리로 물었지만 세현은 비죽이 웃을 뿐 대답해주지는 않았다. “그녀석...... 우리에게 하는 행동이랑은 달리 의외로 애처가란 말이지...뭐 어렸을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 .......... -형... 근방에 유명한 제빵학원 알고 있어?- “제빵학원?” -형은 많이 돌아다녔으니까 왠만한 곳은 추천해 줄 수 있을거 아냐..- “그거야 어럽지는 않지만...... 갑자기 왜?” 잠시간 뜸을 들이던 세야가 뚱하니 내뱉었다. -............그야 승하가 그것들을 좋아하니까...- ......................... ............... 다시금 그때 일을 떠올리니 세현의 입가에 절로 웃음이 맺힌다. "맘에는 안들어도 일단은 하늘같은 낭군님을 받들어 색시 노릇은 잘하고 계시더만.... 우리 세야군..... 큭....큭큭..." 어린날의 그놈 스페샬 외전 <방정식 : 계세야x + 요리y = ??>편... the end..